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 누구세요?”
이곳에 빙의한 날, 그때 처음으로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혼란스러워하는 여진에게 풍성한 수염이 난 남자와 인상이 좋아 보이는 갈색 머리의 여자가 친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리온, 우린 너의 가족이잖니.”
가족이라는 말에 그녀는 놀란 토끼 눈을 뜨고 껌뻑거렸다. 내 기억상 나는 이런 외국인 부모님이 없는데. 그리고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저…. 그럼 여기가 어디….”
“아슈탓트 제국의 북쪽 지방의 린제스 마을이란다.”
아슈탓트 제국의-.
여진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얼어 붙어버렸다. 아슈탓트 제국이라니. 여진에게 익숙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바로 그녀가 읽던 소설에 등장하는 제국의 이름과 정확히 똑같았으니까.
신이 인간들에게 노하였는지 제국에 한 줌의 비도 내리지 않던 때였다. 변방의 시골 귀족 가문인 글로리아 남작가는 흉년으로 인해 생긴 산더미 같은 빚 때문에 점점 살림이 곤궁해 져갔다. 영지는 이미 팔아 치운 지 오래였고 그나마 남아있는 허름한 저택마저도 경매에 넘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떤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지 않으면 길바닥에 앉아야 할 신세가 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이 가난한 가문의 딸이 주인공인 릴리아나였다. 가족들이 어렵게 생활하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그녀는 어떻게 하면 빚을 갚을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남작에게 말했다.
“제가 황성의 시녀로 갈게요. 그곳에서 일하면 우리 가족 배는 곯지 않게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시녀로 들어가 평생을 황성에서 보내는 대신, 빚을 전부 갚을 만큼의 커다란 돈을 받고 가문을 지키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황성에 들어가게 된 릴리아나는 그곳에서 만난 1 황자 크리스와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여느 소설이 그렇듯 행복할 것만 같던 주인공들에게는 스토리의 고조를 위한 위기가 닥치게 된다.
황제가 노쇠하며 숨을 거두자, 황위를 노리던 2 황자가 자신이 가진 ‘신수’를 내세워 세력을 모으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크리스는 남자주인공답게 큰 어려움 없이 승리를 거머쥔다. 그리고 그는 성녀를 불러와 감히 황위를 넘본 반역자의 ‘신수’를 봉인하고 후환이 없도록 처형해버린다.
황제가 된 크리스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릴리아나는 황후가 되어서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는 게 여진이 읽은 소설의 내용이었다.
‘여기가 소설 속이라면 나는 누구에게 빙의 한 거지?’
아까 세리온이라고 불렸던 것을 기억해 냈지만, 여진의 기억 속에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세리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없었다. 적어도 조연에게 빙의했다면 몰라 그녀는 생뚱맞게도 등장인물들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이의 몸에 들어왔다.
한편, 세리온을 걱정스럽게 여기던 두 부모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소중한 제 딸이 아침에 발작 같은 걸 일으키더니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도 했지만 강인한 어머니 안나는 오히려 딸이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침착하게 굴었다. 그녀는 긴장한 채로 굳어있는 세리온을 따뜻하게 끌어안으며 진심을 담아 말해주었다.
“오, 이런 아가. 걱정하지 말렴. 지금은 잠시 혼란스러워도 곧 기억을 찾게 될 거야.”
***
한 달 정도 지나자, 여진은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건지 완전히 이해했다. 그녀는 처음 생각해냈던 대로, 소설 속에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에 빙의했다. 이름은 세리온. 평민이라서 성은 없다. 이제 막 10살이 된 어린 소녀로 사소한 것에도 감사함을 느끼는 순수한 아이였다.
그녀의 가족들은 성실하고 인자한 성격을 가진 아버지 존, 언제나 따뜻한 말을 건네며 그 자체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는 어머니 안나, 그리고 종종 짓궂은 장난을 치는 말썽꾸러기지만 사실은 속이 깊고 여린 남동생 로빈, 그리고 세리온 그녀 자신까지 총 네 명이었다.
