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더러 저녁을 차리라고요?”
“어, 주방에 가서 아무거나 꺼내서 해봐. 그동안 난 씻어야겠다.”
그는 ‘어’라는 말에 힘주어 말하곤 서로가 좋다, 싫다 답을 하기도 전에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아니, 뭐 이런......!”
서로는 이 상황이 낯설었다.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을 지금껏 겪어본 적이 없었다. 어리둥절 5초간 멍하니 서 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군더더기 없는 거실 한 가운데 자신이 서 있었다.
서로는 30초간 서서 망설이다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정갈하게 담긴 다양한 음식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요리를 할 재료는 찾을 수 없었다. 다행인걸까? 그저 맘에 드는 음식을 찾아 꺼내 놓기만 하면 진수성찬을 차릴 수 있었다.
‘나더러 뭐하라는 거야?!’
서로는 음식들을 꺼내 하나씩 살펴보았다. 대부분 서로가 즐겨먹는 야채와 해산물로만 만들어진 음식들이었다.
‘채식하시나?’
[조리가 완료되었습니다.]
자동 조리 완료 알람이 울리자 서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오븐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누가 언제 요리를 했는지 오븐 안에서 불빛을 받으며 대기 중인 하얀 세라믹 볼이 눈에 들어왔다. 뚜껑을 열어보니 먹음직스런 해산물 그라탕이 담긴 볼에서 김이 폴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서로는 그것을 식탁 가운데에 놓았다.
일단 있는 음식들로만 저녁 준비는 완료했는데 어쩐지 저녁을 차렸다고 하기에는 너무 한 일이 없어 마음이 불편했다.
서로는 마치 남의 눈치라도 살피듯 조용히 혼자 낯선 소파에 앉아 차로 한 모금 두 모금 건조한 목을 축이고 있었다.
이토록 세련되고 부티 나는 집엔 생전 처음 방문한 까닭인지, 씻고 있는 남자를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지루함 때문인지 더운 날씨도 아닌데 평소보다 이유 없이 목이 탔다.
그때 샤워를 마친 이석이 상반신은 탈의 한 채 큰 바쓰타월로 하반신만 두르고 샤워실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안에서 옷 다 갈아입고 나와야 해서 불편하네, 어쩌네 하더니 저렇게 편하게 나올 거면서’)
“내가 너를 신경이나 쓸 거 같아?”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한 이석의 첫마디다. 도대체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 말일까?
“네?”
서로의 놀란 눈이 동그래졌다.
서로는 어색해 주겠는데 이석은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여유롭게 거실을 활보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이상하게 억울했다.
(‘뭐래, 저렇게 신경 안 쓸 거면서 수건은 왜 둘러?’)
서로의 앞을 가로질러 가던 이석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방향을 틀어 서로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왜...... 무슨, 뭐......”
영문을 몰라 얼버무리는 서로 앞에 어느새 다가와 우뚝 선 이석은 말없이 서서 서로를 내려다보았고 고개를 들어 불편하게 눈을 마주치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서로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 또라이 정말 왜 저래. 교수는커녕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놈 아니야?’)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음, 그래 그랬지.”
이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라이 아니고 미친놈도 아니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 자 우리 테슬라 대회에서 1등 해야지. 그럼 이제 연구 시작해 볼까? 눈 떠!”
조심스레 눈을 떴을 때 어느 샌가 하얀색 가운까지 다 걸치고 나타난 이석이 그녀를 향해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뭔가 어색할 틈도 없이 그의 뒤로 보이는 벽이 양쪽으로 갈라져 열리고 있었다. 마치 알리바바의 동굴 문처럼. 그리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실험실이 서로의 눈을 덮쳤고 그로 인해 그녀의 눈동자도 출렁이고 손에 들린 찻잔의 찻물도 무릎위로 떨어질 듯 크게 출렁였다.
꿈에 그리던 연구실이었다.
서로는 이석의 실험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저곳 신기하지 않은 물건이 없었다. 지금껏 연구라면 신물이 나도록 하고 개인 연구실이 주어지는 최고의 대학교에서 장학생으로 호사를 누려왔건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연구실은 과학도라면 누구나 꿈꿀법한 최첨단 장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들을 이용할 수 있다면 우주여행이라도 가능할 것만 같았다. 그녀가 장비들을 어루만지고 들여다보는 손길과 눈길은 흡사 부러움이 분명할 터,
“우주여행이라도 갈 기세네요.”
속으로는 뭔가 벅찬 감정이 들었을지 모르나 그런 감정 또한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서로의 대답은 이렇듯 퉁명스러웠다.
“제대로 말했다. 그래 맞아 나는 우주여행을 할 거다.”
서로의 속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석의 대답은 경쾌했다.
그가 손에 든 리모컨의 버튼 하나를 누르자 연구실 한 쪽 벽면에 화면이 드러나고 사진 한 장이 띄워졌다.
“이게 뭘까?”
이석이 물었다.
그것은 붉고 푸른 입자들이 띠를 이루어 형성된 흡사 누가 봐도 우주 공간을 떠올릴 수 있는 사진이었다. 하지만 서로는 그것이 뭔지 쉽사리 알아볼 수 있었다.
