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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와르: 1년 후, 모든 기억 삭제
작가 : 긴장감
작품등록일 : 2018.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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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후에 기억을 지워주세요
작성일 : 18-02-10     조회 : 480     추천 : 0     분량 : 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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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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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언하건대, 탁자 위로 거액의 돈을 올려놓은 이 젊은 여자는 제정신이었다.

 

 최근 우울증을 겪었다든가 아니면 실연과 같은 큰 충격을 받았다든가 하는 절망적인 얼굴은 아니었다.

 

 두 눈은 아름다운 별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초롱초롱 빛이 났고, 하얀 피부엔 생기가 돌았으며 입술은 훔치고 싶을 만큼 촉촉해 보였다.

 

 심지어 입가엔 희미하게 웃음기까지 담겨 있었다.

 

  그런 그녀의 너무나도 황당한 의뢰에 사무실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우리 사무실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인생의 끝’을 맛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당장 밥 한끼 사먹을 돈이 없지만 아픈 자식들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자 하는 가난한 부모들,

 

 마담의 뱀 같은 꾀임에 넘어가 술집을 전전하며 남자들에게 찬란한 봄을 파는 신세가 된 여자들,

 

 술과 여자 그리고 도박에 인생을 팔아 넘긴 대책 없는 남자들.

 

 이들은 엄연히 고객이었지만 우리는 이들을 통칭 ‘쓰레기’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여자는, 음지(陰地)의 밑바닥에서 구르는 사람들은 흉내 조차 낼 수 없는 양지(陽地)의 밝은 분위기를 풍기며 사무실에 들어왔었다.

 

 작고 동그란 얼굴을 감싼 갈색 숏컷 머리에 얇은 황토색 봄 코트 그리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분홍색 치마. 때묻은 구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람 목숨 알기를 우습게 알던 ‘늙은 늑대’ 김광규 조장조차 이런 낯선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자신보다 한참 어린 그녀 앞에서 자못 예의를 갖추었다.

 

 

  “에……. 뭐, 의뢰를 주신다면 저희는 받기야 받겠지만, 정말 이 의뢰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고 찾아오신 건지…….”

 

 

 고운 두 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여자는, 눈만 마주쳐도 벌벌 떨게 되는 험악한 인상의 이 남자 앞에서도 여유 있게 미소를 보였다.

 

 

  “네. 이곳을 찾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생각할 시간과 후회할 시간도 충분했습니다. 제 결정은 단호합니다.”

 

 

 참으로 웃긴 일이었다. 위협적인 거구에 떡 벌어진 어깨, 손목까지 덮은 문신, 얼굴에 칼자국의 흉터까지 있는 이 늙은 늑대가 순백의 토끼 같은 여자 앞에서 긴장해 있었다.

 

 이 양반에게 ‘여자’는 그저 욕구 충족의 대상일 뿐,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 대해 본 적이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의 뒤에 서서 이 장면을 지켜보는 나로서는 제법 재미가 쏠쏠했다.

 

 그녀가 의뢰의 대가로 책상 위에 올려놓은 돈의 액수는 대략 억 단위로 보였다.

 

 커다란 여행 가방에 넣어 들고 왔는데, 아마 가녀린 여자의 힘으로 들고 오기는 무거웠을 것이었다.

 

 김광규 조장은 이 돈 앞에서 군침을 흘리면서도 섣불리 의뢰를 맡지 않는 노련함을 보였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저희는 중개인이 없으면 일을 진행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의뢰자 분이 소송을 걸거나 경찰에 신고라도 하시면 저희 입장이 매우 난처해지니까요.”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중개인은 이 분입니다. 여기 명함. 이 분의 성함을 대면 친절하게 안내해 주실 거라고 하셔서 저 혼자 왔습니다.”

 

 

 여자는 허리춤에 놔둔 작은 가방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조장에게 건넸다.

 

 이를 확인한 조장은 화들짝 놀라 삐딱하게 굽어있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이웅조 회장님! 안 그래도 회장님께서 오늘 손님이 한 분 올 거라고는 말씀 하셨는데……. 실례지만, 잠시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조장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개인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김광규 조장이 ‘이웅조 회장’이라고 부르는 남자는 우리 조직원들의 임시 우두머리쯤 되는 남자였다.

 

 대외적으로는 ‘회장’이란 호칭을 붙였지만, 내부에서는 보통 ‘대리(代理)회장’이라는 호칭을 더 많이 사용했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죽으러 온 사람답지 않게 아이 같은 호기심의 눈빛으로…….

