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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순찰자
작가 : 이현주s
작품등록일 : 20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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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작성일 : 18-10-11     조회 : 350     추천 : 0     분량 : 6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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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년 뒤, 봄.

 

 여래사의 봄은 바쁘기 그지없다. 스님들은 수행과 더불어 씨 뿌리기에 여념이 없고, 수련 기사들은 겨우내 미뤄둔 수련에 열중한다. 언제나 똑같았던 이 일상은, 어쩐지 다른 때와 달리 사람들의 얼굴에 여유가 없다.

 

 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진 탓이다.

 

 8년 전, 오크들이 블랙우드를 습격한 뒤 인간과 오크간의 전쟁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에는 전투를 하더라도 비무장한 이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전쟁은 군인과 전사들의 것.’ 이것이 서로간의 공멸을 피하기 위한 두 종족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건 이후 두 종족의 약속은 깨졌고, 전화(戰火)는 민간인들을 덮쳤다.

 

 서로가 서로에게 잔인해질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애초에 열세였던 키프로스였다. 잘 훈련되고 중무장한 키프로스 병사 열이 오크 전사 하나를 겨우 상대한다. 그나마 전장이 한정돼 있을 땐 전략과 전술로 열세를 메웠지만 이젠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키프로스의 적은 서쪽의 오크들만이 아니었다. 백 년 전 그들을 지금 그들이 정착하고 있는, 옛 신성 제국의 땅으로 추방시킨 페스투카 제국 또한 오랜 숙적이다. 이제까지 제국은 십여 명 규모의 분견대 수백 개를 파견해 키프로스 각지를 노략질하는 데 그쳤으나, 최근에는 그 분견대들이 모두 모여 키프로스의 성들을 공략하고 있다. 각종 마법 장비와 능수능란한 전략전술로 중무장한 제국군은 오히려 오크보다도 위험한 상대다.

 

 “요런 상황일수록 절의 역할은 매우. 아주. 몹-시! 중요해지지. 왜? 이런 상황일수록 사람이 많이 죽고, 사람이 많이 죽으면 기술 유실될 확률은 점점 늘어나니까. 그리고 절이 기술 기록과 전수를 맡고 있으니까!”

 

 원래 ‘윤교(輪敎)’가 그런 것을 하던 건 아니었다. 백 년 전 페스투카 제국에서 추방된 종교들이 으레 그렇듯 윤교도 일부 사람들이나 믿는 종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윤교가 키프로스라는, 개척 국가인 데다 전쟁 중이라 언제 망할지 모르지만 어엿한 한 나라의 국교가 될 수 있었던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아, 이건 학교에서 배워. 둘째, 이게 핵심이지. 윤교가 자청해서 도서의 보관과 관리, 전투 기술을 포함한 각종 기술들을 맡아서야. 젠장, 내가 무슨 선생님도 아니고, 앵무새도 아닌데, 이런 걸 계속 말해줘야 하냐?”

 

 인간에게 쓸모를 증명한 개는 살아남고, 교활한 여우는 죽임을 당한다. 이렇듯 스스로 쓸모를 증명한 종교는 살아남는다. 수많은 종교들의 아귀다툼 속에서 살아남은 윤교는 명맥을 유지하였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명맥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키프로스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국교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했다.

 

 “알겠지? 기술 전수가 무지무지 중요하다는 거. 그리고 요즘 같은 땐 엄청엄청 바쁘다는 거.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절간에서 소란을 피우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얌전히 말을 듣고 있던 꼬마아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개새끼가 먼저 시비 걸었단 말이야. 애미애비도 없는 병신 같은 년이라고.”

 

 “이런 개새! ……잠깐, 너 그런 말은 어떻게 아는 거냐?”

 

 “앤더슨.”

 

 “어, 왜? 아니, 뭐, 뭐, 뭐? 나? 나라고?”

 

 꼬마아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쿨럭 기침을 한 앤더슨이 되물었다.

 

 “진짜?”

 

 꼬마아이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앤더슨은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아이고, 아이고 두야…….”

 

 “머리가 아픈데 왜 얼굴을 만져? 븅신.”

 

 “하이구야, 저거 아주 전입가경일세.”

 

 ‘끙’ 신음을 흘린 앤더슨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원, 혼내는 대신 타이르는 쪽으로 선회해야겠군.

 

 “욘석아, 사고 좀 적당히, 아예 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치라는 소리가 그리 아니꼬웠냐?”

 

 “말했잖아. 그 개새……."

 

 또 욕을 하려 하자 앤더슨이 기겁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만, 그만! 됐다, 됐어. 알았으니까 욕은 그만! 주지스님 들으실라!”

 

 앤더슨의 진심이 통했는지, 아니면 앤더슨의 꼴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아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입을 다물어 주었다. 그러자 머리를 쥐어박으며 한껏 욕을 퍼부으려던 그는, 그 얼굴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허, 누구 닮아서 이쁘니 뭐라 할 수도 없고.

 

 ‘로저 형 말 들을걸 그랬나?’

