에노모토가 호통을 치자 주변 토막집에서 사람들이 나와 구경을 했다. 주변에 소란스러워졌음에도 중훈은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때였다. 50대중반으로 보이는 외팔 사내가 낡은 양동이에 담긴 물을 중훈에게 뿌렸다.
사내는 사실 토막촌을 기웃거리는 에노모토를 욕보이려 물을 떠오던 참이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옷차림이 일본순사였다. 그래서 그는 중훈에게 대신 물을 뿌렸다.
“아우씨 뭐야? 누구야?”
물벼락에 화들짝 잠에서 깬 중훈이 혀 꼬인 발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물을 뿌린 사내가 가래 낀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 놈이 대낮부터 술 쳐 먹고 잠이나 자고 앉았어. 나가서 동냥을 하든 판자조각이라도 주워서 집이라고 좀 고치든지. 손님 왔으니 정신 차려.”
사내는 호주머니에서 꼬질꼬질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여전히 반쯤 풀린 눈으로 앉아있던 중훈은 에노모토를 발견하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주전자를 들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일어나.”
에노모토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중훈은 물을 들이켜고 머리를 흔들었다.
“예. 그러지요.”
잰걸음으로 토막집 골목을 빠져나간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가까운 목욕탕이었다. 중훈이 씻는 동안 에노모토는 목욕탕주인에게 15전을 주고 허름한 옷을 얻었다. 씻고 낡았지만 깨끗한 옷을 입은 중훈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
목욕탕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던 에노모토는 중훈이 나오자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중훈도 말없이 그런 뒤를 따랐다. 10분 남짓을 걸어 도착한 곳은 선지해장국을 파는 작은 식당이었다.
에노모토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여기 해장국 둘.”
힐끔 에노모토의 옷차림을 본 주인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요.”
코끝을 자극하는 해장국 냄새에 중훈은 정신이 아찔했다. 그 동안 돈이 생기면 술을 마시기 바빴다. 뱃속을 따뜻한 곡기로 채운지가 언젠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해장국이 나왔다. 중훈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뻘건 해장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노모토는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어서 들지.”
중훈은 에노모토가 말을 하기 무섭게 뜨거운 해장국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재대로 씹지도 않고 입에 넣고 삼키기를 몇 번. 순식간에 해장국 한 그릇을 비워낸 숨을 길게 내쉬었다. 국물 한 한번 떠먹어보곤 숟가락을 휘적휘적 젓고만 있던 에노모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더 먹지?”
에노모토가 자신의 해장국을 중훈의 앞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중훈은 침을 꿀꺽 삼키곤 해장국을 끌어와 정신없이 입에 넣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해장국 두 그릇을 해치운 중훈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배를 두들겼다.
에노모토는 호주머니에서 담뱃갑과 성냥을 꺼내 중훈의 앞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그렇게 산송장처럼 숨통만 이어갈 생각이면 마약을 해.”
중훈은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매만지며 말했다.
“거지새끼 씻기고 밥 먹이시려고 찾아오셨을 리 없고, 무슨 일이세요?”
“나랑 같이 일을 좀 하지?”
에노모토는 호주머니에서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과 30원을 꺼내 중훈에게 건넸다.
“이 돈으로 옷 좀 맞춰 입고, 여관방이라도 잡아. 그리고 22일 1시까지 찾아와.”
말을 끝낸 에노모토는 곧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해장국 값을 계산하곤 그대로 식당을 나섰다.
혼자 남은 중훈은 성냥을 당겨 담배에 불을 붙이곤 피식 웃었다. 에노모토…….여전히 변한 것이 없었다. 마치 얼음 같은 사람.
“여전해...허허 여전해. 잘 먹었소.”
중훈은 주소가 적인 종이와 돈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곤 식당을 나섰다. 그는 담뱃잎을 퉤 뱉곤 호주머니에 넣은 돈을 다시 매만졌다. 뱃속이 든든하니 술 생각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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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직원들은 아직 퇴근을 하지 않은 시간. 강두와 사무실을 나서는 진희의 얼굴엔 당혹함과 기쁨 등 복잡한 감정이 묻어났다. 식도원에 도착하니 입구에서 박정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낡은 옷이었지만 최대한 정중하게 차려 입은 그는 진희와 달리 제법 키가 컸다. 그는 진희와 강두를 발견하자마자 황급히 뛰어왔다.
“안녕하세요! 박정웅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웅은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했다. 강두는 허리를 숙이고 일어서지 않는 정웅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하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들어가시죠.”
강두는 어색해하는 진희까지 챙기며 안으로 향했다. 세 사람이 들어서자 강두를 알아본 지배인이 인사를 하며 반겼다. 지배인은 가장 크고 조용한 방을 안내해주었다.
고급요릿집이 처음인 진희와 정웅은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직원 세 명이 들어와 겉옷을 받아 정리해주었다.
익숙하지 않은 대접에 진희와 정웅이 어색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사이 직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요기를 할 수 있는 다과와 차가 먼저 차려졌다.
익숙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던 강두와 달리 진희와 정웅은 뻘쭘하게 앉아 있었다. 강두는 두 사람 앞에 화과자를 하나씩 놔주며 말했다.
“드세요. 식전에 입맛을 돋우는데 제법 괜찮습니다.”