 

 그녀의 시선은 자신을 둘러싼 정장의 남자들부터 오래된 가구들까지 샅샅이 훑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한 녀석은 갑자기 귓불을 붉혔는데 아마 조장이 이를 발견했다면 녀석은 얼굴에 주먹을 맞고 바닥을 굴렀을 것이었다.

 

 

  “사무실이 깨끗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네요.”

 

 

  그녀가 말했다.

 

 

  “분명 제 의뢰를 맡아주실 분들이 있는 곳이라면 벽에 피가 묻어있고, 조명도 어두운……. 그런 무서운 곳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문득 여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호응을 바라는 눈치였다.

 

 

  “저희도 사람인지라 무서운 곳에 있으면 무섭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거짓말!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귀신이라도 다 때려잡을 거 같은데.”

 

 

  “여기 있는 녀석들, 다들 곁에 엄마가 없으면 잠들지 못합니다.”

 

 

  “호호호.”

 

 

  여자의 웃음소리는 마치 혹독한 겨울 뒤에 보상처럼 다가온 봄처럼 따뜻하면서도 여기 사무실 분위기와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웃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의뢰하려는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인가?

 

 게다가 보통 여자라면 우리들이 둘러싸 서있는 것 만으로도 겁을 먹거나 주눅이 들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 탑승을 기다리는 초등학생마냥 들떠 보이기까지 했다.

 

 

  “제 이름은 ‘석은하’예요.”

 

 

  그녀가 뜬금없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쪽은?”

 

 

 너무 천진난만해서 일까?

 

 나도 모르게 눈빛에 이끌려 굳이 이름을 말해버렸다.

 

 

  “민. 정민”

 

 

  “정민씨…….”

 

 

 그녀가 내 이름을 중얼거릴 즈음 짧은 통화를 끝낸 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웅조 회장으로부터 꽤나 곤란한 명령을 들은 듯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짧고 두꺼운 뒷목을 손톱으로 벅벅 긁어댔다.

 

 굉장한 압박감을 느꼈을 때 나오는 그의 습관이었다.

 

 여자의 앞에 앉은 김광규 조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웅조 회장님께서 석은하양을 친절히 모시라고 단단히 일러두시더군요. 계약서를 보내셨다고 하시는데 갖고 오셨습니까?”

 

 

  “네, 네. 중개인 도장과 제 도장은 이미 찍어놨어요.”

 

 

 여자는 미리 준비해둔 계약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조장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그 계약서를 받아 한 장 한 장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흠. 양식은 회장님께서 준비하셨군요. 저희도 이런 의뢰는 처음이라 계약서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야 할 거 같습니다.”

 

 

  “네. 편하게 읽으세요.”

 

 

  “…….”

 

 

 김광규 조장은 계약서를 살펴보는 동안 큰 표정변화를 보이지는 않았다.

 

 이따금 숨이 턱턱 막히는지 한숨을 쉬긴 하였지만, 주저 없이 빠르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손을 들어 도장과 인주를 들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마지막으로 도장까지 마저 찍은 그가 말했다.

 

 

  “사실 이런 의뢰에 계약서는 법적 효력이 없는 거 아시죠? 그저 의뢰인과 저희와의 약속일 뿐입니다. 그래도 회장님의 말씀도 있고 하니 일은 최대한 성심껏 해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그러나 의뢰 내용이 본인에게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숙지하셔야 합니다. 앞으로 1년 뒤에 강제로라도 의뢰인 본인의 머릿속 모든 기억을 지워달라 하셨으니……. 기억을 지우는 일은 음지에서만 하는 검증되지 않은 시술이라 사망 확률이 더 큽니다. 그래서 저희들끼리는 자살이나 마찬가지라고까지 말합니다만.”

 

 

  “잘 알고 있습니다. 1년 뒤에는 제가 틀림없이 이 결정을 후회하고 여러분들로부터 도망을 다니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도 저를 꼭 찾아내셔서 기억을 지워주세요. 죽음도 각오하고 있을 만큼 절실합니다.”

 

 

  두 주먹을 무릎 끝에 올려 놓은 석은하의 표정이 웃음기 없이 결연해졌다.

 

 그녀는 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챙기고서도 혹시나 조장이 이 의뢰를 맡지 않겠다고 말을 번복 할까 두려운 눈치였다.

 

 어떻게든 성사시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눈빛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김광규 조장은 주머니에서 짧고 두꺼운 시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은 커터로 그 끝을 조금 잘라내고 입에 물자 그의 옆에 있던 조직원 중 한 명이 라이터를 가져다 시가 앞에 대 주었다.

