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착각이었어.’
원준은 벽에 엉덩이를 붙였다 떼었다 했다. 저 노엘프. 들릴락 말락 하는 크기와 길디 긴 끝 음, 과도한 콧소리까지. 최악의 선생이 틀림없다. 고귀한 귀족님 중 몇 명은 이미 꿈나라로 떠난 상태였다. 잠시나마 이 세계의 학문이 무엇일까 관심을 가진 자신을 패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대체 언제 끝나는 거냐고!’
한 시간이면 애교다. 두 시간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세 시간은 아니지 않는가. 원준은 종아리 뒤를 발로 팡팡 찼다. 근육이 뭉쳤다. 마음 같아서는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사용인 무리 중 흐트러진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바로 옆에 서 있는 토끼귀의 소녀도 멀쩡했다.
"흠흠."
다행히 노엘프는 헛기침을 하더니 책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수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원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엘프들을 피해 엘리온에게 걸어갔다.
"저기, 엘리온.... 아가씨!"
몸이 피곤한 원준은 순간 정신을 놓다가 엘리온의 지긋한 시선을 보고 재빨리 말투를 고쳤다. 옆 자리에 앉은 리나가 의아한 듯 둘을 바라봤다.
"수업 끝나신 건가요?"
"예 원준. 하지만 아직 한 과목 남았어요. 교실은 똑같이 여기랍니다."
원준은 종아리가 쏴 했다. 더 이상 서있을 자신은 없었다. 원준은 주변 교실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앉아서 휴식을 취할 장소는 없었다. 결국 원준은 꾀를 냈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화장실을 가고 싶습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 위치를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화장실요?"
엘리온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이윽고 볼이 살짝 빨개졌다.
"원준, 잘 들으세요. 사용인의 화장실은 건물 내에 없습니다. 저희가 들어온 정문이랑 올라왔던 계단 기억하시는 가요?"
화장실도 다른 것인가. 과연 귀족학교라고 원준은 생각했다.
"그대로 내려가셔서 들어왔던 정문 반대편 문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나가시면 좌측에 풀밭이랑 마구간이 있습니다. 마구간 조금 넘어가면 사용인 전용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곳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길 잃지 않게 조심하세요."
"넵."
원준은 씨익 웃었다.
***
"캬!"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원준은 구르고 또 굴렀다. 밑에는 매끄러운 잔디 위에는 푸른 하늘, 적당히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까지 모든 것이 원준의 마음에 들었다.
화장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뒷문을 나와 좀 걸으니 좌측에 잔디밭 위에 마구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보이는 벽돌 건물이 화장실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화장실 갈 생각은 없었단 말이지.’
원준은 마구간 뒤에 있는 잔디밭에 대 자로 누웠다. 어차피 엘리온은 수업에 집중하느라 적당히 들어가면 늦게 들어온지도 모를 것이다. 혹시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은 길을 잃은 것으로 해둘 것이다. 그럼 만사 해결이었다.
"진짜 괜찮다 여기."
마구간은 원준을 엘프들로부터 숨겨주었다. 뒤에는 건물의 석벽까지 있어 매우 아늑했다. 가끔 엘프들의 말소리가 저 멀리서 들릴 뿐이었다.
‘어, 그러면!’
원준은 옆에 눕혀 놓았던 기타 가방에서 기타를 꺼냈다.
"하루 연습을 쉬면 일주일 뒤로, 일주일 연습을 쉬면 한 달 뒤로, 한 달 연습을 쉬면 일 년 뒤로 돌아간다고 선생님이 그랬지."
원준은 기타를 안고 정좌했다. 의자가 없는 게 아쉬웠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자."
원준은 엄지를 6현에 놔두고 기타 줄을 순서대로 뜯었다. 언제든지 기타연주는 튜닝부터 시작이었다.
‘미 오케이, 라 오케이, 도 샵. 솔 시…… 미 음?’
2현의 튜닝이 나갔다. 그 뒤로 1현도 튜닝이 살짝 풀렸다.
"네 번째 줄은 반음 두 번째 줄은 1/8음 샵, 첫 번째 줄은 1/4음 플랫 인가."
얼마 전에 튜닝을 바꿔서 그런지 튜닝 상태가 생각보다 난잡했다. 이럴 때일수록 선생님은 튜닝기를 사용하라고 하겠지만 아쉽게도 원준은 튜닝기가 없었다.
‘한 번도 틀린 적 없으니까 뭐…….’
원준은 적당히 헤드 머신을 돌렸다. 튜닝기는 항상 연습실에 있는 걸 몰래 가져다 썼다. 그것도 선생님 앞에서만 형식적으로 사용했다. 오히려 나중에 선배들이 튜닝기 대신 자신을 찾은 건 선생님께 차마 말하지 못할 원준의 비밀이었다.
