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스에 대해 아십니까?”
키프로스라! 그리운 이름이지요.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지만, 참으로 인상적인 나라였소. 정말이지, 그런 나라도 있구나, 싶었지. 아, 술 좀 건네주시겠소? 옛날 얘기에 술이 빠질 순 없지.
캬하아! 럼주 맛이 아주 끝내주는군. 내가 키프로스에 가본 건…… 가만 있자, 음……. 잘 기억이 안 나는구려. 워낙 옛날 얘기라서 말이오. 에에, 내가 한창 무일푼으로 상행을 나서던 시절이니까, 한 삼십 년쯤 됐으려나? 맨손으로 장사를 하려니 빚 내고 여기서 좀 사고 저기서 파는 식으로 푼돈을 버는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지. 그때만 생각하면 아주 치가 떨려, 치가. 럼주 한 병 더 없소?
아하, 고맙소이다. 어여쁜 아가씨가 참으로 친절하시군. 내 언젠가 당신에겐 크게 한 턱 쏘겠소. 내 얘기를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렇지, 그렇지. 그런 생활에 넌덜머리를 내던 때였소. 조합에서 커다란 상단을 어딘가로 보내려는데, 웃돈을 준다고 해도 아무도 책임자 자리를 맡으려 하지 않더이다. 한창 돈에 미쳐 있던 나야 듣자마자 덥석 그 자리를 낚아챘지만!
헛허, 금액만 듣고 하겠다 한 게 문제였지. 그 상단이 괴물이 득실거리는 올드킹덤(Old Kingdom), 그것도 오크와 전쟁 중인 키프로스에 간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외다.
다들 오해하는 거지만, 오크들은 그리 미개한 족속이 아니오. 흠, 뭐랄까…… 키프로스 사람과 비슷하오. 명예를 숭상하고, 용맹함을 미덕으로 보지. 어쩌면 키프로스 사람이 오크와 비슷한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간에, 그런 족속들이라 설사 인간들과 전쟁 중이라도 저항하지 않는 인간을 죽이진 않소. 하지만 그 사실에는 까막했던 우린 거의 초주검 상태였지. 상단 사람들은 둘만 모이면 이런 소리를 하고 다녔소. 오크들은 인간을 잡으면 살가죽을 벗겨서 끌고 다닌다더라, 머리부터 통째로 씹어 먹는다더라, 더라, 더라……. 아아, 정말이지, 개판 오분 전이더이다.
우여곡절 끝에 출발은 하는데 이건 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꼴이오. 가기 싫어 발을 질질 끄는 건 예사요, 이동 중에 오크들이 습격할까봐 눈깔 굴리는 놈이 태반이었지. 밥 먹을 땐 어떻고? 앉아서 먹는 사람이 드물 지경이었소. 까딱 큰 소리라도 났다 치면 열 사람 백 사람이 놀라 자빠지기도 했지. 나야 책임자니 겉으로는 요만큼도 내색 안 했지만!
천운이 따른 건지 수도로 가는 내내 오크와 충돌할 일은 없었소. 그때가…… 무슨 사찰에서 훈련한 기사들이 투입된 시기였다나? 덕분에 숨 가쁘게 변해가던 전황이 서로 눈치만 보던 고착 상태에 접어들었다더군.
“여래사(黎崍寺).”
응?
“그 사찰 이름.”
아아아! 그렇군! 그렇지. 고맙소이다. 나이가 들긴 들었나보오. 듣자니 강한 기사를 많이 배출한 사원이라던데, 그런 곳의 이름을 까먹다니. 이거야 원, 나도 이제 은퇴할 때가 됐나.
아무튼간 덕분에 우린 무사히 수도로 도착해서 짭짤하게 벌었소. 알랑가 모르겠지만 키프로스의 무기와 공예품은 내 단언컨대 대륙 최고요. 무기는 신화 속의 용이라도 때려잡을만 하고, 공예품은 소유주를 죽여서라도 얻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지. 제국에서 그것들을 팔면 다섯 배, 여섯 배의 이득은 거뜬하오. 목숨값이라 할 만 하지.
그런데 말이오, 으흠, 이건 비밀인데……. 어디 가서 이 얘기 하지 말아주시오. 오케이? 오케이. 좋소. 돌아오는 도중 든 생각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타산이 안 맞더라 이거야. 이 상품을 팔아 대여섯 배 이득을 얻어도, 조합에서 떼먹고 인건비로 떼먹으면 내게 남는 게 뭐가 있겠소. 안 그래?
