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스의 수도, 알키비르의 야경은 일견 아름답다. 하늘은 별들이 은하수처럼 내리고, 성 남쪽에서부터 흐르는 거대한 강인 와디-알키비르는 달빛을 받아 유리처럼 반짝이며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 그림 같은 풍경들 사이에 우뚝 선 거대한 성벽은, 어둠 속인데도 장엄함을 잃지 않고 있다. 눈이 있는 자라면 이 광경에 탄성을 자아낼 것이오, 입이 있는 자라면 그 아름다움을 칭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멀리서만 보던 그 전경을 가까이서 본 자는 이내 눈앞에 펼쳐진 흉악한 모습에 욕지거릴 내뱉을 것이다. 무려 십오 미터 위로 뻗어 누구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성벽, 성벽의 통로 중간중간에 얼핏 보이는 갖가지 수성 장치들과 십중팔구 안에 물이나 기름이 펄펄 끓고 있을 커다란 항아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벽의 남쪽을 휘감아 흐름으로써 천연 해자 역할을 하는 와디-알키비르까지.
“과연, 난공불락이로군.”
제국 원정대 사령관, 존 맨드빌 후작이 혀를 내두르며 말하였다. 알키비르 성은 진보된 기술로 축성된 제국의 요새들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감탄이나 할 땝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신경질적인 말투에 맨드빌은 피식 웃더니, 허리춤에 찬 호리병의 마개를 땄다.
“허허, 젊은이. 너무 서두르…….”
“지랄. 너보다 두 살 위야, 이 개자식아.”
푸흡, 술을 들이키던 맨드빌이 분수를 뿜어댔다. ‘에이씨’ 투덜거린 그가 ‘젊은이’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보게, 베하임. 애들도 보는데 사령관 가오 좀 살려줘야 하는 거 아냐?”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작은 키의 금발 곱슬머리 남자가 맨드빌의 손을 후려쳤다.
“가오 살릴 짓을 먼저 하십시오. 맨.드.빌.후.작.나.리.”
어깨에 올라간 손을 걷어낸 마르틴 베하임 남작이 한숨을 쉬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마력포 30문, 간이 마력집적진 10개, 마력 공급 장치 15기 모두 준비 끝입니다. 전투 개시 명령만 내리시면 됩니다.”
“좋아, 좋아.”
맨드빌은 손깍지를 껴 뒷머리에 대며 말했다.
“서두르지 말되, 동이 트기 전에 저 성을 함락시킨다.”
“……괜찮으십니까?”
“응? 뭐가.”
“발…….”
“어? 어? 으아, 으아아!”
맨드빌이 술병 조각들이 가득 박힌 오른발을 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손에 술병이 있단 걸 잊고 손깍지를 끼는 바람에 술병이 바닥에 떨어졌던 것이다.
고통에 울부짖는 그를 보는 베하임은 장탄식을 하였다. 하늘은 어째서 자신을 낳고 저 머저리를 내 윗사람으로 낳았는가.
“아프냐? 아파요?”
“아아악! 말만 하지 말고 이거 좀 어떻게 해봐, 임마!”
“아, 그러니까. 아프냐고.”
“아파. 아파. 아파아아악!”
맨드빌이 악을 쓰는 순간, 주위의 병사들은 빠각! 소리에 몸을 떨었고, 맨드빌은 땅에 쓰러져 숨 넘어가는 소릴 냈다. 맨드빌의 정강이를 걷어찬 베하임이 그의 곁에 앉아 말했다.
“아프죠? 내 맘도 참- 아파요. 왜 하필 내 주인은 이런 머저리일까?”
“야…… 너, 너 요즘…… 말이 좀 심하다……?”
“하여간 뒤지게 아파도 한 마디도 안 져.”
픽 웃은 베하임이 손을 휙 내저었다. 그러자 캐스팅한 마법이 발현되었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조각나 (맨드빌의 다리를 포함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술병 조각들이, 마치 시간을 되돌리듯 빠르게 합쳐졌다.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술병은 맨드빌의 손에 빨려가듯 쥐어졌다.
술병을 본 맨드빌이 나지막이 투덜댔다.
“빌어먹을 돈지랄 마법. 으이구, 내가 미쳤지. 겨우 이딴 거에 혹해가지고.”
베하임은 발끈하는 대신 머쓱하게 답했다.
“그래도 이제 밥값은 하잖습니까.”
“밥값? 밥값은 얼어죽을. 그 마법으로 이거 고칠 수 있는 수준이 되기 전까진 밥값은 어림도 없어.”
여전히 피가 철철 나는 다리를 들이대자 베하임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북쪽엔 풍문을, 정면엔 후작님이, 남쪽엔 빅터가 갈 겁니다.”
