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사로운 봄날에도, 뜨거운 여름날에도 서로와 소년은 함께 어울렸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찾아 온 쌀쌀한 가을, 해 저물 녘, 어느 날이었다.
“쨘!”
서로가 종이 한 장을 소년에게 들이밀었다.
“이게 뭐야?”
소년이 받아 들며 물었다.
서로는 잘난 척 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전국 수학 경시대회 1등! 너 진짜 똑똑하구나, 우아! 잘했어. 축하해!”
소년의 얼굴은 감탄과 자랑스러움이 어우러진 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는 나가기만 하면 매번 1등 해요.”
"그래! 인정! 네가 이겼다! 오늘은 잘난 척 맘껏 해. 다 들어 줄게.”
소년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녀를 뒤에서 힘껏 끌어안아 들어올렸다. 서로는 꺄르르 웃으며 기뻐했다.
“자, 그럼 시간 더 끌기 전에 이걸로 내기는 제가 이긴 거예요. 인정하는 거죠, 오빠? 다른 말하기 없기에요?”
서로가 동그란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내가졌다. 졌어! 너 물 속에 빠졌을 때 구해 준 사람. 나로 해 그냥.”
소년이 미소를 머금고 경쾌하게 답했다.
“그동안 얼마나 궁금했는지 몰라요! 도대체 어떻게 물속에서 말을 했어요? 또 왜 영어로 말을 했어요? 그리고 저를 구해줬으면서 왜 아니라고 거짓말해요? 아니면 진짜 기억을 못하는 거예요? 오빠 머리 좋아서 그럴 것 같지 않은데. 말해 봐요. 어서.”
“뭐? 영어로 말을 했다고?”
서로에게서 폭풍 질문 세례를 받던 소년의 얼굴에 서서히 놀란 표정이 드러났다.
“네.”
“정확히 영어로 뭐라고 말을 했어? 기억나?”
“그럼요. 정확히 이렇게 말했어요. 제 어깨를 흔들면서 Hey, what happened? Are you ok? Look at me! Look at me! What happened to you? Open your eyes! Wake up! Wake up!! 그리고 제 손을 잡고 누군가에게 소리쳤어요. Need ambulance, call 911, 911! Right now!”
소년은 아무 반응 없이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기억이 나요?”
눈을 크게 뜬 서로가 소년의 얼굴로 가까이 들이대며 물었다.
“그럴 리가.”
“진짜 그랬다니까요.”
“말도 안 돼.”
소년이 바닥으로 고개를 내렸다.
“뭐가 말이 안돼요?”
“아...... 그러니까 내 말은, 어......”
소년은 이번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더니 이내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려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제일 자신 없는 과목이 영언데 내가 영어로 말했을 리가 없잖아.”
소년의 말은 마치 변명처럼 들렸다.
“전 과목 만점이면서 제일 자신 없는 과목도 있어요?”
“......”
소년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서로는 소년의 반응이 의외였지만 이제야 기억이 나서 당황한 거라고만 여겼다.
“오빠! 나, 그네 태워줘요.”
소년은 서로의 말을 못들은 듯 대답 없이 마냥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빠!”
“어?”
“나 그네 타고 싶어요. 밀어줘요.”
“아...... 그게 말이지, 내가 내일까지 끝내야 하는 숙제가 있어서 말이야.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겠어. 내일 또 만나자. 알았지? 미안해.”
소년은 그날따라 서로의 말에 집중을 못했다.
“알았어요. 그럼 내일 봐요.”
“그래, 내일 보자.”
소년은 서둘러 가방을 둘러메더니 다급히 집을 향해 달렸다.
“오빠 나 오늘은 안 바래다줘요?”
달려가는 소년을 향해 서로가 외쳤다. 하지만 소년은 못들은 듯 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언덕너머에 있는 집을 향해 달렸다. 서로는 서운했지만 내일을 기약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오랜만에 혼자 집으로 걸어갔다.
그 후로 소년은 변했다. 너무도 급작스럽게 서로를 멀리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피하기까지 했다. 처음엔 그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더 이상 소년은 학교로 마중 나오지도 않았고 그들이 놀이터에서 만나는 일도 없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지나도록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어느새 가을이 지나갔다. 그는 인사도 없이 떠나 버린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서로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
검은색 페인트가 여기저기 벗겨지고 녹이 슨 작은 철문을 열면 성인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울퉁불퉁하고 칙칙한 시멘트 바닥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일곱 발만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두 계단 아래에 나무가 벗겨진 작은 문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서로의 집이다. 머리에 부딪치지 않게 조심이 숙이고 들어가야 할 만큼 작은 문, 키가 큰 성인은 서 있기가 불편할 정도로 천장이 낮은 방, 방안 구석 미닫이문을 열면 물이 막혀 개수대가 잘 내려가지 않는 싱크대가 변기통 옆에 있었다.
-끼이익~ 철커덩
녹슨 철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연락이 두절됐던 소년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방에는 서로를 돌봐야 하는 할머니가 서로의 보살핌을 받으며 누워있는 모습이 보이고 방바닥엔 서로보다 훨씬 고학년이 배워야 마땅한 수학 교과서가 펼쳐져 있었다.
물끄러미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는 서로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너 생일이라서 왔어. 축하해 주려고......”
나지막한 소년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묻어나왔다. 어렵게 찾아와서 어렵게 말하는 것이란 걸 서로는 알았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오빠가 좋아요.”
어색한 고요를 가르며 갑작스레 내뱉은 서로의 말, 예상치 못한 그 말에 소년은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소년은 자신이 해야 하는 말을 알고 있었다.
“서로야, 오빠 좋아하지 마.”
“싫어요.”
“글쎄 좋아하지 말라니까. 난 너 안 좋아한단 말이야.”
