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는 그냥 집에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저희는 이제 가족인데 따로 행동할 수는 없죠. 실비도 어제 원준의 능력을 봤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재 인간인 거 애들이 알면 난리 날 텐데?"
"상관없어요. 인간을 사용인으로 고용하는 건 드물어도 없는 건 아니니까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난 모르겠어. 프란도 한 마디 해봐."
"……."
마차 안이 떠들썩했다. 원준은 구석에 앉아 열심히 차창을 바라봤다. 옆에 앉은 실비가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너 눈치껏 행동해. 인간을 싫어하는 엘프는 넘치니까. 절대 아가씨에게서 떨어지지 마. 그리고."
갑자기 실비는 몸을 일으키더니 원준에게 다가왔다. 원준은 무엇을 잘못했나 허둥대는 중, 실비가 원준의 목덜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벌써부터 정신줄 놓았네. 이거 보이도록 하라고. 아니면 큰일 난다니까."
그러고는 원준의 칼라 속에서 펜던트를 꺼내 옷 위로 늘어뜨렸다.
"아, 응. 고마워."
"정신 똑바로 차려."
실비가 휙 돌아섰다.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맞은편에서 엘리온이 쿡쿡 웃었다.
"실비 말대로 펜던트는 잘 보이게 하세요. 당신이 인간이라도 리돌프라가의 소속된 걸 알면 쉽게 건드리지는 않을 테니."
날개 모양의 펜던트. 이 조그마한 목걸이조차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푸른 빛깔을 띠고 있던 보석은 엘리온의 피를 한 방울 머금자 태양빛으로 변했다. 심지어 두께도 줄어들어 정확히 원준의 목 크기로 변했다. 엘리온의 말에 의하면 펜던트는 사용인의 증표로 주인이 풀어줄 때까지 절 때 풀 수 없다고 했다. 추가로 엘리온이 원할 때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신비한 일이었다.
"그런데, 셋은 자매야?"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니, 같이 살 길래. 서로 편해 보이고. 엘리온이 가족이라고 했고."
엘리온은 살짝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모님이 같지는 않아요.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랍니다."
"그렇게 우리를 생각해주는 건 아가씨 뿐 일거야."
실비가 고개를 저었다.
"크게 보면 우리도 너랑 다르지 않아. 다만 엘프는 엘프끼리 노예를 둘 수 없어. 그래서 귀족들이 엘프의 사용인을 들이고 싶으면 자신의 가문의 이름을 주고 가속으로 삼아."
"가속……"
"엘프만의 특이한 법이야. 다만 가속으로 들인 엘프들은 준귀족의 대우를 받아. 뭐 그렇다고 해도 보통은 사용인 취급을 받지. 이렇게 사용인에게 편하게 해주는 건 아가씨가 유일하다고 봐. 그니까 너도 운이 좋은 줄 알라고."
원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운이 좋았다는 건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저기 엘리온? 엘리온도 나에게 편하게 말해 주었으면 하는데……”
원준은 웃으며 얘기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엘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나한테 편하게 말하면 좋겠다고.”
어젯밤 엘리온은 이제부터 가족이라며 자신에게 편하게 말하라고 했다. 원준은 좋다 생각하여 말을 놓았지만, 이상하게도 엘리온은 존댓말인 채였다.
“전, 충분히 편하게 말하고 있어요. 원준.”
엘리온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진심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야, 잠깐.”
그러자 실비가 원준의 어깨를 끌어왔다. 그러더니 귓속말을 했다.
“아가씨는 어렸을 때 어머님께 엄한 교육을 받아서 저 말투가 입에 배였어. 아가씨는 저 말투가 정말 편한 거니까. 받아들여.”
“아니, 그거 이상하잖아?”
“어쩔 수 없는 걸 어떡해. 아가씨한테 편한 말투로 얘기 해보라 하니까. 말을 더듬더라.”
말을 더듬는 엘리온이라. 상상도 못할 모습이었다.
“그럼 나도 똑같이 존댓말 해야 하는 게……”
“그거 아가씨 싫어할 걸. 너도 알았겠지만 아가씨는 상대방의 감정에 되게 민감해. 너가 어색하게 행동하면 바로 알아차릴거야.”
‘골치 아파!’
이건 마치 나는 선배에게 반말하는데 선배가 나에게 존대하는 것과 똑같은 거 아닌가. 완벽한 엘리온이 그런 콤플렉스가 있었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도착."
그때, 가고 있는 내내 책을 읽고 있었던 프란이 입을 열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마차가 멈췄다.
