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별 너의 우주>
꿈속의 서로는 하얀 방 문 앞에 서 있었다.
자신이 어린 소녀로 돌아갔는지 그저 키가 작아졌는지, 손잡이를 잡으려면 팔을 위로 뻗어야만 닿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문을 여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마치 내 방문을 여는 것처럼 가볍게 문을 열었다.
-도르륵
방에는 누군가가 손으로 만들어 준 듯한 귀가 쫑긋한 토끼 인형과 고급스러운 상점에서 산 갈색 테디베어가 사람처럼 나란히 누워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북유럽 스타일의 아기자기한 동물 모양이 그려진 시원한 차렵이불은 여름의 더위를 잊을 만큼 가벼운 느낌이었고 그 이불을 들추면 북극곰과 윙크하는 토끼, 눈이 큰 부엉이, 아기 코끼리 등이 여러 가지 포즈로 다양하게 디자인 된 침대 시트가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침대 위에 단정하게 깔려있었다. 고개를 들면 속이 훤히 비치는 핑크 빛의 얇은 천이 천장에서부터 늘어져 침대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방 안을 둘러보면 ‘My little Princess’라는 글이 새겨진 어린 여자 아이 사진이 큰 벽면 한 가운데 걸려 있었다. 가만히 다가가 사진을 들여다보니 뽀송하고 귀여운 여자 아기가 머리에 왕관을 쓰고 아직 자라나지 않은 작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는 서로의 어릴 적 모습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다 바로크 양식의 무늬가 새겨진 하얀색 장롱이 보이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앞에 놓인 장난감이 들쑥날쑥 마구 잡이로 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에 시선이 쏠렸다.
서로는 그 안에서 바비인형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언제라도 꺼내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수많은 인형들이 그것의 기쁨을 모를 만큼 바구니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번엔 폭신폭신한 느낌의 하얀색 곰돌이 인형 하나를 꺼내 팔에 안아 보았다. 그 느낌이 생생했다.
여기저기 꽃 모양으로 장식된 화려하고 아기자기하고 여성스러운 방.
서로는 그 꿈의 세계에서 이 방안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것은 내가 꿈꾸던 어린 시절인가?’
-도르륵
서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 때 방 문 사이로 하얀 빛과 함께 어릴 적 기억 속의 소년이 가쁜 숨을 내쉬며 모습을 내밀었다. 그리고 서로와 눈이 마주친 소년이 크게 미소를 지으며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디엘!”
그때였다.
순식간에 천장이 물결치듯 일렁이더니 공간이 작게 흔들렸다. 그 순간 물살이 이르고 파도가 쳐오듯 목구멍 속으로 왈칵하고 물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숨이 막혀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주변은 온통 물로 가득 찬 세상에 자신이 빠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홍수가 나고 물이 집으로 짓쳐들어와 방을 통째로 잠식시킨 무시무시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속으로 끊임없이 물이 들어와 서로의 숨통을 옥죄었다. 서로는 저도 모르게 양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신 앞에 서 있던 소년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주저앉은 모습을 보고는 다급히 달려와 양 어깨를 잡고 흔들며 말했다.
‘Hey, what happened? Are you okay? Look at me! Look at me!’ (이봐! 무슨 일이야? 괜찮아? 나를 봐! 나를 봐!)
‘What happened to you? Open your eyes! Wake up! Wake up!!’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눈을 떠! 일어나! 일어나라고!)
그러더니 서로의 손을 잡고 문 밖을 향해 다른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Need ambulance, call 911, 911! Right now!’ (구급차가 필요해. 911에 전화해, 911! 지금 당장!)
소년의 모습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기억의 잔재 속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이 소년은 이 소년은...... 놀이터에서 그네를 밀어주던 그 때의 그 소년이었다.
소년이 떠나갈 때 이름을 알려줬다. 그런데 떠오르지 않았다, 송두리째 뽑힌 기억의 줄기를 잡은 채 서로는 머릿속에서 갈팡질팡했다.
