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밀지마시고 한 줄로 입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은 물론 가프란이 새로 만든 입구가 아닌 그린을 따라 정식 탑의 정문으로 향했다.
그린은 현장학습에 아이들을 대리고 나온 선생님같은 말투로 참가자들을 탑의 입구에 집합시켰다.
다들 갑작스럽고 불쾌하더라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별다른 불만 없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아까부터 불안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고 특히 그린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움찔거리는 양갈래 머리를 한 작고
어린 소녀가 방금 전부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모르는 곳에 갑자기 끌려와서 무서워하는 것일까?
당연하다.
지금까지 23번에 용사냥을 다니며 생사를 넘나든 나도 불안한데 작은 소녀는 얼마나 이 상황이 무서울까?
나는 어른스럽게 그 작은 소녀의 불안을 해소해줄 의무가 있다.
“꼬마아가씨, 뭔가 할 말이 있으면 나에게 말해도 좋아요.”
작은 소녀는 어께를 움츠리며 짧게 몸을 떨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얼굴이 빨게 지더니 눈가에 눈물까지 머금으며 작게 말했다.
“화, 화장실이요오..”
이런, 자신있게 오빠행세를 했는데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
뒤에 따라오던 여자가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 여자는 앳되지만 확실히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곤란해 보이는 걸? 이 언니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니?”
모른척하고 지나갈 수 있었지만 어설프게 오빠행세를 하려다가 도리어 곤란해진 나를 구원해준 구세주.
“난 튜타 프레아, 프레아누나라고 불러~. 귀여운 꼬마야 넌 이름이 뭐야?”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 프레아는 소녀의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았다.
“루비에.., 리리에요오..”
리리는 시선을 오른쪽 아래로 내리며 눈을 피했다.
그러다가 자신을 웃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프레아를 보고 자기소개를 안 한 것이 생각났다.
“인사가 늦었어요. 디레브 루크에요.”
나와 다르게 진짜 어른다운 눈부신 웃는 얼굴로 괜찮다고 해주었다.
그리고 사정을 듣더니 자신만만한 미소로 벌떡 일어나더니.
“나만 믿어, 이 누나가 해결해주지.”
라며 소녀를 들어 조심스럽게 두 팔로 받쳐 안고 그린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그린씨~ 잠시 대열을 이탈해도 되겠습니까?”
그리곤 그린에 바로 앞에서 둘만 들릴 목소리로 “꼬마 아가씨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네요.”
나는 일반인보다 감각이 발달해 이런 작은 소리도 들렸지만 아마 다른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린은 둘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역시 좋은 선생님이었다.
* * *
남겨진 우리들은 두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지금까지에 상황을 통해 대충 현실을 직시하고 입구 앞에서 서로를 탐색했다.
전신 갑옷을 두르고 허리에 멋진 칼을 찬 정의의 용사 느낌의 남자는 다른 사람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린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악당으로 인식되었겠지.
그 옆에서 방패를 등에 맨 남자는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보며 특히 모두가 들고 있는 다양한 무기를 주목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모인 사람 중에 살상무기가 없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동갑으로 보이는 여자는 낫을 어께에 기댄 채로 먼 산을 공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가프란은 주로 남자들을 보며 몸을 풀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싸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하겠지 다만 그 대상이 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흉흉한 무기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목검을 든 여자는 돌바닥에 정좌하고 단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보니 여기모인 인간은 12명이 아닌 13명이였다.
일부러 신경쓰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릴만한 존재감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긴 머리에 두 자루의 단도를 품에 지닌 그 여자는 분위기가 나빴다.
내가 자연스럽게 한명씩 보다가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도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단순한 인사용 미소였지만 왠지 모르게 소름끼쳤다.
반대로 유난히 눈에 띄는 인간도 있었다.
밝다고도 어둡다고도 못하는 날씨에 시간이었지만 한 소녀가 든 밝게 빛나는 활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소녀는 자신에게 오는 시선이 마음에 안 드는지 눈이 마주치면 꼭 날카로운 시선을 돌려주었다.
특히 그 소녀가 신경 써서 노려보는 여기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같이 활을 멘 아저씨는 소녀가 노려보면 가지런한 치아가 보일정도로 씨익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어 주고 그러면 소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피했다.
아직까지도 도끼를 닦고 있는 여성은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고 창을 든 불량해 보이는 남자는 나처럼 다른 사람 특히 활을 든 소녀를 힐끗힐끗 보며 가끔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때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하나라서 의아했지만 또 안고 뛰어 오는 것이라 판단했고 이제 들어갈 수 있는 듯했다.
그러나 뛰어온 것은 처음 보는 남자였고 유일하게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미안미안 지각이네~ 그래도 나만 빼고 가는 건 너희들도 잘못했다구.”
그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기억 난 듯이 눈을 번쩍하고 크게 뜨더니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켈타프씨를 잊어버렸군요.”
켈타프로 불린 남자는 손을 잠깐 흔들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표현했다.
손목에 유난히 핏줄이 튀어나와 보였지만 특별한 점은 없었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대로 [알터]에서 미아가 되는 줄 알았네.” 라고 농담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고급학교에서 3대륙이라는 강의를 했던 걸 기억했다.
알터라면 3대륙 중에 용인들이 모여서 사는 가장 작은 대륙이다.
척박하고 지형도 험난해서 살기 힘든 곳이라 드레곤들이 주로 서식하는 [브룬]보다 위험하다고 들어서 아직 나도 가본 적이 없다.
* * *
볼일을 봤다기에는 조금 많은 지나고 두 사람이 돌아왔다.
다들 어렴풋이 사정을 이해해서 불평은 하지 않았다.
여기서도 한명 빼고.
“대소변 못 가리는 쬐끄만 꼬맹이를 대리고 어딜 그렇게 오래 돌아다녀?”
아까 그 분위기 나쁜 여자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노출하며 상대를 화나게 만드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몇몇 사람은 불쾌하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프레아는 도발을 무시하고 오히려 웃어보였다.
“늦어서 죄송하네요. 가는 길에 나쁜 강아지를 만나서 조금 혼내주고 오는 길이였어요. 약간 위험할 뻔했지만.”
자세히 보니 옷이 젖고 군데군데 핏자국이 있었고 리리는 볼일을 보고도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린은 약간 놀란 말투로 “[사신개]는 위험했을 텐데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라고 유감을 표했다.
“아뇨, 강아지들이야말로 상대를 잘못 만났는걸요.”
프레이는 웃으며 뺨에 묻은 피를 손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또 혹시..” 그린에게 다가가서 귓속말로 “속옷 남는 거 있나요?”라며 체리를 살짝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은 안 들리겠지만 나는 일반인에 비해 감각이 발달하여 듣지 말아야할 것을 들어버렸다.
그 뒤 나는 한동안 리리를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