"다 됐구만."
G 코드, Bm 코드, A 코드를 잡으며 튜닝이 잘 된 걸 확인한 원준은 바로 6현 첫 번째 프렛으로 검지를 옮겼다. 보컬은 발성연습, 피아노는 하농, 기타는 크로매틱이다. 운동선수의 푸시업과 같은 중요한 준비운동이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동그라미 10개 그려놓은 거 두 개씩 체크하고 그랬지.’
필요성을 못 느끼면 정말 재미없는 과정이었다. 원준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손은 아픈데 소리는 나지 않고, 메트로놈 소리는 시끄럽고, 여러모로 재미없는 나머지 편법을 썼던 기억이 났다.
‘이제는 하루에 다섯 번씩은 꼭 하지만.’
그래도 예전과 다른 건,
‘내 심박수가 일 분에 70이니, 맞춰서 하면 우리나라 곡 속도와 잘 맞는다.’
이제는 메트로놈을 켜지 않았다. 오직 원준은 눈을 감고 손끝과 심장박동에 집중해서 일정한 속도로 기타 줄을 뜯었다. 선배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너는 튜닝기도 메트로놈도 필요 없는 ‘아날로그 맨’이라고 전기가 없는 곳에서도 어디서든지 음악 할 수 있겠다고. 정말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파, 파#, 솔, 솔#, 라#, 시, 도, 도#’
한 번, 두 번, 원준은 15프렛까지 왔다가 다시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세 번째에 원준은 자신의 심장박동을 반으로 쪼개어 크로매틱 속도를 높였다. 약 140bpm 록음악에 어울리는 속도였다. 그렇게 두 번을 더, 총 다섯 번을 반복한 후 원준은 기타를 내려놓았다. 손끝이 짜릿한 게 기분이 좋았다.
"여유롭네."
원준은 숨을 크게 들이셨다. 공기가 맑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조용한 가운데 바람이 불어 잔디를 사박사박 훑었다.
"어떻게든 되네."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었긴 하지만 자신은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하면서. 티격태격했지만 결국 친해진 알프레드, 묵묵하지만 챙겨주는 프란, 삐죽되지만 유쾌한 실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구해준 엘리온.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흠, 흠"
그러한 감상에 빠지다 보니 원준의 가슴이 벅차 왔다. 그리고 벅찬 가슴은 원준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할까?"
원준은 고개를 돌려 길을 살폈다. 엘프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부르르르르르."
그리고 원준은 입술을 떨어 목을 풀었다. 생각해보니 이곳에 와서 한 번도 노래를 부른 적은 없었다.
"아, 아, 아, 아, 아"
원준은 도, 레, 미, 파, 솔을 기타로 하나하나 집으며 또박또박 발성을 했다. 피아노가 없어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기타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곧 원준은 성대가 적절히 붙는 게 느껴졌다. 원준은 다시 눈을 감았다. 바람이 솔솔 불어 머리카락을 휘감았다. 원준은 G코드를 잡았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의 성, G키의 간결한 멜로디 라인은 가졌지만 아름다운 곡이었다. 미성인 자신의 목소리와 어울렸다.
"마법의 빠진 공주라는 걸."
‘이 곡으로 캐스팅됐었지.’
초등학교 5학년. 학예회 때로 기억했다. 같은 반 친구의 부모님이 기획사 출신으로 원준은 우연찮게 그분께 캐스팅됐다. 그때는 최대한 아름답고 깔끔하게만 불렀는데, 이제는 성대를 조금 띄어 목소리에 숨을 불어 넣었다.
"언제나 너를 향한 눈빛엔."
‘너’는 누구일까. 항상 이 노래를 부를 때는 ‘너’가 누군지 생각했다. 당시에는 딱히 없었다. 이제는 조금 더 가사가 느껴졌다.
"수많은 어려움뿐이지만"
가장 좋은 비브라토는 횡격막의 진동으로 이루어지는 것. 횡격막을 일정하게 떨려면 호흡을 지긋이 내리고 성대 외의 모든 힘을 빼야했다. 담담하고, 부드러운 이곡에 맞게 힘을 빼고 솔직하게 부르면 저절로 생기는 떨림이었다.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생각해보니 많이도 놀랐다. 그렇지만 웃기게도 지금 자신은 가사처럼 자유롭다.
"세상이, 너무나 소중해 함께라면."
그렇다. 축복받게도 이곳에서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원준은 기타를 잠시 내려놓고 먹먹해진 눈을 비볐다.