그 소년의 얼굴이 빠른 시간의 속도를 따라 변화하기 시작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그리고 성인 남성으로 그 모습이 한 남자와 겹쳐졌다. 바로 얼마 전 처음 본 사람. 나 교수, 나 이석, 이 사람 이 소년을 너무도 닮았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것인가? 대체 이 기억들은 다 뭐지?’
***
서로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좋은 성적으로 포장할 수 있었던 가난, 자존감으로 이겨낼 수 있었던 멸시, 가시 돋친 대답들로 막아낼 수 있었던 무시, 죽음의 목전에서 발버둥 치며 빠져 나오려 했던 힘든 기억, 온 몸으로 부정하고자 몸부림쳤던 가족의 죽음, 눈물을 참아가며 지키려 했던 첫사랑의 기억까지. 하지만 첫사랑의 기억만큼은 지켜내질 못했다. 서서히 잊혀지다 희미해진 소년의 모습은 다시 기억 속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이름조차도.
이 모든 것은 독립된 것들이 아닌 한데 얽혀 복잡하게 자리 잡은 그녀의 아픈 과거의 결정체였다.
서로가 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공부, 공부, 공부뿐이었다. 공부만 잘하면 하고 싶은 것도 다 하고 되고 싶은 것도 되고 부자도 될 수 있고 또 아빠도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공부 외에 다른 것들은 다 힘들었다. 강해져야 하는 것 이겨내야 하는 것 지켜내야 하는 것 투성이었다.
그런 그녀가 안식을 찾는 곳은 꿈 속에서였다.
가보지 않았지만 실존 하듯 생생한, 만나지 않았지만 옆에 있었던 듯이 그리운.
항시 꿈에서만 가던 곳.
꿈에서만 만나던 사람.
깨어나면 늘 잊혀졌던 꿈속의 소년을 오늘 기억 속에서 만났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나 이석 이 사람 서로가 꿈에서 쭈욱 만나오던 그 소년을 닮았다. 아주 많이.
처음 본 순간 느꼈던 이상한 감정이 그것이었던가?
그래서 떨렸던 것일까?
서로는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런걸 보여 줄 수 있을까? 나 스스로에게 조차 보이고 싶지 않아 내 안 깊은 곳에 넣어두고 문을 잠가뒀는데 어쩌면 이것들이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런 그녀의 생각과 꿈속을 이석은 탐험하고 있다. 마치 자기의 세계인양.
***
“아직 준비가 안됐다는데 이렇게 강제로 남의 꿈속을 들여다보는 게 어디 있어요? 보고 나니 좋아요? 뭐 비밀이라도 캐낸 것 같아 성취감 있나 보죠?”
“네 비밀 따위 관심 없어.”
“그래요. 교수님께 아니니까 관심 없겠죠. 하지만 저에겐 소중한 걸 마음대로 들추어내고는 왜 하찮게 여겨요? 그렇게 알아버렸으면 존중이라도 해주는 게 예의 아니에요?”
“예의 차려야 하는 위치는 너잖아, 피라미드 구조 받아들이고 시작한 거 아니었어?”
“네, 그래서 최대한 존칭해드리고 있습니다. 그게 제 선에서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대접이에요.”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는데 나는 피라미드 최상의 1단계에 있는 1인자고 너는 네가 2단계나 3단계쯤에 있는 나름 상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니야. 넌 저 아래 최하위 10단계 어딘가에 머무는 존재야 알았니? 그러니 네 위치에 맞게 행동해.”
“저 이제 다신 여기 안 와요.”
“알았어.”
생각보다 냉정한 이석의 대답이 사실은 못내 싫었다.
