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3호의 일탈>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315-4호가 말했다.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은 디엘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디엘의 정신은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에 휩쓸리듯 잃어버린 미아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눈을 감아도 또 다른 세계가 보였다. 잃어버린 그녀의 세계, 미아의 세계......
***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니 최첨단 기기들이 가득한 차가운 분위기의 어느 실험실 같은 곳이었다. 한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는 울고 있는 한 아기를 마치 물건 다루듯이 한 손으로 잡아들더니 말했다.
“자 그럼 라벨링 시작해. 얘는 315-1호, 해부용”
그가 들고 있던 아기를 옆에 있는 남자에게 전달하자 받아 든 남자가 그 아기의 발목에 분류표를 달았다. 그리고 그 남자는 또 다른 아기를 집어 들었다.
“315-2호는 감각 통제, 315-3호 감정 통제, 315-4호 기억 통제, 315-5호 사고 통제.”
그 남자는 마치 실험용 생쥐를 다루듯 일말의 감정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말투로 한 아기를 집어 들 때마다 그렇게 말했고 마침내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미아의 발목을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응애앵 응애앵’
거꾸로 들린 미아는 중력에 의해 피가 얼굴로 쏠리자 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자 얘는 315-6호, 퍼펫으로 분류한다. 서둘러 양부모를 알아봐.”
그들은 미아를 포함한 6명의 쌍둥이를 유리로 된 작은 관에 하나씩 담아 바퀴 달린 실험용 카트에 옮긴 후 밖으로 밀고 나왔다. 아쉽게도 엄마의 얼굴을 보진 못했다.
그 후로 미아는 세상 밖으로 나와 부유한 가정에 입양되어 유복한 환경에서 잘 자랐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운이 좋았던 걸까? 그들의 실험 목적이 뭔지 알 수 없을 만큼 간섭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한 가지 특이 한 점이 있다면 미아의 몸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직업이 의사인 양부모가 정기적으로 특정 약물주사를 미아에게 놓는 일이었다. 아픈데도 없었고 그렇다고 주사를 맞은 후에 힘이 불끈 솟는 것도 아니었는데 주사만큼은 빠트리지 않고 꼬박꼬박 챙겼다. 또한 주기적으로 찾아가는 병원과 담당의도 있었다.
어느덧 디엘은 미아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있는 휴를 만났다.
바닷가. 시원한 바람 따라 스쳐 오는 바다 향내가 잔잔하게 흐른다.
“미아! 미아!”
“무슨 일이야?”
“이리 와봐 이것 좀 보라고!”
그녀는 덮고 있던 비치타월을 내려놓고 급히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것 좀 봐. 모래는 파도가 한 번 쓸고 가면 흔적이 다 지워져 버리는데 여기 반짝거리는 거 보여? 프리즘 같이 빛나는 거.”
“잘 안 보이는데.”
“그럼 저쪽으로 가서 한 번 봐봐.”
미아는 한 발짝 떨어져 다시 모래를 바라봤다. 휴의 말대로 오묘하게 빛나는 모래 빛깔이 신비롭고 예뻤다.
“응 보여.”
“신기하게도 빛은 계속 반짝거려 왜 파도가 빛은 쓸고 가지 못할까?”
“음...... 빛은 파도보다 강하니까, 아니면 빛은......”
“알았다!”
“뭔데?”
“파도가 빛을 만들어 낸 거야. 물이랑 모래가 마찰하면서 생긴, 저 오팔 빛은 태양 빛의 반사와 굴절 현상일거고 어쩌면 계속해서 더 빛날지도 몰라.”
“그럴까?”
“우리 학교에서 밤에 몰래 실험해보자.”
“네 말이 맞는 거 같긴 한데 넌 역시 커서 시인이 되진 못하겠구나.”
“왜 넌 내가 시인이 됐으면 좋겠어?”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글쎄 뭐랄까......”
“너도 나랑 같이 갈 거지? 학교에?”
“그래 같이 가자! 방학이긴 해도 밤에 가는 게 낫겠지?”
“역시 미아 넌 내 친구야!”