 

 첫 모금을 빨아들인 조장이 걸걸한 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람 하나 찾아내는 건 저희들에겐 식은 죽 먹기지요. 평소에 간간히 미행이 붙을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 드립니다.”

 

 

  “네.”

 

 

  “어이.” 조장이 내게 말했다. “손님 가시는 길, 안전하게 차로 모셔다 드리지.”

 

 

 나는 고개를 숙인 뒤, 선반 위에 있는 자동차 키를 챙겨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안내하겠습니다.”

 

 

 여자는 작은 가방만 챙겨 들고 일어서 순순히 내 뒤를 따랐다.

 

 몸을 가로지르는 크로스백의 끈을 양손으로 꼭 쥔 채 처음으로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아니, 어쩌면 참았던 긴장감이 이제야 몰려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통 배짱이 아니고서야 여자가, 그것도 혼자서 이곳을 찾아오는 건 쉽지 않았을 테니까.

 

 우리는 한 사람만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 건물 바깥 주차장으로 나왔다.

 

 오후의 햇살이 칙칙한 사무실과 달리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 석은하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훑었다.

 

 20대 초반의 앳된 얼굴. 아직 볼에 살이 통통한 게 세상물정을 제대로 알 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그녀의 또래 여자라면 대부분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가며 젊음을 만끽하고 있을 테지만 그녀는 그런 것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였다.

 

 뭔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듯한 두 눈, 작은 코, 분홍색의 얇은 입술.

 

 이목구비 전체에서 화장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잡티 없는 피부를 보니 간단히 BB크림이나 좀 바른 듯 하였다.

 

 

  “뭐죠?” 그녀가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불쾌했던 것일까? 나는 한쪽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가실 곳이 어딘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차로 모셔야 하니까.”

 

 

  “아아, 미동역 앞에서 내려주세요.”

 

 

 우리는 주차장에 놓인 검은색 중형차로 향했다.

 

 봄 햇살이 따사로웠고, 부드러운 바람이 옷깃을 스쳤다.

 

 

  “어이. 정민. 데이트라도 가나보지? 기분이 좋아 보이네.”

 

 

 갑자기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줄무늬 회색 정장에 검붉은 실크 셔츠를 입은 중년의 한 남자가 입에 담배를 물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온 얼굴과 턱을 뒤덮은, 짧고 검은 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인 ‘손낙원’ 조장이었다.

 

 혼자서는 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인데 어쩐 일로 주위 아무도 없이 서류 가방만 하나 챙겨 들고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바로 예의를 갖춰 허리를 굽혔다.

 

 

  “형님, 오셨습니까?”

 

 

  “아, 이 자식. 일반인 앞에서는 그런 호칭 붙이지 말라니까. 촌스럽잖아. 우리는 엄연한 기업인이지, 폭력배 따위가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하니?”

 

 

  “죄송합니다, 조장님.”

 

 

  “너희 조장 안에 있지? 부동산 건으로 찾아왔다. 아무래도 이번엔 너희 조장 궁지에 몰리게 될 거 같아. 조만간 네 녀석도 골치 아픈 일이 생길 테니 마음의 준비 철저히 해놔라.”

 

 

  “…….”

 

 

  “데이트 중인 거 같은데 얼른 가 봐.”

 

 

  “예, 그럼…….”

 

 

 언제 봐도 기분 나쁜 남자였다.

 

 그와 김광규 조장은 현재 공석인 부회장 자리를 두고 다투는 라이벌 관계로서, 때로는 협력관계가 되기도 하였지만 뒤로는 서로의 몰락을 바라는 그런 사이였다.

 

 나는 그가 시야에서 모습을 감출 때까지 허리를 굽혔고, 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머리를 들었다.

 

 

  “두 분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거 같네요. 정민씨 표정이 무섭게 변했었어요.”

 

 

  뒤에서 지켜보던 석은하가 말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희 쪽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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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안은 매캐한 담배 냄새가 이미 잔뜩 스며있었다.

 

 석은하는 보조석에 앉자마자 안전벨트를 매고 손을 배 앞에 가지런히 모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했어요?”

 

 

 차의 시동을 걸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나를 곁눈질로 힐끗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일이 잘 성사되어서 다행이에요. 이웅조 회장님의 명함을 들고 찾아가기는 했지만 혹시나 나쁜 일이 생길 까봐 걱정 많이 했거든요.”

 

 

  “나쁜 일이라면, 어떤?”

 

 

  “갑자기 납치되어서 장기매매를 당한다든가 생매장 당한다든가 아니면 몸이라도 팔린다든가.”

 

 

 이때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차는 좁은 골목을 지나 큰 도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 일까지 상상하면서도 용케 여기까지 왔네요.”