그래서 궁리를 했지. 돈을 더 버는 방법이 없을까? 그러다가…… 정말 기가 막힌 사업이 생각난 거요!
바로 오크와 거래하는 거지. 그 치들에게 필요한 게 뭐겠소? 무기나 약초지. 거래 못할 이유? 난 제국인이고 오크는 지성이 있다. 못할 이유가 어딨어? 하면 그만이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식으로 오크와 거래하는 사람이 꽤 있더구려. 그래서인지 오크도 전리품으로 딴 건 버려도 거래를 할 보석 같은 건 많이들 챙겨놓는 편이었고.
어, 에…… 그래서…… 흠, 그렇소. 제국에서 가져온 상품은 몽땅 보석으로 바꾸고 제국으로 돌아와 물건을 팔았지. 음, 그렇지. 그래.
“당시 많은 제국인이 키프로스와 거래했다 들었소.”
그랬소. 뭐 어때? 생판 남인걸. 그것도 먼 옛날에 추방된 이교도들 따위, 내 알 바 아니잖소?
“제국이 키프로스와 전쟁 중이었는데도.”
…….
“제국인 밀수범 중 하나는 호위병으로 하여금 키프로스군을 가장하여 오크를 습격하고, 오크의 재산을 받는 대가로 그들에게 ‘범인’을 알려주었어. 억울하게 누명을 쓴 한 영주는 그 일가가 몰살당했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섰다. 허리춤에 칼을 찬 이들이 다가왔지만,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제 말을 계속했다.
“그 사건 때문에 협상 국면이던 오크와 키프로스는 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앙금은 벌어질 대로 벌어져 지금에 이르렀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실이지 않나? 데카드 남작.”
여인 앞에 앉아 있던 상인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하였다.
“누구냐, 넌?”‘
여인은 말하였다.
“네가 몰살시킨 그 영주에겐 딸이 있었어. 영지가 불타기 전날 태어난, 한 아버지의 보석이었지. 영주는 자신의 수호 기사로 하여금 딸을 탈출시키게 했어. 기사는 여래사로 도망쳤고, 영주의 딸은 그곳에서 무술을 배웠지.”
녹색 후드 아래로 순찰자의 푸른 눈이 드러났다.
“이래도 날 모른다고 할 텐가, 데카드?”
강철의 송곳니들이 여인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양귀비빛 화염은 밤을 낮처럼 밝히고, 지표면을 뒤덮는 불그림자는 환영처럼 춤을 추었다. 그 위로 달빛이 내려앉자 한여름밤의 모닥불처럼 낭만적이게 보인다.
비극의 당사자를 제외하고.
가신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찢기고, 베이고, 터져 목숨이 경각에 이러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시던 주신의 혈육을 꽉 안은 채, 피눈물이 흐르는 외눈으로 불길 아래 사라지는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주군과 친구들을 삼킨 화염. 그 위로 시커먼 연기가 뱀혓바닥처럼 쉭쉭대며 하늘로 올라갔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들의 영혼도 저 연기에 섞여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먼훗날 다시 그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저도 모르게 이교의 믿음을 떠올린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그 서슬에 놀란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실책을 떠올린 그가 황급히 아기를 달래려는 순간 날카로운 고함이 그의 귀를 때렸다.
“거기냐!”
동시에 들려오는 쿵쿵대는 소리와 오크 특유의 거친 숨소리에 가신은 이를 꽉 깨물었다.
말 한 필로 오크 전사에게서 달아날 수 있는 확률? 차라리 산에서 만난 곰을 맨발로 따돌리는 게 낫다. 구차하게 도망치다가 비참하게 죽을 바에야, 차라리 지금 말에서 내려 싸우자. 명예를 지키고, 주군과 동료들의 뒤를 따르자…….
“이랴!”
단호한 음성이 입김과 함께 허공에 흩어졌다. 그와 함께 옆구리를 채인 말이 앞으로 휙 튀어나갔다. 난데없는 상황에 잠시 당황해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그 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내 깨달았다. 죽음이 두려워서건,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건, ‘그’가 ‘도주’를 선택했다는 것을.
그렇다면 이미 쏘아진 화살. 전력을 다해 도망가는 수밖에. 그는 왼손으론 주인의 딸을 끌어안고, 오른손으론 고삐를 꽉 쥔 채 연신 말에게 박차를 가했다. 급박한 말발굽 뒤로 사나운 발걸음이 뒤따랐다.
대부분의 절이 으레 그렇듯 여래사(黎崍寺) 또한 높고 험난한 산의 정상 무렵에 위치해 있었다. 때문에 주변이 희게 물드는 계절이 오면 드문드문 오던 방문자마저 끊기고 무승과 기사들도 훈련을 멈추어 사찰은 온통 적막하다.
