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알렌과 밀러형사는 연구소 내 현장 지휘 본부에서 다른 형사들과 함께 디엘에게 건네줄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현장 주변의 사진들과 연구소의 청사진이며 건물 설계자에 대한 조사까지 준비된 상태였다. 알렌은 그것도 부족해 연구소의 침입여부를 비롯한 침투 방법의 가상 시나리오까지 준비하라며 말단 형사에게 지시했다. 그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수십 명의 현장 요원과 정보부 요원들이 보내 준 자료들을 토대로 눈자위를 아래위로 굴려가며 사건 자료를 헤집어 대고 있었다.
‘미아 스탈의 시신이라......’
알렌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책상 위에 놓인 전자 서류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펴보며 말했다.
“밀러 형사, 신원 확인된 사망자에 대한 정보는 아직 인가?”
“미아 스탈의 경력, 가족 사항, 주변 인물 정보까지는 수집완료 됐고, 지금 보내드렸습니다.”
“음, 왔군.”
“그런데요. 좀 전에 검시관이 여기까지 직접 왔던데, 이런 경우도 있습니까?”
“들었어. 이런 날씨에 헬기로 시신을 이송하다간 폭삭 재가 되고 말거야. 자네도 봤잖아. 이상하게 타 버린 거. 그나마 여기가 생명 공학 연구소니까 가능한 거지. 아, 그나저나 검시관은 만나고 온 거지?”
“그럼요, 시신의 부패 상태와 사망 추정 시간, 사망 원인 그리고 사망자의 사망 전 건강 상태에 대해서 가장 먼저 확인해 달라고 요청해 놨습니다. 뭐라도 확인되는 즉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알렌의 옆에서 사건 자료를 정리하는 밀러는 가장 먼저 디엘에게 달려가 첫 번째 사망자의 신원이 미아 스탈임을 알렸던 형사다. 비록 아직은 신참에 속하지만 뭐든지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할 뿐만 아니라 행동에 나서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또한 주변의 작은 일들도 스스로 눈치껏 해결하려 애를 쓰는 성실한 타입이었다.
“잘 하고 있어.”
알렌이 밀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쾅!
그 때 누군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 차 안에서 심문을 받고 있던 홉킨스 부부였다.
“무슨 일이시죠?”
밀러가 의아한 표정으로 노부부를 쳐다보며 물었고 알렌도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 아가씨가 위험해!”
할머니가 다짜고짜 큰 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네? 위험하다니요? 누가요?”
밀러 형사가 노부부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아까 나더러 집에 가라고 했던 그 아가씨 말이야. 지금 물속에서 살려달라고 난리가 났어! 물에 빠졌다고!”
“아~ 디엘 형사님 말씀하시는구나. 깜짝 놀랐잖아요. 할머니, 그 분은요. 물에 빠진 게 아니고 물에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밀러 형사는 할머니를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야. 물에 빠졌어! 살려 달래!”
계속 어쩔 줄 몰라 하는 할머니와 옆에 선 할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의 표정은 짐짓 심각해 보였다.
“그 아가씨 형사님이 나중에 따로 찾아뵌다고 했으니까요.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할아버지께서 할머니 모시고 댁으로 들어가세요. 지금은 저희가 일이 많아서 더 도와드릴 수가 없어요. 가시는 차편은?”
“아 글쎄!! 위험하다니까 내 말 안 들려? 그 아가씨 죽으면 누가 책임 질겨?? 내가 알려줘도 못들은 체 하다가 그 아가씨 물에 빠져 죽으면 누가 책임질 거냐고!!”
밀러의 말을 끊으며 할머니가 소리쳤다.
“할머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할아버지, 어서 할머니 모시고 나가주세요.”
뒤에서 지켜보던 알렌이 밀러를 향해 그들을 데리고 나가라는 뜻으로 고갯짓을 했다.
“얘끼! 이놈아! 내 마누라가 치매에 걸렸다고 미쳐서 헛소리 하는 줄 아나 본데! 이런 우라질 놈! 냉큼 달려 나가지 않고 뭐해!”
노인이 알렌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그러자 밀러가 얼른 알렌의 몸을 가리며 나서 노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제가 한 번 확인해 볼게요. 할머니, 할아버지, 너무 걱정 마시고 댁으로 돌아가세요.”
밀러 형사는 노부부를 조심스레 밖으로 내몰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래? 확인해 볼 거지? 지금 당장 가봐야 해. 아직도 살려 달래. 시간이 없는 것 같으니 어서 가보자구! 이쪽이야 이쪽!”
할머니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밀러에게 손짓을 했다. 두꺼운 야상을 챙겨 입고 노부부와 함께 연구소 밖으로 나온 밀러는 진지하게 재촉하는 할머니의 뒤를 따라 못이기는 척 걷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신참으로써 일에 방해되는 요소를 처리하는 임무로 여겼을 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수고가 많으십니다.”
꽝꽝 언 호수의 한쪽 구석에 난 큰 물구멍 근처에서 지상에 남아 일을 하고 있는 다이버 팀 두 명에게 안부를 물었다.
“아 예.”
심드렁하고 성의 없는 회오리 팀의 두 부대원들은 그의 인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잠수 중인 다이버들의 생체 반응기를 들여다보며 뭔가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일은 어떻게 잘 진행되고 있는지......어~ 무슨 일이라도......”
지상 요원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밀러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아 글쎄!! 그 아가씨가 살려달라고 지금도 나한테 소리 지르고 있는데 다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이 답답한 사람들아!”
할머니가 울상을 지으며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치는 모습에 그들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예?”
“네?”
지상에 있는 회오리 팀의 두 부대원들이 동시에 외쳤다.