 

 넌 애 키울 재목이 아니라고, 아리엘은 차라리 내가 맡아서 키우겠다고 말하던 로저. 생각해보면 그게 이 골칫덩이에게서 벗어날, 평생 한 번 생길까 말까 한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이젠 스님들도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로저 형도 내 좆 되는 꼴 보고 낄낄대기 바쁘니…….

 

 ‘모르겠다. 큰스님한테 떠넘기고 도망칠까?’

 

 그의 복잡한 심경을 눈치 챘는지, 아이가 그에게 달라붙으며 애교를 부렸다.

 

 “앤더슨, 앤더슨.”

 

 심란해져 있던 앤더슨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왬마.”

 

 “나 버리지 마아. 응?”

 

 “…….”

 

 “응?”

 

 “…….”

 

 코발트빛 눈망울이 그를 올려다본다. 애원하는 눈길. ‘그녀’를 닮은 얼굴로, ‘그녀’와 같은 색의 눈으로, 마치 울듯이 호소한다.

 

 그는 속으로 탄식한다.

 

 ‘이건 반칙이야. 당신을 닮은 얼굴로 매달리고 있다고요. 내가 아닌들 그 누가 이걸 견딜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는 백기를 든다.

 

 “으이구. 알았다, 임마. 알았으니까 말 좀 들어.”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는 말에 아이는 기뻐하며 외쳤다.

 

 “정말?”

 

 “정말.”

 

 “진짜?”

 

 “맹세코.”

 

 “약속!”

 

 아이가 새끼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피식 웃은 앤더슨은 그 조막만한 손가락에 제 약지를 걸고, 엄지로 도장까지 찍어주었다.

 

 “죽기 전까지, 아니, 죽더라도 절대 떠나지 않을게. ……됐냐? 됐어? 어우우, 닭살 돋아. 도대체 이런 불온서적들은 어디서 들여오는 거냐? 로저 형이냐? 로저 형이지?”

 

 앤더슨의 툴툴거림에도 아이는 그가 언젠가 자신이 한 부탁을 들어주자 순진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맑은 웃음에 앤더슨은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러다 소스라치게 놀라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웃어본 게 언제였지?

 

 철든 이후 수많은 일을 겪으며 그의 얼굴은 미소를 잃어버렸다. 때때로 가벼이 행동하며 지어보이는 웃음은 가면의 웃음일 뿐 그의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눈앞의 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너 요새 변했다고, 뭐가 변했냐니까 그냥 웃어 넘겨버리던 로저 형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그 말이 이거였나?

 

 ‘큰스님도 요즘 나보고 별 말씀 안 하시고.’

 

 마주치기만 하면 젊은 놈이 산만 쏘다니지 말고 사람이랑 좀 어울리라고 잔소리를 퍼붓던 큰스님이었다. 그런데 근래엔 그런 말씀을 안 하셨다.

 

 종합적으로 볼 때, 아리엘이 그에게 이로운 영향을 주는 건 분명했다. 왜일까. ‘그녀’를 닮아서? 그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녀’를 닮아서?

 

 그는 문득 이 아이를 키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로저 형의 제안을 거절한 걸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서로 달라붙어 장난치는 둘. 그런 둘을 보는 두 시선이 있었다. 둘 중 하나, 여성의 목소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였다.

 

 “앤더슨이…….”

 

 “웃고 있군. 그렇지?”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말을 가로챘다. 먼저 말했던 여자가 상대를 잠시 노려보더니, 다시 앤더슨에게 눈을 돌렸다.

 

 다시 봐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앤더슨이, 그 앤더슨이, 아이마냥 웃으며 장난치고 있다.

 

 “왜, 자네에겐 칼끝처럼 말하던 남자가 저러고 있으니 서운한가?”

 

 노승의 짓궂은 말에 여자는 홱 몸을 돌렸다.

 

 “헛소리를…….”

 

 “허허, 것 참. 자네, 혹시 고양이 같단 말 자주 듣지 않나?”

 

 휙! 여자가 팔을 노승의 이마를 향해 내밀었다. 그러자 손목의 건틀렛에서 찰칵, 기계음이 나더니 손등 위로 칼이 챙, 하고 튀어나왔다.

 

 “실없는 소리 그만 하시죠.”

 

 “……그럽지요. 음, 어…… 장군?”

 

 “델린저입니다. 다니엘 델린저.”

 

 벌써 열 번째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델린저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노승의 얼굴 사이로 장난기 어린 눈을 본 탓이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

 

 찰칵, 델린저가 손목을 비틀자 칼이 다시 건틀렛 안으로 들어갔다. 노승이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미안하네.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름 외기가 싶지 않구먼.”

 

 “하던 얘기나 마저 하지요.”

 

 “무슨 얘기 중이었더라?”

 

 델린저가 인내심을 가지고 한 번 더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문득 이 문답이 세 시간째 반복되고 있단 걸 깨달았고, 그걸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퍽! 노승의 늙은 몸이 나무로 밀려났다. 여자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굵은 팔이 노승의 멱살을 콱 틀어쥐었다.