소설 속으로 들어온 이후,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살게 되었지만 별 어려움 없이 세리온에게 녹아들 수 있었던 건 가족들의 덕이 컸다. 모든 기억이 없어 백지나 다름없는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고 되레 더 친밀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변두리 시골 마을에서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세리온의 식구는 가난했지만, 누구보다도 서로를 아껴주며 화목하게 살았다.
“세리온, 우유가 더 필요하니? 따라줄까?”
“아니에요. 이제 배불러서 더 안 먹어도 돼요, 잘 먹었습니다.”
세리온은 식기를 정리하면서 기분이 좋은 듯 방실방실 웃었다. 잠시 후 안나가 빨래를 널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세리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며 옆에 있던 동생 로빈에게 귓속말을 했다,
“나 오늘 언덕으로 갈 거야.”
“왜?”
로빈은 달걀 스크램블을 우물우물 씹으며 물었다.
“오늘 엄마 생신이잖아. 꽃을 꺾어다 선물을 해드리려고.”
신기하게도 누이가 꺾어오는 꽃들은 잘 시들지 않고 오랫동안 활짝 피어있었기 때문에 가끔은 팔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로빈은 별생각 없이 그녀에게 잘 다녀오란 말을 하며 배웅해주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언덕에 올라간 세리온은 제일 예쁘고 색의 조화가 잘 어울리는 꽃만 엄선해 한 묶음의 꽃다발을 만들었다. 다 만들고 나니 마침 따사롭게 내리는 햇살이 걸렸다. 꽃향기에 취해서인지 충동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푹신푹신한 풀밭 위에 털썩 몸을 눕혔다. 잔디의 촉감이 등에 닿자마자 나른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고, 곧 그녀는 빠져들 듯 잠이 들었다.
.
.
.
―죄인에게 하나만 묻겠다.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뭐지?
화려한 붉은 망토를 두른 황제가 만신창이 꼴로 널브러져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터진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삼키며 실소를 터트렸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웃음을 되찾아주기 위해.
황제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단호히 말했다.
―뭔가 단단히 잘못 알고 있군. 너로 인해 웃음이 아니라 눈물을 흘린 자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정말, 그런가?
남자가 고개를 들어 황제를 올려다보자, 생기를 잃었던 녹색 눈동자가 대답을 구하는 듯 번뜩 빛이 나다가 사라졌다. 황제가 마주했던 그 눈빛은 맹수의 것이었다. 아직도 그럴 힘이 남아있었나. 조급해진 황제는 애써 위압감을 떨쳐내며 사형 집행인에게 손짓했다.
철컥. 남자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도록 결박됐다. 그의 머리 위에 묶여있는 시퍼런 단두대의 날이 금방이라도 목을 벨 것처럼 예리했다.
―진실을 외면할 셈이라면 내가 말해주지. 너희들이 그렇게 추종해 마다하지 않던, 신의 선물이라 불리던 ‘플로스’는-.
황제는 분개하며 남자를 향해 말했다.
―이런, 더 들어줄 가치도 없군. 집행해라!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지탱하던 밧줄이 끊어졌다.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않고 허망하게 끝이 났다.
멀리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관중들은 악이 처단된 것을 보고 크게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만세! 신수의 보살핌을 받는 아슈탓트 제국 만세!
.
.
.
“허억!”
세리온은 급히 숨을 헐떡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 흘린 건지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있었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은 눈물이 자꾸만 왈칵왈칵 쏟아져나왔다.
황제. 단두대 처형식. 환호하는 백성들. 처참한 몰골이던 남자의 녹안…….
세리온은 불현듯 꿈속에서 본 것이 소설의 한 장면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신수를 봉인 당해 힘을 모두 잃은 2 황자. 레오 린드하르트 아슈탓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째서…….”
눈앞에서 지켜본 듯 생생했던 처형장의 광경에 의문을 느꼈다.
게다가 분명 자신과 관련 없는 일임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 들어왔다. 그 눈물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멈췄다.
