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약속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헤이즐은 다음 일정을 앞으로 당겨 빨리 끝내버리려는 심산이었다. 오늘 같은 날 휴에 대한 생각을 반나절 정도는 멈추고 싶었기에.
검사실에서 그를 보기에 앞서 헤이즐은 조금 전 휴와의 언쟁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항상 말문을 막아버리는 그의 도발에 당황하거나 그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리는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머리로는 잘 안다. 휴는 기억상실증 환자, 자신은 그의 담당의로써 그의 기억을 찾으려 한다. 한 때 혼자서 그를 마음에 품어 고백까지 했던 것은 옛날 일이고, (다행히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은 죽은 친구의 남편이라는 빌미로 자신의 옆에 붙어 있는 인물일 뿐이다.
헤이즐은 의사로써든 오랜 친구로써든 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속물 취급하는 휴의 발언에 화가 났다. 왜 그를 평범한 환자처럼 대하지 못하는지 스스로가 답답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속내에 있는 진심을 들여다 볼 여유조차 없었던 것뿐이다. 또한 그만큼 휴는 헤이즐을 힘들게 했다.
곧 남은 일정은 휴와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두뇌 정밀 검사다. 물론 이것도 성능 좋은 컴퓨터가 스캔부터 진단까지 모든 일을 해주지만 혹시나 놓칠 수 있는 사소한 부분까지 집중해서 들여다봐야하기 때문에 커피 따위의 여유는 없다. 또 다시 그에게 집중해야할 시간이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닥터 헤이즐 입니다.”
“박사님! 지금 막 휴 스탈 환자의 신체 기능 감식을 마쳤습니다. 두뇌 정밀 검사도 다음 일정에 있긴 한데 타일러 환자의 진단 시간이 꽤 길어지고 있어서 시간이 좀 늦어질 것 같습니다. 중간에 멈추기가 애매한 게 지금 상당한 성과를~”
“그거 잘 됐네요. 휴 스탈 환자 일정은 내일로 미루죠. 같은 시간으로.”
“예? 휴 스탈 환자는 지금 준비를 다 마치고 대기실에 있습니다만......”
“전달하세요. 내일로 미뤄졌다고.”
“네 알겠습니다.”
헤이즐은 자리에 앉아 차트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날따라 시간이 어찌나 더딘지 시계가 고장 난 것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아침부터 정신적으로 지친 헤이즐은 소파로 옮겨가 머리를 뉘였다. 커피 테이블 위에 놓인 조간신문이 눈에 들어와 그것을 펼쳐 들었다.
그녀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27호 병실로 향했다. 일정까지 미뤄가며 안 보려 했던 휴 스탈 환자가 머무는 곳으로.
***
- 며칠 전 -
“푸른 눈과 붉은 모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제가 만들었다죠.”
기자의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휴가 대답했다.
“자 일단 이 기사를 한 번 읽어보시죠.”
기자는 오래 전 신문의 헤드라인을 보이며 그에게 내밀었다.
-신의 손길인가, 골드코스트에 내린 푸른 눈
-푸른 눈, 기이한 기상현상에 기상청 곤혹, 과학계 떠들썩
-골드 코스트가 레드 코스트로
-금빛 모래를 핏빛으로 물들인 여인, 그녀의 정체
“그 당시 전 세계가 주목한 바로 이 사건들. 한 달여간 신문의 헤드라인을 달군 당신의 업적을 한 번 보시죠. 당신은 호주 퀸즐랜드 지역에 있는 골드코스트 외곽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인이 되기까지 줄곧 그곳에서 자랐으며 연구 활동과 신혼살림을 위해 미아라는 여인과 함께 시드니로 왔습니다.”
“저보다도 저에 대해 더 잘 알고 계시군요. 그런데 뭘 알고 싶으신 거죠?”
기자는 휴의 거만한 태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임무를 다한다.
“기억을 잃은 후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나요?”
“신이 나에게 발길을 이 길로 인도하더군요. 빨간 구두 아가씨처럼 내 발이 저절로 춤을 추며 이곳으로 와지던데요. 뭐 어려운 것도 아니죠. 다만 그 구두를 파는 곳을 찾기가 쉽지가 않죠. 내가 기자 양반한테만 살짝 알려 드릴까?”
***
-쾅!
휴의 병실로 헤이즐이 쳐들어왔다.
“신들린 과학자, 휴 스탈, 그의 내면의 정체성에 대하여!!”
헤이즐이 주먹에 말아 쥔 신문을 휴에게 내동댕이치며 외쳤다.
“쥐새끼 같은 기자 놈이 또 기어 들어와서는! 도대체 이번에는 어느 환자의 누구라고 속이고 들어온 거야??”
”낸들 아나.”
우울한 목소리였다.
“기잔지 알았어, 몰랐어?”
“의심은 했지만 몰랐어.”
헤이즐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았다.