다행히 맨드빌은 더 이상 마법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풍문을 북쪽으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놈들을 너무 과소평가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놈들도 분명 전력을 다할 겁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빅터라. 설마 내가 아는 그 빅터가 맞나?”
“예. 빅터 프랑코.”
베하임의 대답에 맨드빌이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쯧, 순찰자(Ranger) 놈들은 기용하지 말라니까.”
그 말에 베하임이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남쪽을 최소한의 병력으로 막기 위해…….”
“아, 그래. 남쪽은 숲이지. 알았어. 알았다고. 뭐, 그럼. 준비는 끝난 거네?”
맨드빌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공격 개시.”
급작스러운 공격 명령에 각 지휘관들이 화들짝 튀어 오르듯이 외쳤다.
“공격 개시!”
“공격 개시! 마법사! 전원 화력 개방해!”
“다 쏟아부어! 사교도 놈들을 쓸어버려라!”
“디아우스 님의 가호가 함께하길!”
바쁜 명령에도 제국군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본진에서 분리된 천오백의 보병들이 북쪽으로, 보병 오백과 순찰자 오백이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나머지 오백은 자리를 지켰다.
키프로스의 운명을 건, 알키비르 공방전이 마침내 서막을 올렸다.
한편 드높은 알키비르의 동벽. 그중에서도 신의 첨탑처럼 높다랗게 선 망루에는 제국군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짙은 어둠 탓에 검은 실루엣이 멀리서 언뜻 꾸물거리는 모습으로 보일 텐데도, 그는 그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참 동안 제국군의 배치를 지켜보던 눈의 주인이 코웃음을 쳤다.
“허! 이놈들, 배짱 한 번 두둑하군 그래.”
“적 병력 배분은 북에 천오백, 본진에 오백, 남에 천입니다.”
옆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던 헨리가 말했다. 그러자 노인이 성질을 부렸다.
“떽! 네 역할은 나가서 싸우는 것이지, 입을 놀리는 게 아니다, 이놈!”
“……시정하겠습니다.”
헨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헨리의 반대편, 노인의 우측에 선, 헨리와 눈 색깔과 얼굴의 흉터를 제외하면 똑같은 얼굴과 키의 사내가 혀를 쏙 내밀었다.
‘노친네 비위 맞추기 힘들지?’
동생의 익살맞은 눈빛에 헨리가 쓴웃음을 지었을 때였다. 그를 약올리던 사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고…… 지휘봉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친 노인이 버럭 소리쳤다.
“이런- 고오얀 자식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아, 아, 아! 아프잖아!”
“그래도 이놈이!”
헨리는 서로 드잡이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두 사람을 팔로 밀어냈다.
“그만하시지요, 오즈릭 백작님. 로저, 제발 닥쳐.”
그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빽 소리쳤다.
“넌 빠져 있어!”
“너나 닥쳐!”
‘하여간 이럴 때만 죽이 맞아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그는 ‘에라 모르겠다’하고 망루에서 내려왔다. 그는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에게 짧게 말했다.
“난 북으로 가겠네.”
기사가 머리를 숙였다.
“로저 경은 남으로 보내면 되겠습니까?”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님껜 할버드를 가져다 드리게.”
“알겠습니다.”
그는 기사를 뒤로하고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북으로 걸어가는 그의 발은 다소 무거워 보였다. 오늘밤 있을 전투의 중요성과 어려움 때문이리라.
‘오늘 밤, 키프로스의 운명이 결정되겠군.’
적은 둘. 서쪽의 오크 천오백과 동쪽의 제국군 삼천이다. 수적으론 일만에 이르는 키프로스군보다 열세다. 설사 둘로 나누어 각각 상대한다 해도! 만약 상대가 일반적인 상대였다면 승산은 오히려 이쪽이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맹점이 있었다. 두 적 중 하나는 종족 자체가 다르다는 것. 그리고 다른 적은 혹독한 훈련을 거치고 각종 마법 장비로 중무장한 제국군이라는 것. 이 두 가지는 키프로스를 절대적인 열세로 몰아넣었다.
그때 성 밖에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동벽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렸다.
“적의 공격이다!”
동쪽 상공에 시선을 돌려본 헨리가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맙소사.”
밤하늘 위로 푸르고 붉은 빛들이 성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족히 십여 개에 이르는 빛들 뒤로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세 배에 달하는 숫자의 빛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제국의 마력포(魔力砲)라 하면, 투석기보다는 지구의 대포와 그 형태가 비슷한 화기이다. 물론 화약을 동력으로 쇳덩이를 발사하는 대포와는 그 방식에 있어 현저히 다르지만.