***
세리온이 꿈속을 헤맬 때쯤, 낯선 이방인 두 명이 마을에 들어섰다.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던 두 사람은 정보를 얻기 위해 한 허름한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적포도주와 에일을 주문했다.
“이 마을은 확실하겠지?”
“네, 분명 여기가 대 신관님께서 말씀해주신 지역 중 마지막 마을입니다.”
하일러는 적포도주를 들이켜며 불만 섞인 말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은 이런 임무를 맡고 있어야 할 게 아니라 지금쯤 황성에서 떵떵거리며 편하게 지냈을 것이라. 또다시 시작된 하일러의 불평에 루카스는 조용히 웃어주며 능숙하게 대처했다. 같은 가사였지만, 공작가의 자제인 하일러와 루카스 사이에는 암묵적인 계급이 존재했으므로 어느 정도 비위를 맞춰주는 게 현명했다.
잔을 거의 다 비웠을 때쯤, 그들은 주인장을 불러 금화 한 닢으로 값을 치르며 넌지시 물었다.
“이 마을에는 10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몇 명이나 되는가?”
생전 처음 보는 어마어마한 액수에 눈이 휘둥그레진 주인장은 의심하지 않고 순순히 답했다. 인구가 워낙 적은 마을이라 어린아이들은 스무 명 정도 된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방대한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난 다음 대의 성녀. 그들이 찾고 있는 사람이었다. 손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성녀는 예상보다 꼭꼭 숨어있었다. 몇 달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고된 여정을 보내온 하일러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있어서 하루빨리 성녀를 찾아 복귀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번에도 없습니다.”
루카스는 마지막 아이를 살펴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성녀의 고결한 신성력이 기사인 그들의 눈에 비치지 않을 리가 없었는데 마을의 모든 아이를 만나봤지만 그런 낌새는 보이지도 않았다.
하일러는 참다못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광장의 가판대 하나를 부수고 나서야 마을을 벗어났다. 그들이 말을 타고 근방에 또 다른 마을이 있는지 확인하려 언덕에 다다랐을 때, 하일러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시계를 식당에 두고 온 것이 떠올랐다. 그는 루카스를 시켜 시계를 가지고 오게 했고 루카스는 군말 없이 식당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목을 축이고 앉아있던 하일러의 눈에 한 소녀가 들어왔다. 소녀의 주변을 맴도는 푸르스름한 빛은 신성력이 분명했다. 그는 환희에 젖어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소름 끼치게 웃으며 눈물을 닦고 있던 소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얼마 뒤에 시계를 챙겨 되돌아온 루카스는 말 위에 올려진 밀 포대 크기의 자루를 보고 의아해했다.
“이게 뭡니까?”
하일러가 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성녀를 찾았어.”
그 말을 들은 순간 루카스는 시계를 떨어뜨릴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자세히 보니 자루는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네가 딱 마을로 돌아가고 얼마 안 돼서 언덕에 있는 게 보이더라고. 공손하게 대하려 했는데 고작 평민인 주제에 반항이 너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묶어서 잡느라고 급한 대로 자루에 담았지.”
하일러는 뻔뻔스럽게도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루를 가리켰다. 루카스는 시계를 대충 그에게 넘기고 자루 안을 들춰보았다. 그 안에는 눈이 반쯤 풀린듯한 어린 소녀가 입과 속이 구속된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이의 부모님에겐 말하지 않는 겁니까?”
“허, 그런 거 할 시간이 어딨어. 어차피 이런 가난한 평민 아이 하나쯤은 없어져도 아무도 몰라.”
하일러는 어서 빨리 복귀하자며 말이 없어진 루카스를 재촉했다. 루카스의 속은 분노로 들끓었지만 한미한 자작 가문의 영식이던 그에게 공작가와 척을 지게 될 목소리를 낼 힘은 없었다.
“……네.”
한참 뒤에 그가 뱉은 대답이었다. 죄책감으로 속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그런다 한들 이 소녀를 저 허영심만 가득한 멍청한 귀족으로부터 구할 방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