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끈 묶은 푸석한 머리,
군데군데 버짐이 퍼져있는 초췌한 얼굴,
빨아도 때가 지지 않는 낡은 옷을 입은 서로,
눈만큼은 참으로 초롱하고 예쁜 아이였다.
서로는 그 날의 사건 이후로 말 수가 적어지고 웃음도 사라졌다. 친구도 하나 없었다. 부모의 보살핌이 없는 아이는 곧잘 그러듯 늘 혼자 있기를 원했다.
그 다음 해 2학년 겨울 방학이 끝나고 3학년 1학기가 시작한 무렵 앞집에 새 가족이 이사를 왔다.
언제부터였는지 한창 시끄럽게 공사를 하던 집이었는데 어느새 커다란 저택이 자리를 잡고 들어서 있었다.
담이 높은 집이었지만 마당에 있는 보라색 자카란다 나무가 담 밖으로 까지 무성한 가지를 뻗어 내밀어 화사한 분위기를 풍기는 멋진 집이었다. 한 번씩 집안 누군가가 커튼을 젖히면 새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는 넓은 거실이 보였고 누군가 현관문을 드나들 때면 마당의 분수에서 나오는 물소리가 밖에 까지 들렸다. 아마도 분수보다는 작은 폭포가 있는 듯했다.
서로는 어린 나이에 일찍부터 방황을 시작한 건지 하교 후 집에 들어가기 전에 종종 놀이터에 들려 그네를 탔다. 발을 굴려 높이 높이 올라갈 때면 마치 심장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것 같았고 다시 뒤로 밀려 떨어질 땐 하늘에 대롱대롱 매달렸던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바람, 그 느낌이 좋았다.
벚꽃이 만발한 어느 봄날이었다.
그 날도 서로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혼자서 그네를 타고 있었다. 발을 굴러 최대한 높이 올라가려 애를 썼다. 더 높이 올라가 그 느낌과 바람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그네가 하늘과 평행을 이룰 만큼 높이 올라갔을 때 바로 그 찰나에 강물 속에서 보았던 그 낯선 소년을 발견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뽀얀 얼굴과 윤기 나는 머리 결을 가진 소년, 그가 확실했다. 10살 밖에 안 된 한 어린 여자아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음 순간,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쿵!
가슴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계속해서 들렸다.
그 낯선 소년은, 아니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그 정체 모를 소년은 생각해보니 얼마 전부터 맞은 편 벤치에 앉아 그네 타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가 그것을 깨달은 순간 주저 없이 그네에서 뛰어 내려 그 소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소년은 벤치에 앉은 채 고개를 들어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올려다보았다.
허름하다 못해 잡아끌면 그대로 찢어져 버릴 것 같이 낡은 옷을 입은 어린 여자아이. 유달리 눈에 띄는 것은 차림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소매 끝자락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세련된 디지털 손목시계였다. 여느 고급 브랜드 상점에서 조차 구경해 보기 힘든 드물고 현대적인 디자인의 시계.
어울리지 않았다.
“혹시 저 기억해요?”
서로가 당돌하게 물었다.
“아니, 우리가 전에 만난 적 있나?”
소년은 약간 당혹스러운 듯 해 보였다.
“머리가 나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소년을 올려다보는 서로는 표정이 없었다.
“버릇이 나쁜가?”
서로의 말에 질세라 소년이 대꾸한 말은 고작 이런 말이었다. 다짜고짜 다가와 자기를 기억하냐고 묻더니 머리가 나쁘냐니…… 살면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런 걸지도……”
“뭐? 그런 걸지도? 그럼 버릇이 나쁜 게 맞는 것 같다 뭐 이런 뜻이야?”
“제가 학교 교육은 잘 받았는데 가정교육을 잘 못 받았거든요.”
“하! 이런 꼬맹이가, 말 하는 거 봐라.”
“오빠는 가정교육 잘 받았어요? 처음 본다면서 왜 반말해요?”
“와~ 엄청 당돌하네! 그럼 내가 너처럼 쪼만한 애한테 존댓말 할까?”
“그러란 뜻은 아니었어요. 정말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서로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도 기가 차 소년을 아연실색케 했다.