“왜 그런 거짓말을 해요?”
“......”
“그리고, 누가 저 좋아하래요? 제가 오빠를 좋아하건 말건 그건 제 맘이에요. 왜 오빠가 제 맘까지 이래라 저래라 해요?”
“네가 걱정되니까 그렇지.”
“누가 저 걱정하래요?”
“넌 아직 어려.”
“그렇지만 난 똑똑해. 오빠처럼 얼간이 바보 천치는 아니라고!”
서로는 입술을 앙 다문 채 소년을 노려보았다. 소년은 그런 서로의 시선을 느꼈지만 모른 척 다른 곳만 응시하며 혼자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한 순간 소년은 말을 할 듯 말듯 쭈뼛쭈뼛 하다가는 느닷없이 서로에게 물었다.
“너는 왜 지금까지 내 이름을 물어보지 않아?”
“이름 같은 건 다른 사람한테 불려요. 난 그냥 오빠라고 부를래.”
“그래도 기억해. 내 이름.”
“......”
“내 이름은 이석이야. 나 이석.”
“......”
“미안해, 정말 미안해.”
소년은 바닥에 작은 상자 하나를 내려놓고 차가운 공기만 남긴 채 그대로 뒤돌아 나가버렸다. 소년이 남긴 찬 공기만 그러잡고 멍하니 서있던 서로는 허리를 숙여 그 상자를 집어 들었다.
“오늘이 내 생일인건 어떻게 알고......”
상자 안엔 소년이 강물에 빠트렸던 서로의 시계와 똑같은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그가 남긴 생일 선물이었다.
우울했던 어린 소녀에게 햇살이 되어 준 아이.
서로는 생각했다. 그에겐 분명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이유 같은 건 몰라도 괜찮다고. 하지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아마도 그때는 미워하게 될 것 같아서 지금 이대로 이 순수를 간직하고 싶다고.
‘나에게 그는 잊혀 지지 않는 사람일 텐데 그에게 난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되겠지.’
근사한 앞집 저택은 여전했지만 보랏빛 꽃잎을 다 털어내고 겨울을 맞이한 메마른 자카란다 나무처럼 서로의 마음은 황량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놀이터의 빈 옆 그네처럼 서로의 마음 또한 무언가에 의해 흔들거렸다.
그 황량함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흔들림은 무엇으로 바로 잡아야 하는지 몰랐다.
어린 소녀의 마음속으로 외로움인지 그리움인지 미움인지 모를 무언가가 들어오려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네를 탈 때마다 소년이 생각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서로는 자신이 마치 녹슨 못처럼 느껴졌다.
돌멩이가 데굴데굴 굴러오더니 박힌 못을 빼고 달아난 듯이, 쉽게 뽑히지 않던 못이었는데 이제는 지나간 돌멩이의 흔적 속에서 구부러진 채 묻혀 지내는 못.
이상하게도 못은 기억한다. 자신을 송두리째 뽑아버린 돌멩이의 크기와 모양과 무늬와 빛깔과 향기와 따뜻한 온기 그리고 스침의 순간을......
못도 눈물을 흘린다. 그래서 녹이 슬어버린 못.
그것이 서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런 소녀를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소년은 알았다. 서로를 지켜보는 이가 누구인지, 서로를 후원하고 있다는 그 키다리 아저씨가 누구인지, 그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너무도 끔찍한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것을 알게 된 소년은 서로를 가까이 할 수 없었고 그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그 아이는, 그 아이는......
소년은 자책했다. 밀려오는 죄책감에 너무도 괴로웠다. 그저 이 모든 게, 그 아이가 다 자신 때문에 불행해졌고, 또 자신 때문에 앞으로도 불행할 것이라는 사실이.
소년은 결심했다. 그 아이를 지켜주겠다고. 그리고 그 방법은 그 아이를 버리는 것이었다.
버림받는 것. 그 큰 상처를 그 아이에게 주면서도 소년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하는 것보다 네가 존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
2022년
대한민국 상위 0.01%만 들어가는 대한 과학 기술 대학교, 21살 나이에 생명공학과 졸업반에 접어든 학생 해 서로. 캠퍼스를 가로질러 저 멀리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대자보에 붙은 세계 과학 테슬라 대회 참가자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 대회는 과학계의 올림픽이라 불릴 만큼 명성이 높은 세계적인 과학 대회로 국내 심사를 거쳐 국가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여 세계의 천재들과 연구물의 희소성과 완전성을 심사하여 순위를 내는 대회다.
서로는 자신이 대한민국 대표로 참가하게 됐다는 사실을 이미 고지 받아 알고 있지만 공동 참가자가 있다는 소식도 들었기에 누구인지 그 이름을 확인하고 싶었다.
“서로야!”
“아야!”
수다스러운 민주가 서로의 옆으로 바싹 다가와 등판을 세게 때리며 말했다.
“완전 축하해! 너는 어쩜 무슨 대회만 나가면 상을 다 타오더니 이젠 테슬라 대회까지 나가는 거야? 난 이번 대회도 설마 설마 했다. 아니 내놓으라 하는 박사들도 심지어 우리 교수님들도 학생 시절엔 꿈도 못 꿨는데 이건 정말 우리 학교 경사 중에 경사야! 학생 신분으로는 네가 처음이잖아! 넌 정말 대단하다!”
부산스럽게 축하를 전하는 민주가 고맙긴 했지만 서로는 또 다른 한국인 참가자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못내 아쉬운지 볼멘소리를 해댔다.
“저 듣보잡은 뭐죠?”
“야! 듣보잡이라니! 스위스에서 유학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과학계의 혜성 몰라? 공부만 잘 하면 다니? 네 주변 경쟁자들이 누군지도 좀 알아보면서 공부해.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심흥수 교수님의 특별 제자라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