“뭔가 느낌이 안 좋습니다. 부대장님과 디엘 형사님의 심장박동수가 불규칙하고 빨라졌습니다. 왜 안 나오고 있는지 아무래도 가서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그러게, 뭔가 이상한데.”
두 부대원이 말했다.
“이쪽이야 이쪽!”
확인해 봐야겠다는 부대원들의 대화를 들은 할머니는 본인이 다 알고 있다는 듯 나서서 호수의 위쪽 방향을 가리키며 먼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혹시 모르니 이것도 챙겨가겠습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잠수복을 입고 대기하던 부대원은 모터가 달린 언더워터 스쿠터를 들고 호수의 또 다른 끝자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도착한 곳엔 이제 막 공수된 첨단 장비로 얼음을 깨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거기 말고 여기 이쪽으로.”
할머니가 계속 손짓을 하며 그들을 이끌었다.
“어서 어서”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거들며 그들을 재촉하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노부부가 이끄는 방향으로 반신반의하며 따라가게 되었다.
“저쪽으로 옮깁시다.”
커다란 드릴 장비로 얼음을 깨던 장정들도 다 같이 움직였다.
“근데 저 할머니는 누구죠?”
“아, 저 분 치매 노인이신데...... 뭐,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함께 걷는 부대원의 질문에 밀러가 대답하자 둘은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걸음을 재촉했다.
그 때도 디엘과 제이미는 미지의 기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물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소용돌이는 아닌 것이 분명한데 무엇보다도 이상한 건 그 힘은 디엘만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초자연적인 힘이었다.
디엘은 제이미에게 의지하며 온 사력을 다해 함께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두 발은 점점 느려졌고 몸도 지쳐갔다. 어느새 그들은 동굴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까......
이대로 있다간 둘 다 저 동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안에선 아무도 모를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예컨대 죽음이라거나, 혹은 죽음과 비슷한 것. 디엘은 살고 싶었다. 다만 그것이 공포와 같은 감정의 일종인지 살고자 하는 본능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반면에 제이미는 두려움을 모른다는 듯이 담대해 보였다. 지금껏 아무리 물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 한들 위험을 넘어선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인데 미련하리만치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벗어날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도 침착함을 잃지 그의 모습이 디엘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디엘은 어려서 이유 없이 물을 무서워했다. 물에 빠진 적도 없었는데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그녀였다.
스스로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수영부터 시작해서 다이빙까지 배웠지만 지금과 같은 위급한 실제 상황에 쳐해 본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살고자하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쁜 숨을 쉬게 됐고 디엘은 제이미보다 빠른 속도로 산소를 소모하게 됐다.
제이미는 베테랑답게 물속에서 호흡법이 남들과는 달랐다. 그렇기에 디엘이 예비산소까지 다 써버리는 동안 자신의 예비 산소를 아낄 수 있었다. 곧 제이미의 예비 산소통에 연결된 보조 호흡기를 디엘에게 건네줘야 할 상황이었다.
디엘은 발차기를 멈추지 않는 제이미의 팔을 잡고 흔들어댔다. 제이미와 눈이 마주치자 자신을 붙든 그의 팔을 툭툭 치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이제 놓아달라는 뜻으로, 하지만 제이미는 완강히 그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제이미는 한 손으로 검지와 중지를 들어 그의 눈을 가리키며 디엘과 시선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디엘이 집중하자 자신이 매고 있는 산소통을 풀고 수면 위로 올라갈 테니 자신의 예비 산소로 버티고 있으라는 뜻을 전했다.
그 때, 디엘은 알았다. 제이미는 절대 자기를 포기하지 않을 거란 것을.
-툭 툭
제이미는 디엘을 바라보며 자신의 팔을 감고 있는 그녀의 팔을 쳤다. 다른 한 손으로 보조 호흡기를 가리키며 건네주겠다는 의사를 전하자 디엘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이미가 마음 놓고 그녀를 붙든 한 쪽 팔에 잠시 힘을 풀었을 때 디엘이 갑자기 그에게 감은 팔을 스르르 풀었다.
“!!!”
“??”
그들의 놀란 눈이 마주쳤다.
디엘은 자신이 마치 제이미를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물귀신처럼 느껴졌다. 숨을 참고 수면 위로 올라간다면 그는 감압병에 걸릴 게 분명했다. 재압 챔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시도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그를 계속 붙들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그를 위해 손을 놓았다.
그 순간 엄습해 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실로 상상하지 못했던 고통과 함께 찾아왔다. 예비 산소까지 바닥나 숨을 쉴 수 없는 디엘은 갑작스레 숨통을 옥죄어 오는 고통을 견뎌내려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디엘은 제이미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동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온 몸이 부르르 떨렸고 양 팔과 다리는 스스로 절제하지 못할 만큼 큰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이렇듯 큰 고통을 수반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저 깊은 동굴 속에서 나오는 미지의 힘은 아랑곳하지 않고 디엘을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절규가 산소마스크를 쓴 그녀의 입에서 세어 나왔지만 더 이상 숨을 들이킬 수 없어 마음속으로만 외쳤다.
‘살려줘, 제발 살려줘요.’
그 후, 물속에서 찾아 온 패닉. 정신이 혼미해졌다.
물 속 한가운데 서 있던 제이미는 그녀를 놓칠세라 온 힘을 다해 손과 발을 세차게 저으며 헤엄쳤지만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바로 위 얼음 호수에서 깨진 얼음 조각이 물속으로 가라 앉아 정확히 그들의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하늘에서부터 뻗어 나온 여러 가닥의 가는 빛줄기가 디엘과 제이미의 몸을 비추었다.
-슈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