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훈은 자꾸만 감기는 눈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새벽부터 여관으로 찾아온 에노모토에게 조사한 것을 보고하고 그대로 본부로 끌려왔다. 본부엔 어제 만났던 신지를 비롯해 종로경찰서에서 차출된 순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종훈. 집중 좀 하지?”
슬그머니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딴 생각하고 있던 종훈은 에노모토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죄송합니다!”
에노모토는 헛기침을 하곤 말을 이었다.
“종로경찰서에서 가져온 그간의 마약사건자료를 모두 검토하고 나면 해결 된 사건이라도 우리가 전면재수사를 들어간다. 분명히 놓친 것이 있으니 여태 사건을 해결 하지 못했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19명의 대답이 수사본부에 쩌렁쩌렁 울렸다. 순사들과 순사보들은 일제히 퍼져 서류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신지는 순사들 사이를 오가며 특이사항이 있는지 체크했다. 할 일이 없는 것은 종훈뿐이었다.
그는 순사보 출신이었지만 그 이전에 에노모토의 정보원이었다. 사실상 경찰업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에노모토는 혼자 멍 때리고 앉아있는 종훈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고 있으면 사건이 해결이 되나? 나가서 정보를 캐와. 자네. 가죽잠바 안 주머니는 확인 해보았나? 꼭 해봐.”
에노모토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순사와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신지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종훈은 왼쪽가슴팍을 만져보았다. 종이의 촉감이 느껴졌다. 그는 서둘러 수사본부를 나섰다.
이번엔 해매지 않고 큰길을 찾아 인력거를 탄 종훈은 호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편지를 꺼냈다. 아무생각이 없는 표정으로 편지를 읽기 시작한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두 번이나 편지를 다시 읽은 그는 편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종훈은 떨리는 손으로 호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는 겨우 성냥을 당겨 담배에 불을 붙이곤 큰 소리로 말했다.
“명치정 말고 대도정으로 갑시다. 10전 더 쳐주겠소.”
“예. 알겠습니다.”
인력거꾼은 황급히 인력거 방향을 돌리며 말했다.
인력거가 대도정으로 향하는 동안 종훈은 줄담배를 피워댔다.
대도정에 도착한 종훈은 번화가에 인력거를 세웠다. 그는 인력거꾼에게 20전을 쥐어주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2층짜리 낡아 보이는 건물에서 20대로 보이는 사내가 짜증을 내며 나왔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담배종이와 담뱃잎이 들은 쌈지를 꺼내 능숙한 솜씨로 권련을 말았다. 종훈은 그가 성냥을 꺼내는 것을 기다렸다 살며시 다가갔다.
“저 담뱃불 좀 빌립시다.”
“그러시지요.”
종훈의 말에 남자가 아직 불이 꺼지지 않는 성냥을 내밀었다. 종훈은 담배에 불울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드리곤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면서 보니 담배를 마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시더군요.”
종훈의 말에 사내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요즘 나오는 양담배는 입에 맞지 않아 항상 말아서 피다보니 이리 됐습니다.“
“그러십니까? 허허 혹 주변에 추천해주실 다방 없습니까? 학림다방인가? 거기가 유명하다던데.”
종훈이 슬쩍 다방이야기를 흘리자 사내는 학림다방과 추천하는 다른 다방들의 위치를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두 사람은 담배를 한 대씩 더 태우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에 뵈면 제가 돼지수육에 막걸리 한잔 사겠습니다. 반가웠습니다.”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약속하신 겁니다? 하하 그럼 다음에 꼭 뵙시다.”
종훈은 사내와 정중하게 악수를 했다.
에노모토가 종훈을 정보원으로 사용한 것은 특유의 넉살 때문이었다. 처음만난 사람과도 족히 5분이면 친해지는 종훈이었다.
사내와 헤어진 종훈은 생각보다 쉽게 학림다방을 찾았다. ‘겉으론 세련된 건축양식을 하고 있었지만 칙칙해 보이는 다방.‘ 사내의 표현과 너무나 일치하는 다방이었던 것이다. 종훈은 군침을 꿀꺽 삼키곤 다방 문을 열었다. 실내는 칙칙하고 어두웠다. 커피를 한잔 시키고 앉으니 종업원이 금세 커피를 내왔다.
종훈은 이상한 기름기가 떠있는 커피를 눈을 꼭 감고 한 모금 마셨다.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 평소 쓰기만한 커피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못 마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 커피는 그 맛이 최악이었다. 쓴 맛 뒤로 올라오는 느끼한 향이 게속 입가에 맴돌았다.
황급히 담배를 피워 문 종훈은 그제야 다방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종업원은 모두 두 명이었다. 내부는 꽤 넓은 편이었는데 테이블 간격이 넓어 앉을 자리는 많지 않았다. 종훈은 자꾸만 자신을 힐끔거리는 종업원의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흡.....”
종훈은 훅 올라오는 구역질을 겨우 참았다. 담배를 뻑뻑 피우며 입에 남은 커피 맛을 지운 그는 종업원을 불러 물 한 잔을 부탁했다. 다행히 종업원이 가져온 물은 멀쩡했다.
커피가 맛이 없어 다른 음료를 주문하기도 무서웠다. 결국 종훈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물을 마시면서 꾸역꾸역 커피를 비워냈다.