 

 

  “저를 살릴 수 있는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 오지 않으면 어차피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니 아무리 무서워도 와야 했어요.”

 

 

  석은하의 목소리가 전과 달리 떨리고 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두려움을 애써 참아내는 듯 하였다.

 

 저 작고 마른 몸으로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기로 하였다.

 

 그녀는 혼자 넋두리를 털어놓듯 말을 계속 이었다.

 

 

  “그래도 이런 곳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사람의 기억을 지운다니. 낭만적이잖아요?

 기억을 지우고 나면 새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원래 정민씨가 있던 사무실, 불법 대부업체라고는 들었어요. 저 이래봬도 이웅조 회장님이랑 조금 친분이 있어서 이야기 다 들었거든요. 그 사무실을 추천해준 분도 회장님이었고요.

 

 비록 원래 기억을 지우는 시술이 범행을 숨기기 위해서 생겼다지만 저한텐, 꼭, 필요해요.”

 

 

  다소 두서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결코 낭만적인 의뢰를 맡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게다가 우리와 어떤 일로든 일단 엮이게 되면 양지의 사람도 더 이상 양지에서 머무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개인이 몰락한 대가로 얻는 이익을 취하기 때문이다.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멍청하다고 해야 할까?

 

 목자 잃은 새끼 양과 같은 이 여자는 이웅조 회장이라는 자를 너무 믿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 아들이 자신의 대리 회장직을 넘봤기 때문이었다.

 

 이웅조 대리 회장은 천성이 잔인하고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정식 회장직이 아닌 대리 회장직이라는 이유로 주위엔 적이 항상 들끓었다.

 

 누구든 명분만 내세우면 그를 그 자리에서 내칠 수 있는, 썩은 동아줄과 같은 자리였다.

 

 그런 자를 믿는다고? 뒤에서 총이나 안 맞으면 다행일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그녀에게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특유의 밝은 성격이나 가상한 용기 그리고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외모는 죽기 아까우나 어차피 나 하나 나선다고 앞으로 그녀의 운명이 바뀔 리 만무했다.

 

 나는 그저 천천히 그녀가 몰락하는 모습을 먼 거리에서 지켜보면 될 것이다. 문득 담배가 생각났다.

 

 

  “기억을 지우는 시술은 전기로 뇌를 헤집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아까 조장님은 죽을 수도 있다고만 말씀하셨지만, 사실은 끔찍한 통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뇌사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아요.”

 

 

  몇 시간째 피우지 못한 담배 금단현상 때문이었을까?

 

 내 입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는 가족이 없지만, 만약 가족이 기억을 지우겠다고 하면 차라리 죽음을 권할 것 같습니다. 그건 고통이라도 짧으니까요.”

 

 

  “……정민씨는 그 시술하는 장면을 봤나요?”

 

 

  “시술 전, 시술 과정, 시술 후 그리고 뇌사상태 이후 우리가 그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까지 다 봤습니다.”

 

 

  “…….”

 

 

  석은하는 창가 쪽으로 얼굴을 돌려 표정을 감추었다.

 

 괜한 말을 꺼내 의뢰인을 불안하게 만들었나 생각했지만, 딱히 그녀에게 위로나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은 건네지 않았다.

 

 결국엔 그녀가 선택한 일이니까.

 

 차 안의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다.

 

 석은하와 나는 방금 만난 사이나 마찬가지이니 친분을 따질만한 관계는 아니지만 어쩐지 서로 훨씬 멀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차가 목적지 앞에 도착할 때까지 약속처럼 각자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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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를 데려다 주고 돌아온 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문 앞에 서 있던 동료, 박휘원이 막아 섰다.

 

 

  “왜?”

 

 

 내가 묻자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사무실 문을 가리켰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철문에 귀를 대보니 김광규 조장이 잔뜩 흥분해서 윽박지르는 소리와 긴장한 조직원들의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그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박휘원은 곱상한 얼굴로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손낙원 조장이 왔다 갔어. 김광규 조장을 아주 대놓고 농락하더라.”

 

 

  “그래서? 안에 애들은 왜 맞고 있어?”

 

 

  “뭐, 언제는 이유가 있어서 애들을 팼어? 지 기분 나쁘니까 꼬투리 잡아서 그냥 패는 거지.”

 

 

  “…….”

 

 

  “잠깐 담배나 피고 오지.”

 

 

  그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우리는 야외 주차장을 지나 에어컨 실외기가 쌓여있는 좁은 골목으로 향했다.