"원준, 실비와 벌써 친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뭐? 내가 얘랑?”
실비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런 반응은 너무한 거 아니냐?”
엘리온은 입술에 손을 대고 조용히 웃었다.
“그럼 내리죠. 원준 문을 열어주시겠어요.”
"응."
원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 문을 열었다. 커튼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환한 햇빛이 물밀 듯 밀려 들어왔다.
"와!"
그리고, 원준은 내리자마자 탄성을 내질렀다. 장엄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대형 아치로 향하는 커다란 가도와 열을 맞추어 심어져 있는 나무들. 곳곳에 여러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엘프의 조각상과 저 멀리에는 돌고래 조형물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도를 가득 메운 엘프들의 무리가 원준의 눈을 매혹시켰다.
"루미온 학교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어서 들어가죠. 교내가 넓기 때문에 여유를 부리면 안 됩니다."
엘리온이 앞장서고 그 뒤로 실비와 프란이 걸었다. 원준은 그들을 따라가는 동안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시선이 느껴졌다. 엘프들은 원준을 신랄한 눈으로 응시했다. 심지어 원준과 시선 맞아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원준을 노려봤다.
"익숙해져야 합니다. 여기서 생활하려면 이런 일이 많을 겁니다. 제 옆에 계시면 문제는 없을 테니 조신하게 행동하세요."
엘리온이 등 너머로 넌지시 얘기했다. 그녀도 원준에게 집중된 시선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응 조심할게."
원준은 문득 자신의 공연에 환호하던 엘프들을 생각했다. 씁쓸한 기분이 속을 쓰리게 했다.
거대한 석조 아치는 학교의 정문이었다. 아치를 넘자 세 갈래 길이 나타났고 그 세 갈래 길은 각각 세 개의 다른 건물로 이어졌다. 이곳에서 첫 번째 이탈자가 생겼다.
"아가씨, 프란 갈게. 이따 봐."
"네, 실비 갔다 와요."
"이따 봐."
프란과 엘리온이 손을 흔들며 실비를 배웅했다.
"뭐야, 다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학교는 같지만 모두 같은 과정은 아니에요. 배우는 학문도 다르고요."
"그래? 다들 뭘 배우는 데?"
"저는 아버님의 희망으로 상업, 행정, 정치 등을 배웁니다. 프란은 문학, 가정을 듣고요. 실비는."
"음. 무술이나, 체육, 이런 거 아니야? 뻔한데? 왁!"
어디선가 자갈이 날아와 원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원준이 돌아보니 저 멀리서 실비가 눈총을 주었다. 원준은 소름이 돋았다. 저기에서 소리를 듣는 것도 신기했지만 자갈을 정확히 여기까지 던지다니, 대단한 완력이었다.
"네, 맞아요. 정확히 말하면 실비는 전쟁을 배웁니다. 전쟁 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는 것이죠. 하지만 실비는 또."
"아얏!"
또 자갈이 원준의 뺨을 때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보다 더 먼 거리에서 실비가 열심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엘리온은 쿡쿡 웃었다.
"말하지 말라네요. 뭐 어차피 알게 되겠죠."
"그...그래."
원준은 뺨을 얼러 만졌다. 마지막은 내 잘못이 아니잖아라고 호소하고 싶었다.
***
두 번째 헤어짐은 건물 안 층계참에서 생겼다. 삼 층에서 멈춘 엘리온과 달리 프란은 계단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프란의 교실은 층이 다른 모양이었다.
"프란, 이따 봐요."
"아가씨. 이따 봐"
"다녀와."
이번엔 원준도 힘을 내서 손바닥을 들었다. 하지만 프란은 원준을 물끄러미 보더니 인사 대신 한 마디를 던졌다.
"입 조심."
"응?"
그러고는 원준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옆에서 엘리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엘리온의 교실은 원준이 생각하는 것보다 멀었다. 체감 상 2분 정도였을까? 같은 층에서 교실을 찾으려고 2분 이상을 걸어야 한다니 놀라웠다. 원준은 야구광인 프로듀서에 이끌려 가봤던 야구장을 떠올렸다.
"편하게 대해주시라고 말한 지 하루도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온은 교실 뒷문에 멈춰 서서 원준을 바라봤다.
"유감스럽게도 건물 안에서 저와 대화할 때는 경칭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외부에서 봤을 때 저희는 엄연히 주종관계이기 때문에. 괜찮나요. 원준?"
당부하는 엘리온의 눈에 미안함이 서려있었다. 원준은,
"물론입니다. 엘리온 아가씨."