반쯤 비운 커피를 보면서 담배를 피우는 종훈의 앞에 종업원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손님 전화 받아보세요.”
“예?”
“전화 받으시라고요.”
종업원은 짜증스럽게 말하곤 휙 돌아 카운터로 가버렸다.
종훈은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카운터로가 전화를 받았다.
“네.....”
수화기 넘어 얼음장처럼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노모토경감님이 보내신 분이십니까?”
종훈은 빡빡 찢은 편지조각을 넣어 둔 호주머니를 매만지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제가 김종훈입니다.”
“물건 도착하면 바로 수령하셔서 수림관으로 찾아오세요. 위치는 종업원한테 물어보세요.”
“수림관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의문의 여자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곤 전화를 끊었다. 종훈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물건을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인 고통 그 자체였다. 시간이 흐르고 지루함에 지켜서 온몸이 꼬여 갈 때쯤 다방 문이 열렸다. 검은색 천으로 싼 네모난 것을 품에 꼭 안고 있는 정웅이었다.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여...여기가 학림다방 맞습니까?”
정웅의 말에 종업원이 말했다.
“명치정에서 보냈나요?”
정웅은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다른 종업원이 물을 한 컵 들고 정웅에게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정웅은 종업원이 건넨 물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는 들고 온 궤를 종업원에게 건네주고 말했다.
“후 이제 좀 살겠네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웅은 다방을 나서자마자 하늘을 올려보았다. 돈을 아끼려 명치정에서 대도정까지 뛰어왔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10원을 꺼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오늘 아낀 돈이면 미쓰꼬시 백화점에서 진희의 새 하이힐을 살 수 있다. 그 동안 낡은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진희가 신경 쓰였었다. 그는 10원을 조심스럽게 호주머니에 넣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진희가 퇴근하기 전에 닭이라도 한 마리 사다 푹 삶을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정웅이 급하게 명치정으로 되돌아가는 사이 종훈은 건네받은 궤를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서 열어 볼 순 없었다. 그는 종업원들의 따가운 시선에 서둘러 궤를 다시 검은색 천으로 꽁꽁 싸맸다. 도대체 뭐 길래 자물쇠까지 채웠는지 궁금했지만 열어볼 방도도 열어서도 안됐다.
검은색 천으로 손잡이를 만들어 들고 다방을 나선 종훈의 표정에 짜증이 가득했다. 궤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무거운 궤를 들고 수림관까지 갈 생각에 벌써 온몸이 아픈 것 같았다. 그 많던 인력거도 오늘따라 이상하게끔 보이지 않았다.
종훈은 20여분을 걷고 나서야 겨우 인력거를 탈 수 있었다. 양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던 차에 만난 인력거꾼에게 술이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치밀었다. 그는 인력거가 출발을 한지 10여분도 되지 않아 금세 잠이 들었다.
수림관은 수하정에 위치한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구식여관이다. 1층은 새벽5시부터 저녁5시까지 곰탕을 팔고, 2층은 여관으로 운영하는 특이한 곳이다.
종훈이 수림관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바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향하던 그는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에 슬쩍 발을 돌렸다. 새벽에 에노모토를 만나 애증의 선지해장국을 먹은 이후 구역질나는 커피만 마셨다. 배가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문을 닫기 직전이라 그런지 곰탕집엔 손님이 없었다. 솥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60대로 보이는 노파는 종훈이 기침을 하자 화들짝 잠에서 깼다. 노파는 종훈을 위아래로 흩어보고는 말했다.
“국밥 한 그릇 줘? 먹을 복 있네. 몇 그릇 안 남았는데 기다려 금방 말아줄게.”
종훈은 군침을 꿀꺽 삼키곤 자리에 앉았다.
노파는 뚝배기에 찬밥을 넣고 곰탕 국물을 넣었다 뺐다 토렴을 하기 시작했다. 금세 따뜻한 곰탕 한 그릇과 잘 익은 김치가 종훈의 앞에 놓였다. 그는 뭘 생각할 것도 없이 곰탕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종훈이 한참 뚝배기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사이, 세련된 양장차림에 하이힐을 신고 한손에 양산을 든 여성이 은은한 분 냄새를 풍기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종훈의 앞에 앉아 도도하게 다리를 꼬았다. 종훈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김종훈씨? 후훗 배가 많이 고프셨나봐요? 그래도 약속하신 물건부터 주셔야지 식사부터 하고 계시면 안 되죠.”
“예? 아…….예…….”
종훈은 의문의 여성이 도도하게 굴자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그는 가져온 궤를 식탁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겁니다. 근데....이게 좀 무거워서...”
종훈의 말에 여성은 소름끼치게 웃었다.
“그래서요? 설마 제가 그걸 들고 올라갈꺼라고 생각하셨어요? 빨리 드세요.”
종훈은 곰탕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쯤 남은 곰탕이 아쉬웠지만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앉아있는 이상한 여자 탓에 도저히 넘어가질 않았다.
식당을 나와 여관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이상한 여자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윤화혜에요.”
“김종훈이에요…….
”
인사를 하고 종훈이 멍하니 서있자 화혜가 말했다.
“뭐하세요? 안 올라가세요? 설마 치마 입은 여자 꽁무니 쫒는 변태?”
화혜의 말에 종훈은 허겁지겁 계단을 올랐다. 오래된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뒤 따르는 화혜의 웃음소리가 괴기하게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