미아의 기억은 넘실넘실 또 다른 휴와의 기억을 향해 파고 들어갔다.
“미아! 미아!”
“무슨 일이야?”
“눈 좀 떠봐. 아직 잘 시간이 아니라고 벌써부터 곯아떨어지면 어떡해.”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며 휴를 바라보았다.
햇살도 아닌 한 남자가 따스한 눈길로 그녀에게 빛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는 창 밖 하늘에 떠있는 큰 먹구름 사이로 가늘게 내비치는 빛줄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번개 같은 사람일까, 햇살 같은 사람일까?”
“잘 때는 번개 같은 사람, 지금은 햇살 같은 사람.”
“그래? 그럼 난 지금 번개 같은 사람 할래.”
“뭐야! 그래도 석양이 지는 건 봐야지. 오늘 같은 날.”
익살스럽게 미아를 간지럽히는 휴 때문에 미아의 입에서 꺄르르 웃음이 피어 나왔다.
“날 봐, 내가 너의 태양이니까 황혼도 나한테서 지는 거야.”
“오올~ 이제 시인 다 됐네.”
“널 위해서라면 뭐든.”
그들은 사랑스럽게 입을 맞췄다.
“나와 결혼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오늘 같은 날 벌써부터 잠을 자는 건 너무 하잖아. 안 그래?”
미아의 피곤한 얼굴은 살짝 미소로 바뀌고 기억은 또다시 파도를 타고 기억의 바다를 헤엄친다.
“미아! 미아!”
“무슨 일이야?”
“여기 와서 이것 좀 봐봐.”
미아가 그의 실험실로 달려 들어왔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커다란 유리 실험실 안에 떠있는 파란 구름이었다.
“인공 구름이네? 근데 어떻게 파란 색이지?”
미아의 물음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휴가 자신 있게 말했다.
“이게 바로 바이오틱 재생 물질의 효과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는 그를 나지막이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해낸 거야?”
휴는 미아의 질문에 자신이 드디어 해냈다고 소리치며 외칠 것 같았지만 애써 침착한 모습으로 조바심 난 그녀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그렇다는 대답 대신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미아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다음 말을 대답으로 대신했다.
“자 이것 봐. 인공 구름을 만들기 전에 유리 실험실 안에 있는 수분에 재생 물질을 한 방울 떨어트리고 온도와 기압 조절을 이 공식대로 적용해가면서 약간의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재생 물질과 만나는 물이 점점 파란 색으로 변하는 게 보일 거야. 이 물질은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바이오틱 물질이기 때문에 인체에 무해하다는 거 아주 중요하지 그리고 산소와 결합해야만 그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거야. 보니까 색깔은 무색에는 침투가 되더라고.”
“그럼 다른 유색과 만날 때는 색깔 변화가 없다는 거야?”
“물론이야. 그렇기 때문에 인공 구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파란 색의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걸 볼 수 있어. 그러면서 원래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것 보다 더 큰 구름이 형성되는데 그게 바로 재생 물질의 효과야 지켜보자고.”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시선은 온통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무색과 만나서 재생 물질의 색인 파란색으로 변하고 점점 커지는 거 보이지?”
“6년 동안 연구했으면서 다른 연구원들과 할 때는 왜 발견을 못했지? 대체 어떻게 한 거야?”
휴는 그제야 자랑스러운 표정을 당당히 드러냈다. 앞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을 명예를 생각하니 미소를 얼굴에서 떠나보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주 새로운 방식이지. 오래도록 참고 기다리지 않은 자는 가질 수 없는, 뭐랄까 쉽게 음식에 비유를 하자면 숙성이라고 불 수 있지. 하지만 그 방식보다 더 중요한 건 최초의 원료, 분자야, 일반인들은 절대 찾을 수 없는 바다 깊은 곳에서 발견된 미생물이거든. 나는 정말 운이 좋았던 거야.”
미아와 휴는 실험 작업에 더욱 몰두하였다.