‘청승맞게 말이야.’
아직 자신은 일류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선생님 왈, 일류는 노래를 부르면서 오늘 저녁밥 메뉴를 생각하는 여유를 갖는다고 하던가. 자신의 감정에 빠져 청중을 생각하지 않는 건 이류라 했다. 머릿속으로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원준은 한 번도 그런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직은 이류인가.’
원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슬슬 일어나야지."
그때,
‘아, 일 났다.’
원준은 혀를 찼다. 예상했어야 했다. 그들이 올 것을……
"야, 너 또 왔어?"
왠지 어깨가 무겁다 했더니, 익숙한 얼굴이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초록색 올빼미. 어느새 여기까지 날라 온 모양이었다.
"너네들도 왔네, 아니, 거기 들어가지 말라니까."
가방속이 익숙한 털 뭉치들이 보였다. 푸른빛이 감도는 꼬리 두 개. 그 토끼들이였다.
"얘들아 정말 나와 주지 않을래?"
귀엽긴 하지만 후에 얼음을 치우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특히 얼음을 제거 못해 기타위에 물이라도 찬다면 최악이었다.
원준은 혀를 차며 가방을 끌어왔다. 이 얘들이 엘리온이 말하는 그 상급 정령인 걸까? 하긴 어떻게 보아도 평범한 동물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생의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의 위엄을 갖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때,
"한 번 더. 한 번 더!“
신비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왓!"
원준은 뒤로 넘어갈 뻔한 걸 간신히 팔로 버텼다. 이상한 생물이 자신이 코앞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코앞에서 날고 있었다. 엘프를 축소해 놓은 모습이랄까? 다만, 엘프들과 다르다고 하면,
“날개?”
신비한 존재는 등 쪽에 투명한 날개를 달고 있었다.
"좋아, 좋아!"
신비한 존재는 원준의 얼굴을 빙글빙글 돌더니 올빼미 어깨 위에 올라탔다.
“너도 왔어! 왔어?”
그러고는 올빼미에게 인사하는 신비한 존재. 올빼미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안녕?“
"안녕, 안녕!"
원준은 힘을 내어 신비한 존재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신비한 존재도 웃으며 원준에게 인사했다. 그 천진난만한 웃음에 원준은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괜찮았어?"
"좋아, 좋아!"
신비한 존재가 열심히 소리쳤다.
"이름이 뭐니?"
"이름, 이름!"
신비한 존재는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자그마한 얼굴을 갸웃거렸다. 그 모습은 상당히 사랑스러웠다.
"우리, 우리! 애쉬 님, 애쉬 님,"
신비한 존재는 제잘 제잘 말을 이어갔다.
"불러, 불러! 픽시, 픽시!"
애쉬 님 이라는 소리에 원준은 문득 측은함을 느꼈다. 이 조그만 픽시도 자신처럼 누군가의 노예라 생각한 것이었다.
"이거 먹을래?"
원준은 주머니에서 과자 봉투를 꺼냈다. 아침을 먹고 난 이후에 프란이 만들어 놓은 걸 조금 싸온 것이었다. 이세계로 갑자기 오고 난 이후 원준은 여분의 식량을 싸놓는 게 습관이 되었다.
"먹을래, 먹을래!"
원준은 과자를 반으로 부셔서 픽시에게 주었다. 나머지 반은 왼쪽 어깨에 있는 올빼미에게, 그리고 하나 더 꺼내어 토끼들에게 건넸다. 토끼들은 드디어 가방에서 나왔다.
"그럼 한곡 더 해볼까?"
티타임에는 음악이 있어야한다. 후에 가수로 성공하면 카페에서 조용히 연주해보는 것도 꿈이었다.
"좋아, 좋아!"
"아 참, 나는 원준, 잘 부탁해."
원준은 무심코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이 존재는 손이 작다는 것을.
"원준, 원준!"
하지만 픽시는 오히려 얼굴에 활기를 뛰면서 원준의 검지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러고는,
"왁!"
원준의 검지 끝에 살짝 입맞춤했다.
원준은 소스라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주 조그맣지만 형용할 수 없는 부드러운 물체가 손끝에 닿았다. 픽시는 넘어진 원준을 동그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 그럼 한 곡 더 들어줄래?"
"좋아, 좋아!"
픽시가 소리쳤다.
"그... 그럼 흠, 흠."
원준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풀었다. 이런 존재들이 종족을 떠나서 자신의 노래를 좋아해 준다는 게 너무 고마웠다. 원준은 미소를 지으면 기타 위에 손을 얹었다. 오늘도 즐거운 날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동물들이 달아났다.
"너 뭐하냐?"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