“네가 안 온다면 데리러 가야지. 안 그래도 앞으론 내가 데리러 가려고 했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자존심을 채 주워 오기도 전인데 왜 그의 두 번째 대답이 그녀로 하여금 안도감을 주는 걸까? 서로는 그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석의 마지막 말은 못 들은 척 하고 싶었다. 서로는 쿵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나와 버렸다. 그 소리는 서로의 마음이 내려앉는 소리와 같았다. 서로는 첫사랑을 닮은 이석으로 향한 자신의 감정에 무언가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느낀 순간이었다. 서로는 서둘러 그곳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한편 이석은 감시 카메라를 통해 엘리베이터 안의 서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혼잣말을 하며 얼굴을 감싸다 벽을 치고 주저앉고를 반복하는 서로의 표정엔 백만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당황, 부끄러움, 원망, 떨림, 긴장, 그리움, 그리움, 자신으로 향한 아득한 그리움이 서로의 얼굴에 있었다.
‘그 아이를 지켜 주리라 다짐했던 오래된 마음은 사실은 그저 동정에서 시작된 자기 위로의 감정이었던가......’
그런 서로의 모습이 안쓰러워 마음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
늦은 밤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바쁜 걸음으로 보도블록 위를 걷는 서로. 그리고 그녀의 뒤를 매끈하고 윤기 나는 스포츠카가 제 역할을 상실한 채 사람의 걸음걸이 속도로 주행을 하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내민 이석의 얼굴이 보였다.
“바래다줄게.”
“됐어요.”
“버스 없어.”
“택시 불렀어요.”
“언제?”
“지금요.”
“네 핸드폰 나한테 있는데.”
우뚝 멈춰선 서로는 못이긴 듯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차창 밖으로 팔을 내밀고 핸드폰을 가벼이 흔들어대며 얄미운 미소를 짓고 있는 이석과 눈이 마주치자 억울한 듯이 그에게 다가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러니까 지금 부른다고요.”
서로는 그제야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됐어. 뭘 지금 불러 그냥 타.”
“괜찮아요.”
“괜찮다면서 왜 안타?”
“아니, 싫다고요.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요?”
서로의 공격적인 말투가 이석의 귀를 때렸다.
“내가 태워다 주겠다는데 말이 많다.”
이석의 말은 방패가 되어 서로의 따가운 말을 거둬냈다.
“아니 제가 싫다는데 제가 싫다고요, 제가.”
되돌아오는 화살을 맨 손으로 방어하듯 서로가 또 대꾸었다.
“이 상황에서 누구 의사가 더 중요한 건지 몰라?”
“무슨 질문이 그래요. 당연히 저죠.”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나지. 내가 널 바래다주겠다는데.”
“또라이 아니에요?”
“어, 또라이 맞는 거 같아...... 나 말고 너.”
보아하니 이석의 입가에 웃음이 서려있다. 그 모습을 보자 할 말을 잃었는지 빠른 걸음을 걷던 서로가 우두커니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움 속에 별빛을 담은 밤하늘은 어쩜 이리도 아름다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느새 차에서 내린 이석이 서로의 옆에 다가와 서있었다.
(‘내가 누구랑 많이 닮았지?’)
서로는 그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꿈속을 들여다보았으니까.
서로는 말없이 이석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줄만 알았는데 날카로운 줄만 알았는데...... 이상하리만치 따뜻한 온기를 발산하는 눈이었다.
이석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은하수 같은 그녀의 눈이 별빛보다 반짝였다. 상처로 가득한 그 눈동자의 떨림이 전해졌다.
이석은 안다.
그녀의 우주가 지금 몹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첫사랑과 닮은 그의 모습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들킨 것 같아서......
“나 미워해도 돼.”
이석이 말했다.
“뭐 그런 거 가지고 훗, 미워할 감정 따위도 없어요. 전.”
“아니, 있어.”
“없다니까요, 그런 거.”
“내가 찾아줄 거야.”
“뭘요?”
“네 감정.”
“네?”
“믿어봐.”
“재밌나보네요. 절 가지고 노는 게.”
이석의 표정이 얼음 동상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화가 난 것 같았다.
“내일부턴 내가 너를 데리러 올 테니 그리 알아. 오늘은 데려다 줄게. 그만 가자.”
이석이 우악스럽게 서로의 팔을 잡아끌었다.
서로는 싫다는 빈 말조차 하지 않고 반항 없이 그에게 끌려갔다.
왜인지 그의 팔을 뿌리치고 싶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