그렇기에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토록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쿵쿵쿵!
“예, 나가요!”
벌써 세 번을 울리는 소리에 마당을 쓸던 행자(예비 스님)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젠장, 어떤 시주인지는 몰라도 성질 한 번 급하구만. 기다리면 알아서 열어줄 것을. 속으로 투덜댄 행자는 걸쇠를 내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쓰러지듯 문턱을 넘어왔다. 얼결에 그것을 받아낸 행자가 놀라 말했다.
“아니, 시주……. 괜찮으시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사내의 숨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가쁘게 쉬고 있었고, 한쪽 팔과 다리는 비이상적으로 꺾여 있었다. 그리고 검고 붉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색이 이상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본디 다른 색의 옷이 피로 물든 것이었다.
“이봐! 거기 누구 없나? 스님들을 모셔와. 빨리!”
보다 못한 행자가 안쪽으로 뛰어가려던 참이었다. 어깨를 움켜쥐는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란 행자가 사내를 돌아보았다. 시체 같은 몰골을 한 사내가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앤더슨을 데려와……. 당장!”
“어디 뭐, 일기토 상대라도 찾으시나? 뭔데 절간에서 개새끼 짖는 꼴로 남의 이름을 찍찍 불러 싸?”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행자가 허리를 숙였다.
“앤더슨 경.”
앤더슨이라 불린, 등에 활을 매고 유들유들하게 생긴 호남형의 남자는 행자에게 손을 휘저으며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다소 적대적인 시선으로.
“응? 가예고 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실까? 전신에 깍두기 국물을 철철 흘리면서, 한겨울에 절간 문은 왜…….”
“헛소리 집어치워.”
“헛소리! ……나 참, 성질머리 하곤. 알았다, 알았어. 까짓거 성질 맞춰준다. 뭔 일인데?”
가예고의 손이 앤더슨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움찔하는 앤더슨에게 가예고가 내뱉듯 말했다.
“습격이다.”
앤더슨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습격? 누가, 언제, 어디서?”
더 이상 참지 못한 가예고가 버럭 소리쳤다.
“오크들이 블랙우드를 습격했단 말이다! 이럴 시간이…….” 소리를 지르던 가예고의 몸이 휙 올라갔다. 한 팔로 건장한 그의 멱살을 잡아 올린 앤더슨이, 웃음기를 싹 지우고 가예고를 노려보았다.
“다시 말해. 어디가 습격당했다고?”
“늦었어. 상황 다 끝났더군. 생존자는커녕 시체도 못 찾았어. 그냥 불이 아니라 주술로 피운 불이라 하시더라. 아예 작정하고 공격한 모양이야.”
“놈들은?”
“줄행랑 친지 오래. 발자국을 보니 전부 늑대를 타고 왔어. 덕분에 어느 부족인지도 알 도리가 없고.”
“그딴 건 알 바 아냐.”
앤더슨이 싸늘하게 상대의 말을 끊었다. 잠깐의 침묵 후, 그와 대화하던 여자가 말했다.
“그래, 그딴 건 알 바 아니지.”
“그치?”
“넌? 어쩔 건데?”
“뭘 어째.”
앤더슨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파이팅!”
“……그래. 알았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 한숨을 내쉬는 앤더슨에게, 침대에 누워있던 가예고가 입을 열었다.
“또 침묵하는 거냐.”
“흥, 개가 뭘 안다고 지껄여.”
비아냥거리는 투의 말이었지만 자조적인 목소리 탓에 처량해 보였다.
“남기신 말은 없나? 그리고, 남길 말은?”
“아가씨를 잘 돌봐달라 하셨다. 귀족들에게 이용당하는 일이 없도록.”
“아가씨라.”
앤더슨은 가예고 옆에 곤히 잠든 아기를 흘끗 보았다.
“이름은?”
“아리엘.”
“아리엘. 그러지. 남길 말은?”
파핫, 가예고가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죽은 놈 취급이군.”
“그럼, 그 꼴을 하고 살 거라 생각했나?”
“아니. 남길 말은 없다. 주인을 지키지 못한 기사가 무슨 말을 하겠나. 가주님에게 죄송한 뿐……. 아, 행자님께 무례해서 죄송했다고 전해주게.”
“그래.”
포대기에 싸인 아리엘을 들어올린 앤더슨이 말했다.
“잘 자라, 기사.”
훅, 방 안을 밝히던 촛불이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