시원하게 대답했다. 소속사에서는 이보다 더한 일도 많았다. 아가씨라는 단어가 어색하긴 하지만 경칭을 사용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마워요."
원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엘리온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들어가죠, 원준. 별 일 없을 거예요."
엘리온이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원준은 조신스럽게 그 뒤를 밟았다.
엘리온의 교실은 강당이라고 말하는 게 어울릴 형태였다. 계단식으로 층을 만든 공간에 4인용 책상과 의자가 배열되어 있었다. 가장 아래층에는 교탁과 칠판이 있었다.
이는 어디에도 볼 수 있는 강의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른 게 있다면 뒷문 바로 뒤에 있는 공간.
"리돌프라 아가씨 오셨습니까."
그 공간에 줄을 맞춰 일렬로 서있는 일렬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엘프가 아니었다. 어떤 소녀는 토끼 귀를 달고 있었다. 또 어떤 사내는 신체가 비정상 적으로 큰 데다 초록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 어떤 사내는 신장이 원준의 목 밖에 안 되었지만 온 몸이 근육질에 복슬복슬한 수염을 가지고 있었다. 신장도 생김새도 다 다른 그들이지만 한 가지 같은 게 있었다. 다들 목에 펜던트를 걸고 있었다.
"원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대기해주세요. 그들은 다 가문에 소속되어있는 사용인입니다."
역시나 하며 원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낯선 모습들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같은 처지라 생각하니 무언가 측은했다. 그들도 비슷한 느낌인지 원준을 흘끔 쳐다보고는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다. 의외로 이곳이 편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원준은 엘리온에게 인사하고 물러갈라 했다.
"엘린, 왔구나.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다구. 누구와 얘기하는 거야? 엑 인간?"
그러나 난데없이 적색 숏 헤어를 가진 엘프가 오더니 원준을 보고 소리쳤다. 인간이라는 단어가 반 안에 퍼지는 순간 의자에 앉아있던 엘프 전원이 뒤를 돌아봤다. 원준은 말을 잃었고 엘리온도 예상 밖이었는지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리나, 소란스러워요. 이 인간은 제가 고용한 사용인입니다. 이제부터 저와 함께 볼 일이 많을 거예요. 원준 인사하세요. 제 친구 리나 피엔티아에요."
"안녕하십니까. 현원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속사의 선배를 만날 때처럼 원준은 깍듯이 인사했다. 그러나 리나는 원준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엘린, 뭐야, 저번에만 해도 저 인간 없었잖아."
"어제 고용했습니다. 쓸 만한 인간을 보았기에 바로 구입했죠."
"왜 하필 인간이야? 약하잖아. 힘도 약하고, 체력도 없고, 무엇보다 적이잖아."
리나가 열변을 토했다. 엘리온은 눈을 반쯤 감고 리나의 말을 들었다. 귀찮은 표정이었다. 생각해보니 리나의 말은 어제 실비가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리나, 제가 상품을 구입할 때 실수한 적 있나요? 저도 깊이 생각하고 선택한 거랍니다."
엘리온은 다소 차가운 말투로 받아쳤다. 그 서슬에 눌렸는지 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교실 안에 정적과 긴장이 흘렀다.
"그래. 엘린이 그렇다면 뭔가 있겠지. 거기 인간 쓸데없이 놀래켜서 미안. 리리아나 마리안느 드 피엔티아야 엘린의 친구고, 앞으로 잘 부탁해."
리나는 의외로 쉽게 물러났다. 원준에게 경계하는 시선을 거두더니 살갑게 인사했다. 원준은 허리를 굽혀 다시 인사를 했다. 엘리온은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걸 보고는 주변을 수습해 나갔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해요. 제 사용인 원준입니다. 인간이지만 엄연한 저희 리돌프라 가문의 수종입니다. 절대 학우 여러분께 실례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엘리온이 원준에게 슬쩍 눈치를 줬다. 원준은 세 번째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날카로운 시선이 없어지진 않았지만 엘프들은 저마다의 할 일에 돌아갔다. 엘리온은 원준의 등을 살짝 밀며 미소를 보였다.
"원준 수고했어요. 수업이 끝날 때까지 여기에서 대기해주세요."
"네."
엘리온이 고개를 돌려 리나와 함께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어느새 교사가 교탁에 서있었으며 수업이 시작되었다. 원준은 토끼 귀 소녀 옆에서 섰다. 토끼 귀 소녀가 웃으며 인사하기에 원준도 고개를 숙였다. 의외로 이곳에서 잘 버틸 수 있겠다고 원준은 생각했다. 그것이 착각인지도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