“하!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만나서 아니다 싶으면 이런 기사나 나오게 만드는 거야? 난 당신 매니저가 아니라 의사라고, 주치의. 대체 왜 내가 당신 뒤치다꺼리나 해야 해? 지난 번 정부 측에서 보낸 사람과는 얘기도 잘 하더니 이번엔 기자인 걸 뻔히 눈치 챘으면서 같이 노닥거렸단 말이지? 심심했어? 도대체 나한테 왜 매번 이런 식인 거야? 상태가 호전되어서 곧 기억 재생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될 거라고 했는데 이런 정신 나간 발언을 했으니 차라리 이게 진짜였으면 싶은 내 심정을 알아? 무슨 생각인 거야 대체! 이렇게 한 번씩 힘들게 할 때마다 난, 난 정말 모르겠어.”
헤이즐이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그러면 내가 너무 나쁜 사람처럼 느껴지잖아.”
“당신 충분히 나빠. 지금까지 쭉 그래왔어. 그걸 몰라? 당신이 연구하고 개발한 시스템이 다 여기 있는데 계속 미친 척 연기하면서 기억을 찾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대체 뭐야?”
그녀는 이마의 열기가 손끝까지 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휴가 헤이즐의 일그러진 표정을 봤다면 분명 동정심이 들었을 것이다.
아침에 이어 두 번째인 그와의 언쟁, 이상하게 휴의 태도가 아까와는 달리 소극적이었다. 다리를 오므린 채 머리를 깊이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자 환자에게 크게 소리친 자신이 의사라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내가 못할 짓을 했군.’
당연한 사실인데 왜 문득문득 그런 것을 망각하게 되는지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휴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휴가 말했다.
“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누굴 기다리는데?”
“사실 나도 누가 올지 몰라. 언제 올지 몰라. 그래서 미쳐갈 지경이야. 아니 나 정말 벌써 미쳐버린 걸지도 몰라. 이렇게 이곳에서 한 사람만 기다린 지 벌써 2년이 지났어.”
“휴, 왜 나에게 얘길 하지 않은 거야? 그냥 나에게 다 얘기해줘. 난 당신 편이라고, 아직도 날 못 믿어?”
여전히 열을 올린 목소리로 헤이즐이 반문했다.
“믿어.”
이 짧은 그의 한마디가 헤이즐의 마음을 일순간 녹였다.
“그런데 왜?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면 안 될까?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누군지도 모른다면 왜 기다리는지, 왜 기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지. 그럼 나도 온전히 당신 편에 서서 도와줄 테니 내가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줘.”
헤이즐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는 채 그의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오늘은 너랑 하도 싸워 대서 나도 벌써 피곤하다. 그러니 이따 2차 진단 마치고 그 다음 면담할 때마저 이야기 하자. 그 동안 나도 생각 좀 해볼게. 아! 그거 내일로 미뤄졌지?”
“아니, 미뤄지긴 뭐가 미뤄져? 타일러 환자 당장 뺄 거니까 예정대로 검사실로 와.”
헤이즐의 다문 입술에 혈색이 돌았다.
***
헤이즐이 뇌기능 진단실로 들어섰다. 밖을 볼 수 없는 특수 유리창 안에 있는 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불빛이 깜박이는 커다란 기계 속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머리에는 정교하게 생긴 헬멧을 쓰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휴는 마치 헤이즐이 어느 곳에 앉아서 자기를 바라보는지 잘 아는 사람처럼 정확히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눈길을 보냈다.
헤이즐은 낮 동안의 언쟁에 지친 기색도 없이 본론을 내뱉었다.
“이틀 뒤에 정부에서 사람을 보낼 겁니다. 지난번처럼 대질 심문에 들어 갈 거예요. 제가 제출한 정신 감정 리포트를 대조해가며 전문의와 확인 작업을 할 텐데 이곳에 더 머물고 싶다면 호전된 상태로 그들을 대하세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본인이 잘 알겠죠?”
“평소처럼 하면 되지 뭐, 연습이라도 해야 하나? 아! 그렇지! 내친김에 지금 해보는 게 어떨까?”
컴퓨터가 휴의 상태를 즉시 분석했다.
[지금은 의식 중 진행 단계입니다. 환자의 정신이 흥분 상태로 진입할 가능성이 있으니 침착함이 요구됩니다.]
컴퓨터의 음성이 들리자 헤이즐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흥분하지 마시죠.”
“내가 무슨 말만하면 흥분하고 달려드는 짐승처럼 보이나? 그럼, 박사도 침착하게 그쪽 상황을 한번 얘기해보지.”
휴도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와서 망칠까 봐 하는 소리니 잘 들어주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정부 측에선 당신의 정신 질환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병원으로 옮기겠다는 얘기가 최근에 나왔어요. 어느 곳으로 가게 되던 미친 ‘척’은 안 통한다는 거 잘 알고 있겠죠? 또한 제가 지금까지 그 사실을 눈감아 줬단 사실을 정부 측에서 알게 된다면 지원금은 있는 대로 받아 써놓고 뭐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 무능한 의사가 되는 길만 열리는 건데, 뭐 그건 안중에도 없겠지만.”
“처음엔 자신 있어서 날 받아준 거 아니었나?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미안해하면서 마음을 바꿀 것 같은가 본데 난 지금 기억을 찾고 싶지 않다고.”
“당신 고집이야, 제가 잘 알죠. 도대체 이유를 몰라서 그렇지. 이제 지치는 것도 지쳐서 저도 이제 손 놓고 싶네요. 이 지경까지 온 거 당신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