“인간의 신경 세포 뉴런의 집합이네요.”
“틀렸지만 정답이다.”
“?!?!”
“저것은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기 때문에 네가 무어라 답해도 사실은 정답이라 할 순 없지.”
(‘장난 하나!’)
“저 그림은 천문학도에겐 우주 공간이 답이 될 테고 우리같이 생명공학도에겐 뉴런이 답이라고 난 생각한다. 우주 공간과 신경 세포 저 둘은 저렇게 많이 닮았다. 그래서 나는 우주를 정복하겠다고 말하는 거다. 우리 인간 몸의 우주. 이것들은 그 속을 탐험하기 위한 장비들이지. 그 여행에 너를 데려가겠다고 말하면 고맙다는 말은 들을 수 있을까?”
서로의 눈이 반짝거리는 걸 이석은 놓치지 않았다.
“그 대신 조건이 있어. 여행하는 내내 나한테 고분고분하고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야 해. 나는 교수고 넌 학생이야. 그러니 네 신분을 망각하지 말라고. 내 영역은 철저한 피라미드 구조니까.”
서로는 이토록 재수 없는 인간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그래 본적이, 아니 그래야 할 만한 상대를 만나 본적이 없었기에 자존심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처음 느끼는 이 감정 때문에 어딘가가 불편했다.
지금껏 서로는 주변에서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을 본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교수들조차도 내심 그들보다 자기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해온 서로였다.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저 장비들. 뭐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저 연구실. 언젠가는 아빠를 살리기 위한 자신의 연구 목표. 그걸 생각하면 그의 노예라도 되어줄 수 있는 마음이, 생각이 그녀의 입으로 전달되었다.
“네, 알겠습니다.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석은 얄미울 정도로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그럼 저녁은 준비됐겠지? 먹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할 저녁상이 차려져 있다는 사실도, 배고픔도.
***
(‘불편하다......’)
“음악을 틀까?”
“맘대로 하세요.”
식탁 맞은편에 앉은 이석이 핸드폰을 들어 간단히 조작하자 거실 내에 은은한 인디언 플롯의 곡조가 펴졌다.
(‘어색하다......’)
“선곡이 별론가?”
“아니요. 뭐든 상관없으니 전 신경 쓰지 마세요.” (‘......’)
“그럴 리가, 너 이 음악 좋아하지 않아?”
“네?”
“그냥...... 좋아할 것 같은데.”
“이게 뭔지도 모르는데요. 전.”
이석이 서로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로는 황급히 고개를 내리고 앞에 놓인 새우롤을 포크로 콱 찍어 입으로 우걱우걱 집어넣었다. 이석은 그런 서로를 이따금씩 무표정하게 바라보았고 둘은 대화 없이 어색한 저녁 식사를 겨우 마쳤다.
***
이석의 연구실은 깨끗하고 넓었다.
안으로 발을 디디면 바닥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하고 마치 롤러스케이트를 타듯 발끝만 방향을 바꾸어도 원하는 곳으로 빠르고 가볍게 이동할 수 있어 여러 가지 장비를 소수의 사람들이 한 번에 움직이기에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연구실이었다.
서로가 그 곳에 갖추어진 모든 것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 꼬박 하루를 보냈고 또한 모든 기계들을 자유자재로 익히기 까지는 꼬박 일주일을 보냈다. 개인 연구실이 주어지는 대한민국 최고의 과학 대학교에서 밥 먹고 하는 일이 공부와 연구뿐이었던 지난날들이 무색하게 그것들을 익히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생명 공학 연구 위주로 학습해온 서로에게 기계공학도도 어려워할 만한 복잡한 장비를 여러 개 다루는 연습을 해볼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석은 생각보다 빠른 진전이라고 했다.
첫 방문에 알몸스캔을 당하는 굴욕을 겪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그래도 이석은 꽤 진지하게 교수다운 면모를 보이며 그의 연구의지를 보여줘 왔다. 그것으로 그에 대한 서로의 경계심도 풀어지는 듯 했지만 수업 시간에 반듯했던 교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중인격이 있는 듯이 가끔 이상한 말과 행동을 보이는 이석 때문에 내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기억의 이식, 한 사람의 뇌 지도를 그대로 다른 사람의 뇌에 맵핑하는 이론.
이게 네가 이번 테슬라 대회에 가지고 나갈 연구물이지? 이게 성공하려면 학교에 있는 장비로는 턱도 없다는 것도 알 테고. 이론이 그럴 듯 해서 일단 선정되긴 했지만 주어진 시간 안에 성공시키기엔 아직 기술력이 부족해. 정부에서 금전적 지원을 받고 기계공학 쪽 박사랑 협력을 한다 해도 내 생각엔 시간도 부족하고 말이야. 그런데~”
“네 알고 있어요.” (‘다 아는 사실을 왜 얘기해.’)
서로가 이석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난 네가 모르는 줄 알았지.”
무성의인지 비아냥인지 뭐가 됐든 기분만 상하게 만드는 이석의 대답을 그냥 듣고만 있자니 자존심이 무척 상해 자기도 모르게 눈을 치켜떴다.
“왜 그렇게 쳐다 봐?”
(‘내가 뭘......?’)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