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휴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감은 눈을 자극할 만큼 강한 빛 때문이었다. 그 빛은 판도라의 상자라 칭하는 바로 그 투명한 빛깔의 상자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호기심과 기대감, 두려움을 가득 담고 다가가 뚜껑을 열자 빛은 사그라들었고 그 안엔 낡은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글귀.
-당신의 기억은 디엘이 가지고 있다.-
‘디엘이 누군데?’
휴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 일정에 없던 방문객이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Dakota Love Lee.
기억을 잃은 후 디엘과 첫 대면을 하는 휴는 그녀가 편지에서 말한 기억을 찾아 줄 사람일거라 확신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되돌려줄, 아니 그것은 조금 부정적인 언어 선택이다. 빼앗은 게 아니니까 찾아줄, 그래 그게 더 맞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줄 사람,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알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은 그였다.
오래도록 길을 잃고 방황하던 개가 반가운 주인을 만난 것처럼 휴의 상태는 많이 망가져 있었다. 적어도 그가 오기 전에 헤이즐의 눈에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인간의 눈빛이었는데 디엘이 휴를 왜 찾아왔는지 이유도 모른 채 맞닥트린 그는 갈구하는 동물처럼 굶주린 눈빛이었다. 그런 휴와 눈을 마주하자 디엘도 마음이 불편했다.
“맞습니까?”
간절한 그의 눈빛에 응하는 대답만이 디엘이 해야 할 말이지만.
“이 쪽지는 뭡니까?”
“......”
휴는 맹수 같은 눈빛으로 디엘을 노려볼 뿐이었다.
“당신 나르키-.”
“아니......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들 중에 당신의 기억은 저에게 없는데요.”
디엘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헤이즐의 눈이 저절로 디엘을 향했다.
‘이 사람들? 대체 누굴 말하는 거야?’
영문 모를 어색한 분위기 속, 그들 가운데 선 헤이즐 박사 또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쪽지의 출처가 너무도 궁금했지만 애써 침착하려 애쓰며 휴에게 말했다.
“이 분은 미국에서 오신 수사관이셔, 예전에 미아가 결혼 전에 일하던 미국에 있던 공학 연구소 알지? 믿기 어렵겠지만 거기 지하 실험실에서 미아의 시체가 나왔대.”
“뭐?”
미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휴가 헤이즐의 말에 반문했다.
“미아의 시체라니?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하하 미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들......!”
“시신을 확인해 볼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디엘이 그의 말을 낚아챘다.
“당치도 않은 소리.”
디엘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휴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조용히 그 서류를 받아 든 휴는 한 장 두 장 넘기더니 한 페이지에 눈을 고정한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같은 반지를 끼고 계시네요.”
그 페이지엔 의도적으로 첨부한, 반지를 낀 시신 일부의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이 휴의 심정을 복잡하게 했는지 종이를 주먹에 말아 쥔 채 바람 부는 창가로 다가가 팔랑이는 노오란 커튼을 치고 큰 숨을 들이 쉬었다.
-후~~
기억에도 없는 미아가 생각난 것일까? 불어오는 푸르름을 마시며 깊은 곳까지 밀어 넣는 그의 모습은 추억이라도 회상하는 듯이 아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안다 그가 추억할 수 없다는 것을, 어느 시간이 이별의 순간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그의 기억은 아마도 미아와 함께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휴는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다 이내 행동을 멈추고 돌아서 디엘에게 말했다.
“나도 가겠소. 가서 그녀의 시신이라도 보고 싶소.”
보고 싶다는 그 말이 그리움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에겐 자격이 있었다.
디엘은 말없이 헤이즐 박사를 쳐다보았다. 디엘과 눈이 마주친 박사는 자동적으로 휴에게 고개를 돌렸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 말했다.
“그럼 나도 가야지.”
헤이즐 박사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휴는 헤이즐 박사의 왼쪽 포켓에 꽃인 펜을 집어 들었다.
“내가 언제 가도 된다고”
-슥슥
헤이즐의 말은 휴가 서류에 싸인을 하는 펜 소리에 묻혔고 그들은 곧장 미아의 묘지로 가기 위한 채비를 시작했다.
***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는 한 낮이었다.
-드륵 드륵
-위이잉 위이잉
“아 좀 살살 움직이라고 살살”
“이쪽으로 이쪽으로.”
“거 좀 조심조심”
포크리프트가 미아의 관을 들어 올리는 소리가 들릴 때,
줄에 매달린 미아의 관이 공중에서 빙글 돌 때,
관이 바닥에 닿을 때,
이 모든 상황이 휴의 성을 돋구었는지 매번 찡그린 얼굴로 포크리프트의 운전자를 노려보는가 하면 난색을 한 얼굴로 고함을 쳤다. 어느덧 현장 지휘관의 역할은 휴가 도맡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관 뚜껑에 잔뜩 묻은 흙을 손바닥으로 거침없이 밀어내더니 이번엔 양팔을 벌려 관을 끌어안는다. 그의 양 볼엔 미쳐 털어내지 못한 흙먼지가 들러붙었지만 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 어서 뚜껑을 열어주세요.”
디엘이 주변에 선 장정 4명에게 단단하게 못질 된 관 뚜껑을 열기 위해 업무를 지시했지만
“내가 직접 하겠소.”
이렇듯 매번 나서는 휴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의 심정을 헤아리긴 해야 하지만 일정이 빠듯한 디엘이 조급함이 더해가는 걸 휴는 이해해 줄 리 만무했다.
-드드득
휴의 땀방울이 방울 져 떨어지고 기다림에 지친 이들이 시간을 달래던 사이 어느덧 휴는 네 모서리의 못을 다 제거했고 천천히 밀어 관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드득 드득
약간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지만 안에 든 시체를 확인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어우~ 먼지” 손 부채질을 하는 헤이즐 박사의 목소리였다.
“더 이상의 지체는 안 됩니다. 다들 모여서 힘 좀 같이 써주세요.”
휴는 기를 쓰고 뚜껑을 열려 했지만 생각보다 무거워 보여 디엘은 주변에 서있는 장정들에게 말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햇살이 비춰 눈도 부셨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상했다.
부자연스럽게 모든 동작이 일시 정지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한 남자는 생수를 들이키는 중에 멈춰 입 주변으로 물이 흘러 신발을 다 적시고 있었고 또 다른 남자는 바닥에 앉았다 일어나는 중간에 멈췄는지 불편한 기마 자세를 한 채로, 포크 리프트 기사는 관 뚜껑 여는 것을 도와주러 나오는 중이었는지 한 발은 땅에 다른 한 발은 포크리프트에 걸친 채로 서 있었다. 심지어 헤이즐 박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찡그려 감은 채 재채기를 하기 일보직전의 모습으로 멈추어 있었다. 그나마 다른 두 명의 남자가 가만히 서 있는 자세로 제일 편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들이 그 자세를 힘겨워하는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그저 멈춰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