 

 “처음부터 제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던 겁니까? 내가 뭐라 할지 알고?”

 

 델린저의 싸늘한 말에 노승이 싱긋 웃었다.

 

 “글쎄. 난 여래사의 한갓 땡중일세. 자네가 뭐라 할지 어떻게 알겠나.”

 

 “입 닥치시죠. 그 혀, 당장 잘라…….”

 

 팔을 위협하듯 어깨 너머로 치켜들던 델린저가 느닷없이 좌측으로 발을 차올렸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노리던 검이 캉! 하고 튕겨 올랐다.

 

 “!”

 

 델린저는 불과 반의 반 초도 안 되는 차이로 살았다는 점 때문에, 기습자는 상대가 자신의 기습에 대응했다는 사실에 놀라 서로 한 걸음 물러났다.

 

 빠르게 상대를 확인한 델린저의 검은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꼬마?’

 

 상대를 모욕하는 생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대도 상대는 ‘꼬마’였다. 그녀의 어깨에 간신히 닿을 키니, 한 150cm쯤 되려나?

 

 그러나 이내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키는 ‘꼬마’였지만 뺨에 칼자국이 아로새겨진 얼굴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스물 서넛은 돼 보였던 것이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기민한 반응과 검을 쥐고 선 자세는 결코 ‘꼬마’가 아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능숙한 검사라면 모를까.

 

 델린저는 양 손목의 건틀렛에서 칼날을 꺼내며 말했다.

 

 “누구냐?”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물음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남자는 칼로 그녀의 목을 겨누며 답했다.

 

 “헨리 마일로.”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노승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노승은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나무라는 표정으로 남자를 꾸짖었다.

 

 “욘석아, 절간에서 웬놈의 칼질이냐? 하여간에 누가 형제 아니랄까봐 너나 로저나 다 큰 녀석들이 행실은 아주…….”

 

 “……예, 괜찮으시군요.”

 

 짧게 혀를 찬 헨리가 검을 칼집에 꽂았다. 그러자 델린저도 양손의 칼을 거두었다. 잠시 헨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델린저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헨리의 신비한 루비색 눈을 발견한 탓이다.

 

 ‘제국의 ‘신검’과 겨뤘다는 베르사리아의 전사가 저자인가?’

 

 이제는 멸망한, 이종족들의 성지 베르사리아. 그 베르사리아의 라자(족장) 일족에게 전해지는 ‘보석안’.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불리는 이 아름다운 눈은, 밤을 낮처럼 보는 능력이 있다고 전해진다.

 

 전설로만 듣던 보석안을 잠시 들여다보던 그녀는 이내 노승에게 목례했다.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지요. 허나 명심해주십시오. 키프로스는 전쟁 중이고, 우린 영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키프로스 없이는 윤교도 존립할 수 없습니다.”

 

 할 말을 마친 델린저가 뒤돌아 걸어 나갔다. 노승이 빙긋 웃으며 그녀의 뒤에 대고 말하였다.

 

 “영웅이라…… 흐음, 글쎄. 다 늙은 노인네를 영웅으로 내세울 만큼 키프로스에 인물이 그리 없었나?”

 

 “저자가 키프로스의 ‘드히라스 알키비르’입니까?”

 

 델린저를 뚫어져라 보던 헨리가 노승에게 물었다. 노승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뭐, 속인들이 그리 말하니, 그런 거 아니겠나."

 

 "……저 사람, 키프로스 사람 맞습니까?“

 

 “음?”

 

 노승은 ‘너가 모르는 걸 내가 아리?’라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헨리는 고개를 휘저으며 자신의 느낌을 부정했다.

 

 ‘설마, 착각한 거겠지.’

 

 착각한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나이를 먹어 둔해졌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키프로스 최고 전사에게 제국의 흔적이 보이겠는가?

 

 “왜?”

 

 “아닙니다. 아무것도.”

 

 “흐음, 젊은 녀석이 실없긴.”

 

 빙글빙글 웃는 노승의 눈이, 그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들자 그는 화제를 돌리기로 결심했다.

 

 “저 아이입니까? 앤더슨이 맡아 키우고 있다는 아이가.”

 

 다행히 노승도 더 캐묻지 않고 화제에 맞춰주었다.

 

 “아리엘이라 하네. 올해 여덟 살. 귀엽지?”

 

 노승이 헨리의 어깨를 두들기며 너털웃음을 지었지만, 헨리는 무표정할 뿐이었다.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것처럼.

 

 “왜, 별로 맘에 안 드나?”

 

 노승이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물었다.

 

 “…….”

 

 긍정도, 부정도 않는 묘한 태도였다. 그는 대답 대신 노승에게 목례하였다.

 

 “가보겠습니다, 그럼.”

 

 “어, 수고하게.”

 

 노승은 언제 대화를 나누고 있었냐는 듯 휘적휘적 제 갈 길을 갔다. 그 모습에 헨리는 쓴웃음을 짓고는 앤더슨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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