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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병자
작가 : 자전거탄구름
작품등록일 : 20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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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먹는 동굴 -3-
작성일 : 18-03-09     조회 : 248     추천 : 0     분량 : 2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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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빛이 병자의 주름진 손을 비추었다. 반지의 보석은 어둠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났다. 그 빛에 병자가 눈썹을 찌푸렸다. 병자는 휙휙 손을 흔들더니 반지를 빼고선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러자 반지는 천천히 빛을 잃었다.

 

 빛이 사라지자 동굴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병자는 어둠 속에서 머리를 더듬거렸다.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이 손을 통해 느껴졌다. 그대로 옆으로 천천히 더듬으니 이번엔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곧게 뻗은 마른나무 같은 것이었다.

 

 ……뿔은 떨어져 나갔구나, 병자는 터덜터덜 걸어가며 생각했다. 그리곤 가슴팍을 매만지며 헝겊의 상태를 확인했다. 병자의 몸에 칭칭 두른 헝겊은 피와 고름을 짙게 머금고 있었다. 헝겊은 상처를 단단히 압박해 놓고 있었음에도 병자가 몸을 조금 틀자 바짓단까지 피가 배어들었다.

 

 그 용태를 확인하자 병자는 잠시 침묵했다. 입안에서 칼칼한 쇳기가 도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가 걷는 것을 멈추진 않았다. 오늘도 그가 가야만 하는 곳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걸음을 옮겼다.

 

 

 

 부글부글 물이 끓었다. 소녀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침을 꿀꺽 삼켰다. 충분히 익은 고기가 물 위를 둥둥 떠다녔고, 그 위로 소스를 풀기 시작하자 고소하고 맛 좋은 냄새가 풍겼다.

 

 병자는 소녀를 잠깐 훑어봤다. 소녀는 몸을 웅크린 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냄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많이 배고프겠지, 병자는 생각하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소녀 앞으로 나무그릇 하나를 내밀었다. 은은하게 김이 올라오는 것이 제법 먹음직해 보였다.

 

 “……아.” 소녀는 눈 앞의 음식을 보곤 작게 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우물쭈물 몸을 배배 꼬더니 다시 웅크린 채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병자는 턱을 매만지며 작게 신음했다. 배고프지 않은 건가, 아니면 음식이 마음에 차지 않은 걸까?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평소보다 음식을 조금 많이 만든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저 계집만을 위해 만든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하는 수 없이 남은 음식을 입 속에 털어넣으며 병자가 냄비를 비우려던 때였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꼬르륵.

 

 문득 손이 멈췄다. 슬그머니 소리가 들린 구석 쪽을 곁눈질하니 소녀가 움찔, 하고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어째선지 귀도 좀 발그스름했다. ……역시 배가 고픈 게로군, 병자는 생각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면 왜 안 먹는 걸까, 저 인간 계집의 입맛엔 맞지 않는 건가? 역시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병자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어쩌면 자신이 여기 있는 게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병자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무섭게 생긴 괴물이 옆에 있으니 밥맛도 떨어질 만하겠다, 병자는 흠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병자는 벽을 짚고 일어서서는 자리를 비켜주기로 하였다. 식량고는 찾아놓아 당분간 먹거리엔 걱정이 없겠으나 산적들이 숨겨놓은 것들이 아직 좀더 있을 터였다. 그 산적들의 규모도 작은 편이 아니었으니 저 계집에게 뭔가 입힐만한 옷가지도 있을지 모른다. 아무래도 저 누더기론 밖에 나가는 것도 생활하기도 불편할 테니까.

 

 흘깃 구석을 보니 소녀는 아직도 웅크린 채 가만히 있었다. 일단 혼자 둬도 괜찮겠다 싶어, 병자는 문짝 대신 쳐둔 천막을 빠져나왔다.

 

 동굴은 한적하고 꽤 널찍했다. 어디선가 퀴퀴한 시체냄새가 났고, 여기저기 나무문짝으로 가려둔 방 같은 곳이 눈에 띄었다. 주변은 어두웠다. 하지만 병자에겐 낮 못지않게 훤히 다 보였다. 몸 하나 성한 곳이 없었지만 넘어질 걱정은 없었다.

 

 병자는 한참을 거닐었다. 널찍한 광장 같은 곳을 빠져나오자 동굴은 미로같이 길이 꼬여 있어, 자칫하면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곳곳에 있는 문짝 뒤도 살펴보았지만 산적들이 사용했던 침소만 있을 뿐 딱히 이렇다 할 물건을 찾진 못했다. 그러던 때였다.

 

 빛이 보였다. 저 멀리 작지만 희끄무레한 붉은 점이 흔들렸다. 그 점은 아주 미세하게, 그리고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병자는 알 수 있었다. 횃불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병자는 잘 알았다. 토벌대구나, 병자는 생각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머릿수는 많아 보이진 않았다. 기껏해야 둘 정도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버거워 보였다.

 

 “……도망칠 수 있을까?” 병자가 웅얼웅얼 말했다.

 

 병자는 염증으로 곪아터진 가슴팍과 왼다리를 보았다. 이제 곳 썩어 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병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힘들겠지, 그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 많은 힘을 썼어.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을 잃었어. 이젠 하나 남은 목숨마저 바스러질 차례구나…….

 

 병자는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잠시 뿐이었다.

 

 아니, 혹시 쫓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병자가 땅을 짚고 일어섰다.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했지만 그는 꿋꿋이 일어섰다. 그래, 나는 그 많던 산적들도 잡아냈어. 저까짓 사람 두 명은 쫓아낼 수 있어. 아니, 쫓아내고 말겠어.

 

 병자는 걸었다. 아픈 다리를 질질 끌었다. 빛은 가까워져 왔다. 형체들이 뚜렷해져 갔다. 피 냄새와 사람냄새가 짙어졌고, 저기에 토벌대가 보였다. 노인과 소년이었다. 아직은 먼 거리였지만 병자는 알 수 있었다.

 

 해내겠다. 반드시.

 

 병자가 조용히 말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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