“넌 나를 아니?”
‘네, 알아요. 작년 여름에 강물에 빠진 저를 구해줬잖아요.”
“뭐라고? 내가 널 구해줘? 하하! 무슨 소리야. 난 수영 못해. 언제 물에 빠졌었어?”
“네, 작년 여름에요. 가청에서.”
“처음 들어보는 곳인데, 널 구해준 사람이 나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야. 근데 그렇게 닮은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네. 아무튼 그때 많이 놀랐겠다. 넌 이름이 뭐야?”
“제 이름은 해 서로에요.”
“이름이 서로야?”
“네, 근데 닮은 사람 아니고 진짜 오빠였어요.”
“그래? 목소리도 똑같아?”
“어……”
서로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네, 완전 똑같아요.”
“하하하, 신기하네. 정말 신기하다. 어느 구급대원 아저씬지 엄청 동안인가 봐.”
“진짠데. 고등학생처럼 생긴 구급대원이 어디 있어요?”
소년이 입은 교복에 박힌 학교 이름을 보고 그가 고등학생이란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엄청나게 동안이면 있을 수도 있지. 근데 나는 널 구해줬다는 그 사람이 동안이라는 사실보단 누군가 착각할 만큼 닮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걸.”
“절 구해 준 사람은 구급대원도 아니고 닮은 사람도 아니고 오빠였다니까요. 왜 기억을 못해요? 바보 아니에요?”
“하하, 얘가 또 이러네. 나 공부 잘해. 바보 아니야.”
“그래요? 오빠 저보다 공부 잘해요?”
소년은 서로의 질문이 내심 반가웠지만 티내지 않으려 안색을 가다듬고 익살맞은 표정으로 되 물었다.
“아마 그럴걸?”
“그럼 우리 내기해요. 내가 공부 더 잘하면 내가 더 똑똑한 거니까 저를 구해준 사람은 오빠가 맞는 거예요. 바보같이 기억을 못하는 거지. 그 대신 오빠가 공부 더 잘하면 기억을 못할 리 없으니까 내가 틀린 거겠죠? 그럼 그 때 오빠 말 믿어 줄게요.”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래도 뭐, 승산이 높은 내기는 하는 게 이득이겠지? 그래! 내기하자. 물리기 없기!”
“물리기 없기.”
“그럼 어떻게 겨룰까? 성적표를 보여주면 되나?”
“네. 성적표 보여줘요.”
“그럼 내일 성적표 가지고 여기서 다시 만날까?”
“그래요!”
“넌 어디 살아?”
“저 언덕 넘자마자 바로 있어요.”
서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나도 거기 사는데, 이사 온지 얼마 안됐어. 같이 가자. 바래다줄게.”
둘은 함께 걸으며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오빠는 놀이터에서 뭐하고 있었어요? 친구들도 없이.”
“너 그네 타는 거 보고 있었어.”
“알아요. 제가 누군지도 모른다면서 왜 남 그네 타는 거 훔쳐봐요?”
“무슨 소리야, 훔쳐 본 적 없어.”
“생각해보니 며칠 됐어요. 저 공부 잘한다고 했잖아요. 머리 좋아요. 기억난다고요. 못 알아 봤던 거지 거기에 앉아 있었던 거 한참 된 것 같아요.”
“한참은 아니야. 여기 이사 온지 얼마 안됐다니까. 그나저나 너는 왜 친구도 없이 혼자서 매일 그네를 타?”
“전 친구 없어요. 그리고 필요하지도 않아요. 공부하는데 방해만 돼요.”
“뭐? 공부하는데 방해? 부모님이 꽤나 기대가 큰 가봐?”
“아니요, 제가 원해서 하는 거예요. 저는 커서 의사가 될 거거든요. 아빠가 아픈데 나중에 커서 꼭 제가 치료해줄 거예요. 그러려면 공부를 엄청 잘해야 한대요.”
“그렇구나, 아빤 어디가 불편하셔?”
“어디가 아픈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세요. 제 말을 알아듣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럼 엄마는?”
그의 질문에 서로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작게 펼친 양 손바닥을 조심스레 가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