그들은 미아가 연구 중인 기억의 재발견이라는 취지 아래 뇌 속에 잠재되어 있는 기억들을 찾아내는 기계를 발명한 데에 이어 인체에 무해한 재생 물질을 뇌의 신경 속으로 침투시켜 잘려진 신경을 다시 자라게 하게 위해 실험에 매진하였다. 그것은 정신 의학에 발을 담고 있는 미아의 과학적 성과에 한 획을 긋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비록 기억의 세포를 활성화 시켜 잠자고 있던 기억들을 찾아내는 일은 기계로 대신할 수 있지만 한번 잘려진 신경을 붙일 수 없고 손상된 신경을 회복시킬 수 없다는 의학적 한계는 과학자로서든 의학자로서든 극복하기 힘든 또 하나의 과제였던 것이다.
***
미아의 기억 속을 탐험하고 있는 디엘은 어느 날부터인가 또 다른 인격이 그녀 안에 존재하는 것을 느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실체 없는 느낌이 아닌 확신이었다. 예고 없이 찾아 드는 각기 다른 4인격의 목소리들이 머릿속으로 미아에게 말을 거는 것을 똑똑히 들었던 것이다.
가장 말이 많은 인격은 다행히도 감성이 풍부하고 휴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여린 여인의 인격이었다. 하지만 그 인격은 감성에만 너무 치우쳐 말만 꺼냈다 하면 휴에 대한 얘기, 사랑에 대한 얘기 따위로 미아의 사고를 방해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인격들이 괜찮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인격은 지극히도 현실적이라 연구, 공부, 손익, 성공 등에 대해 계산적인 조언만을 미아에게 해주는 감정 없는 차디 찬 인격체였고 나머지 둘은 말은 별로 없었지만 가끔 착각한 것을 정정 해주는 역할로 말을 걸어오는가 하면 오감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사리분별을 흐리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때때로 그들의 목소리가 머릿속 어딘가 한곳에 모여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통에 정작 제1의 인격인 미아에게 엄청난 두통과 구토감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곧 담당자가 오면 휴의 재생 물질과 관련해 보고를 할 거야.”
“절대 안 돼, 그들의 손에 재생 물질이 넘어가는 건 휴가 절대 원하지 않는 일이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 난 내 할 일을 하는 것뿐이야.”
“무엇보다 휴가 위험하게 될 거야, 그들이 살려두지 않을 거라고!”
가끔은 이렇듯 알 수 없는 그들만의 대화가 오고 가는 게 미아에겐 일상이었다. 이러한 날들이 하루하루 지나갔고 어느 날 미아는 조용히 책상에 앉아 글을 써 내려 갔다. 그것은 휴에게 남기는 편지였다.
[여보, 나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어요.
나에게는 당신이 모르는 4명이 인격이 존재합니다.
모두가 나처럼 당신을 사랑하면 좋겠지만 그들 중엔 당신을 이용하려고 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인격이 있어요.
나는 그 인격과 싸우고 또 싸웠지만 결국엔 내가 당신을 위험에 빠트린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점점 기억을 잃어 갑니다.
내가 당신을 기억할 수 있을 때 당신을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떠나고 싶어요.
푸른 물질의 존재는 당신의 기억 속에서 지우세요.
그리고 다시는 기억해 내지 마세요.
이것만이 당신을 나로부터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당신의 슬픔까지 가져가지 못해 미안합니다.
사랑해요.]
미아는 수면제를 먹고 죽음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림 끝에 그녀를 찾아 온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희미한 정신 속에서 미아를 붙드는 낯익은 얼굴, 미아 자신의 모습이었다.
(‘당신은 나에요?’)
미아는 입을 벌려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분명 알아들었다.
“안녕, 미아...... 나는 포이보스 소속 실험 번호 315-3호 너의 감정 통제자야, 네가 있는 이 곳으로 오기 위해 나 목숨을 걸었어. 너는 다중인격이 아니야. 그 인격들은 실제 하거든, 나처럼...... 내가 여기 온 이유는 휴를 살리기 위해서야, 내가 휴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죽지 마.”
미아는 아무 말 없이 또 다른 미아를 바라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