강두의 친절함에 익숙한 진희가 화과자를 덥석 베어 무는 것과 달리 정웅은 쉽사리 먹질 못했다. 정웅은 머뭇거리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도와주신 것도 너무 감사한데 이렇게 비싼 요릿집에서 식사도 대접해주시고.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웅의 말에 강두는 호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정웅에게 한 개비 권하며 말했다.
“같은 조선인으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조선인이 일본 놈들한테 당하는걸 보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없지요.”
강두는 담배에 불을 붙이곤 연기를 허공으로 길게 흘려보내곤 말을 이었다.
“유치장에 계시는 동안 식사나 제대로 하셨습니까? 다른 것이 고문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압박을 주면서 제대로 식사를 주지 않는 것도 인간의 기본권리를 침해하는 행위고 고문입니다.”
강두의 말에 정웅은 한숨을 쉬었다. 경성에서 돈을 좀 번다하는 작자들은 모두 거만함에 취해있었다. 하지만 강두는 달랐다. 한 마디 한 마디 정중함이 묻어있었고 같은 민족을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제가 할 줄 아는 것은 없지만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시면 무엇이든지 돕겠습니다.”
정웅의 말에 강두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주시겠습니까? 제가 귀한 사람을 하나 얻었군요.”
정웅은 결심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진희는 빠른 속도로 화과자를 먹어치웠다. 평소 달달한 과자를 좋아했지만, 워낙 가격이 비싸서 잘 먹지를 못했다. 그녀는 화과자가 하나가 남고 나서야 자신이 정신없이 화과자를 먹어치웠다는 것을 인지했다.
‘똑똑똑’
뻘쭘해진 상황에 노크소리가 들려오자 진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 정웅도 강두도 상황을 모르는 것 같았다.
직원들이 음식을 차리는 동안 강두는 지배인을 불러 조용히 속삭였다.
“화과자 두 상자만 사다주실 수 있습니까? 같이 온 여성분이 잘 드시네요.”
“네. 사장님. 식사 끝나시기 전에 준비해 놓겠습니다.”
강두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차려진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미리 정웅의 이야기를 해둔 탓에 속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음식들이 대부분이었다.
강두는 먼저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자. 드시죠.”
식사가 시작되자 정웅은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음식을 먹어치웠다. 유치장에서 나와 먹은 것은 겨우 흰 쌀죽뿐이었다. 식도원에서 내놓는 음식들은 그가 그동안 먹던 음식과 너무 달랐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강두는 백학청주를 한 병 주문했다. 푸짐한 식사에 가벼운 술 한 잔은 약이라 생각하는 그였다. 그는 직접 진희와 정웅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우리 박정웅씨 앞으론 큰일 없이 무탈하시길 기원합니다. 건배.”
강두의 건배제안에 맞춰 모두 술을 쭉 들이켰다. 술이 부드럽게 넘어가자 입가에 맑은 향이 맴돌았다.
강두는 술을 한 잔씩 더 따라주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손가락으로 빙그르 돌리며 말했다
“요즘 저녁은 혼자 대충 때웠는데 두 분 덕에 저도 오랜만에 맛있는 저녁식사를 합니다.”
정웅은 진희의 머리를 눌러 숙이게 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가 정말 감사드립니다.”
강두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술 한 잔 더 드시죠.”
백학청주 한 병을 모두 비우고 두 번째 병을 반쯤 비웠을 무렵, 잔뜩 술기운이 오른 정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 그렇다니까요. 아니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심지어 그날 같이 일했던 인부들 증언이 있는데도 무조건 제가 범인이라고 자백 하라지 뭡니까? 하루에 밥을 세 번 주긴 줍디다. 근데 코딱지만 한 밥에 쓰케모노랑 아마즈쇼가만 주는데 그게 요기가 되겠습니까?”
정웅이 흥분하자 진희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리려 했다. 강두는 손을 들어 괜찮다고 말리며 말했다.
“일본인 식습관 자체가 양도 적고 다 짜고 달고 독한 놈들입니다. 저도 소싯적 일본에서 지내봐서 잘 압니다. 한데 도대체 무슨 사유로 잡히신 겁니까?”
정웅은 술을 한 잔 쭉 들이켜곤 말했다.
“제가 아편을 거래했다지 뭡니까? 공사현장 다니면서 겨우겨우 어머님 병원비 내고 풀칠하고 사는데 아편이 뭡니까? 어찌나 환장하겠던지.”
강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편이요?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자세히 얘기 주시겠습니까?”
정웅은 강두가 흥미를 보이자 더욱 더 신나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조사를 받으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최근 아편유통이 상당히 늘었다고 합디다. 근데 왜놈 요것들이 누가 어떻게 유통하는지 잡지를 못하니 죄 없는 조선인 잡아다가 자백하라고 난리치던 거라 말입니다.”
강두는 정웅에게 계속 술을 권하며 꼬치꼬치 이야기를 캐물었다.
10시가 넘어서 겨우 술자리가 파했다. 정웅은 술을 꽤 마셨지만 스스로 몸을 가눌 순 있는 수준이었다. 요릿집을 나서며 화과자를 받은 진희는 기분이 잔뜩 들떠있었다.
진희와 정웅을 보낸 강두는 황급히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1931년 5월 22일 오후 1시 수유리
중훈은 인력거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벌판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건물만 덩그러니 있었다. 에노모토가 도대체 왜 이곳으로 오라고 한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물곤 철문이 굳게 닫힌 건물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이 있을 곳이 없었다. 그때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어두운 건물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에노모토였다.
“뭐해?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