마력포 발사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투 마법사(War Mage)가 포 안에 자신의 마법을 캐스팅 한다. 둘째, 마법 시전이 마치면 포 자체에 내장된 마력이 포신 가장 밑바닥에서 폭발한다. 폭발로 생기는 추진력으로 캐스팅 된 전투마법은 멀리, 멀리 날아간다. 셋째, 그럼 이제 옆에 있는 변성 마법사가 달궈진 포신을 냉각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기존의 전투 마법을 더 멀리 쏠 수 있게 하는 무기지 마법을 지구의 대포 수준으로 위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또한 방식이 복잡한 만큼 발사 속도도 상당히 느렸다.
다만 그 사정거리만큼은 대포 이상이라, 이 세계에서는 가히 혁신적인 병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점이라면 마력의 소모가 너무 크다는 점이지만…….
“마력 공급 장치 가동!”
전방에 배치된 간이 마력집적진과 후방에 설치된 마력포 사이에는 사람 몸의 절반만한 원형 금속통이 배치돼 있었다. 그 위에 달린 손잡이를 병사가 돌리자 ‘빠직!’하는 소리와 함께 마나 줄기들이 치솟더니, 마력포와 마력집적진으로 흡수되었다.
“하나포 사격 준비 끝!”
“둘포 사격 준비 끝!”
“삼포…….”
각 포들에 위치한 마법사들의 외침에 베하임이 명령을 내렸다.
“준비 되는 대로 계속 발사!”
베하임의 명령에 마법사들이 손에 수인을 맺었다. 잠시 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마력포에서 마법들이 발사되었다.
발사된 마법들은 밤하늘을 가로질러 성벽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성벽 위에서 대기하던 무승이 외쳤다.
“온다. 준비해!”
그의 외침에 성벽에 길게 일자로 늘어선 삼백의 무승이 합장을 했다. 합장을 한 스님들의 손에 황금빛 광채가 어린다 싶더니, 이내 성벽 앞에 거대한 황금빛 막이 생겨났다. 기세등등하게 날아든 마법들은 성벽 전체를 감싸는 그 막에 모조리 막혀버렸다.
그 모습을 본 베하임이 혀를 찼다.
“쯧! 사이비 땡중들이 도대체 어떻게 성법을 쓰는 게야?”
‘성법-방벽’!
그것이 저 방어막의 이름이었다. 문제는 기술의 이름이 아니라 그것을 발현하는 힘. 성법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힘, 즉 신성력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신성력이야말로 오랫동안 제국의 전유물로 믿어져 왔다.
백 년 전, 저 찬란했던 신성 제국이 악독한 비스페아르 왕국에게 멸망한 뒤, 동쪽으로 밀려난 인간들이 악의 왕국에 맞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신성력 덕분이었다. 한 종족의 운명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인간들은 오로지 죽음만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수많은 종교 단체들이 저마다의 신에게 기도했지만 단 하나, 위대한 전신(戰神) ‘디아우스’만이 기도에 응답하사, 그의 전사들에게 힘을 내려주셨다.
그것이 바로 신성력. 인간을 치료하고, 인간의 잠재된 힘을 끌어내고, 더 나아가서는 신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힘! 오로지 제국 십자회 성기사에게만 허락된,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는 가장 명명백백한 증거! 그러한 힘을, 어째서 저런 사교 무리들이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은 나중에. 지금은 우선 저 성을 무너뜨리는 게 우선이다.
“예상보다 시간이 더 지체되겠군.”
베하임이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황금빛 막을 보았다.
본래 계획은 마법으로 성벽을 계속 두들기다가 간이 마력집적진으로 발휘한 큰 마법으로 일시에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런 뒤 무너진 성 안으로 돌격, 시가전을 유도해낸다. 굳이 야간전을 감행한 건 이 때문이었다. 방어하는 입장에서 낮에 들어온 적보단 밤에 들어온 적을 막는 게 어려우니까.
그런데 저 사교도 놈들 때문에 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큰 마법을 더 쏟아내는 수밖에……. 풍문과 빅터에게 연락해라. 시간을 더 끌어달라고.”
“옛!”
명에 복창한 전령들이 황급히 북쪽과 남쪽으로 말을 달려갔다.
여래사 승려들의 참전으로 상황이 다소 바뀌긴 했지만 큰 틀에서는 바뀐 게 없었다. 제국군의 파괴적인 포격은 결국 승려들의 방어를 뚫어낼 것이고, 그 뒤에는 성벽을 무너뜨릴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키프로스의 전술은 명료하다. 성벽이 무너지기 전에 측면을 치고 들어가 포대를 부수는 것. 승려들은 이 큰 흐름에 조약돌 하나를 던졌을 뿐. 결국 이 전투는 키프로스군이 제국군의 방어를 뚫느냐, 뚫지 못하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북쪽의 헨리 마일로와 남쪽의 로저 마일로의 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