 

 이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여서 햇볕이 잘 들지 않아 낮에도 어두웠으며 바닥엔 담배꽁초들이 셀 수 없이 많이 깔려 있었다.

 

 은밀한 대화를 나누거나 남들 눈을 피해 잠시 쉴 때 들리기 좋은 곳이었다.

 

 박휘원이 자신의 담배 하나를 내게 건넸다.

 

 평소 내가 잘 피우지 않는 브랜드의 것이었다.

 

 

  “난 이거 맛 없어서 안 피우는데?”

 

 

  “거참, 공짜로 주겠다는데 그냥 피워.”

 

 

  “…….”

 

 

  그는 막무가내로 내 입에 자신의 담배 한 개비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며 말했다.

 

 

  “당분간 조직내부가 상당히 시끄러워질 거 같다. 손낙원 조장이 준비를 상당히 많이 했더군. 피 바람이 불겠어.”

 

 

  “아까 나랑 마주쳤어. 부동산 일로 찾아왔다고 하던데.”

 

 

  “맞아. 손낙원 조장은 부회장 자리뿐만 아니라 사실상 지금 이웅조가 맡고 있는 대리회장직까지 넘보고 있어.

 이웅조 대리회장이 김광규 조장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것을 잘 아니까 한 번에 이 두 사람을 치려는 속셈인 거 같아.

 그런 손낙원 조장을 도와주고 있는 사람은 ‘권갑무’ 조장과 ‘류재진’ 조장이고.”

 

 

  “그럼 부동산 일이라는 것은?”

 

 

  “본부에 내는 상납금 기준을 올리려는 속셈이야. 김광규 조장이 절대 낼 수 없는 금액으로 올려버리겠지.”

 

 

 박휘원의 입에서 뿌연 담배 연기가 퍼져 나왔다.

 

 원래 사회 밑바닥에 있는 조직 일이라는 게 서로 물고 뜯기는 일의 연속이라지만, 어쩐지 이번 일은 유난히 귀찮아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내 입에 맞지 않는 담배를 조금 피우다 금방 버렸고, 이를 본 박휘원의 눈썹이 까딱 움직였다.

 

 

  “그게 그 정도로 별로야? 거의 장초인데 그냥 버려 버리네.”

 

 

  그가 보란 듯이 자신의 손에 있는 담배를 진하게 빨아들이며 말했다.

 

 그는 원래 이 조직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담배를 입에 대 본적도 없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느새 손가락에 니코틴과 타르 냄새가 항상 베어있을 만큼 자주 즐기고 있었다.

 

 

  “응. 내 입맛엔 안 맞아. 나는 너무 진한 건 별로거든.”

 

 

 나는 내 주머니에서 얇은 담배를 꺼냈다.

 

 그러자 그가 실소를 터뜨렸다.

 

 

  “넌 참 너랑 어울리지도 않는 담배를 좋아한다. 생긴 것만 보면 시가도 씹어먹게 생긴 놈이 여자들이나 피우는 얇은 담배를 피운다니.”

 

 

  “너도 네가 피우는 담배랑 안 어울려.

 생긴 건 아이돌 기생오라비 같은 게 담배나 술은 사회에 찌든 중년 아저씨같이 좋아하잖아.”

 

 

  “새끼. 다 옛날 얘기지. 나도 이제 30대를 바라보는 나이인데 아이돌 기생오라비는 무슨! 그래도 한 땐 그 얼굴로 여자 여럿 울렸는데 말이야. 다 한 때야, 한 때.”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음을 흘렸다.

 

 오늘 날씨는 정말 좋았다.

 

 미세먼지도 심하지 않았고, 파스텔 톤의 봄 옷으로 치장한 여자들은 보기 좋았으며, 나뭇가지에 새로 돋은 연두색 이파리들은 칙칙한 골목 거리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평소 거슬리기만 했던 비둘기들이 땅에 떨어진 부스러기들을 쪼아 먹는 모습도 흥미로웠고, 주점 앞을 치우기 시작한 아르바이트생의 모습도 어쩐지 눈물겨울 만큼 정겨워 보였다.

 

 밤이 되면 이 거리는 온통 네온사인 간판들의 불빛으로 가득 차 화려하게 빛나지만, 낮에는 그저 누군가의 삶의 터전으로 보이는 투박한 곳이었다.

작가의 말
 

 첫 화라서 양을 조금 길게 넣었어요^^;; 10,000자가 조금 넘네요. 앞으로는 8,000자 내외로 양을 맞추려고 합니다.

 

 '정민'과 '은하'의 애절한 러브스토리와 느와르 특유의 긴장감!!꼭 놓치지 마시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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