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장이 누군진 몰라도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그들과 대치한 제국군을 보던 부관의 말에 헨리는 살짝 끄덕였다.
이곳에 배치된 키프로스군은 이천, 제국군은 천오백. 숫자상 키프로스군이 다소 우세하다. 거기에 제국군은 마법사들이 공성에 동원돼 백병전으로 적을 상대해야한다. 키프로스군이 백병전에 강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제국군은 보이는 것보다도 더 열세에 처한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형에 자리를 잡는 게 타당하다. 그런데 적은 언덕은커녕 완전히 평평한 평지에 주둔한 게 아닌가.
이게 의미하는 건 무엇인가? 그저 적의 자신감이나 어리석음으로 치부해도 좋을까? 전면전이라면 한 번 밀렸을 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을 텐데.
그러나 길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꽝! 거대한 굉음이 성벽 쪽에서 들려왔다. 헨리는 움찔하며 시선을 돌려 성벽을 보았다.
성벽의 방어는 거센 포격에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 먼 곳에서까지 방어막에 균열이 난 게 보일 정도로.
다시 정면의 제국군을 본 헨리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래 버티진 못한다. 즉시 돌파한다.”
“옛!”
병사들이 무기를 들며 외쳤다.
“키프로스를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키프로스를 위하여!”
“섬멸하라!”
와아아아!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는 키프로스군에 맞서 제국군도 저마다 외쳤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주여, 저희를 긍휼히 여기소서! 적과 싸울 수 있는 용기를, 힘을 주소서!
“죽여라!”
수천의 인간들의 발걸음은 지축을 흔들고, 그들의 고함은 전장 전체를 울렸다. 서로 검은 점으로만 보이던 서로의 거리가 서로의 깃발이 보이고, 서로의 얼굴이 보이는 거리가 되는 순간, 서로의 창이 교차하고, 방패가 맞붙었다.
더러는 목이나 얼굴 따위에 치명상을 허용했지만 대부분은 양측 병사들의 힘겨루기가 이루어졌다.
“밀어붙여! 밀어붙여!”
“절대 밀리지 마라!”
“개자식들, 다 죽여버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써대는 기사들의 외침에 병사들이 짐승의 그것에 가까운 고함으로 호응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밀리는 쪽은 제국군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척 보아도 제국군 병사들의 전체적인 체격은 키프로스군보다 훨씬 작았다. 기사들이 계속 독려했지만 기본적인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서서히 밀려나던 제국군이 무너지려던 참이었다.
“포션을 마셔라!”
어떤 제국군 기사의 명령에 제국군 선진의 뒤를 받치던 병사들이 창을 버리고는 벨트에 달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놀랍게도 한줌 크기의 주머니에 손목까지 들어가더니, 주먹 만한 크기의 유리병이 손에 딸려 나왔다. 한 손으로 뚜껑을 딴 병사들이 내용물을 들이켰다.
그러자 불안감이 감돌던 병사들의 얼굴이 광기로 물들었다.
“크아아아!”
“죽여!”
인간의 것이라기 보단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고함. 단지 기백만 달라진 게 아니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 키프로스군의 선진이 순식간에 뒤로 넘어갔다. 기세를 탄 제국군이 그대로 키프로스군을 도륙하려 할 때였다.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헨리는 제국군이 포션을 들이켰을 때 이미 아군 하나의 등을 밟고 올라가 다른 병사의 어깨를 밟고 서 있었다. 날카롭게 전장을 살핀 그는 병사들의 머리를 밟으며 한쪽으로 뛰어갔다.
“윽!”
“누구야!”
왁왁거리는 아군의 욕설을 감수한 보람은 분명 있었다. 선진이 무너지기 직전에 최전방에 도착했으니. 그는 검을 뽑으며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하!”
짧게 기합성을 내지른 헨리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검의 궤적에 걸린 적 하나의 목이 날아가고, 다른 하나가 목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이어 그는 검을 휘두르는 대신 어깨로 목을 잃은 적에게 돌진했다.
퍽!
충격에 밀린 시체가 적들에게 밀려났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다시 시체의 가슴에 어깨를 부딪쳤다. 시체에 밀린 적들이 뒤로 넘어갔다.
“으윽!”
“이게 무슨…….”
수천 명이 부딪히는 전장에서 이 정도는 호수에 조약돌을 던진 것만도 못한 미미한 변화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주 짧은 틈을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문신을 작동시켜라!”
부관의 명령에 키프로스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선두에 있던 병사들의 팔에 붉은 사자 문신이 빛을 발했다. 그러자 뒤로 반쯤 넘어가던 병사들의 몸이 앞으로 확 넘어왔다. 반대로 제국군은 힘에 밀려 쓰러지기 시작했다.
힘겹긴 했지만 한 번 기세를 타자 흐름은 완전히 키프로스의 것이 되었다. 제국군의 선열은 붕괴됐고, 붕괴된 진형에 돌입한 키프로스군이 적을 도륙하였다.
맹수처럼 날뛰는 키프로스 병사들 사이에서도 헨리의 활약은 타의 귀감이 될 만한 것이었다. 짧은 다리로 좁은 전장에서 재빠르게 움직이며 단호하게 검을 찔러 넣는데, 상대가 기사건 병사건 그 일격을 견뎌내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의 승리다!”
누군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을 때였다.
체구가 매우 큰, 그러나 키는 조금 작은 한 남자가 제국군 병사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키가 작다’고 묘사했으나, 그것은 군인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지 실제로는 약 170cm 내외의 키였다. 더욱이 그가 등이 굽은 꼽추라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에 대해서 더 묘사를 하자면, 이 남자는 셔츠와 반바지만을 입어 구릿빛 피부와 여자의 허리보다 굵을 것 같은 팔다리, 그리고 칼도 들지 않을 듯한 탄탄한 근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에 그의 양손은 그의 키보다 약간 긴 길이의 장도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어찌나 큰지 어둠 속에서도 그 실체를 뚜렷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굳이 헨리의 보석안이 아니라도 말이다.
그의 앞에 서 있던 헨리는 본능적으로 판단했다. ‘이자는 위험하다-’고.
남자는 천천히, 천천히 장도를 어깨 너머로 넘겼다. 그 순간 먼저 그의 가슴을 찌르려던 헨리는, 오랜 전투 감각이 자신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을 느꼈다. 감각의 경고에 머리보다 몸이 반응하였고, 그는 허리를 뒤로 홱 넘겼다. 동시에 공기를 찢는 어마어마한 소리가 그의 뒤를 휩쓸었다.
뒤를 돌아볼 겨를은 없었다. 장도의 날 반대편이 그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헨리는 검을 버리고 몸을 완전히 뒤로 넘겼다. 한 바퀴 재주를 넘어 공격을 피해낸 그는, 주변을 돌아보고는 신음을 흘렸다.
“맙소사!”
본래 그의 뒤였던 그의 주위에는 실로 참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를 뒤따라오던 부관을 포함한 네 명의 장졸들이,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의 죽음을 애도할 틈은 없었다. 눈앞에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퍼뜩 정신이 든 그는 신속하게 바닥의 검을 주워 방어 자세를 취했다. 장도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꽝!
“흡!”
칼로 공격을 받아낸 헨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압력에 가슴이 턱 막힘을 느꼈다.
몸보다도 검이 버티지 못한다!
본능이 전하는 경고에 그는 발에서 힘을 빼고 적의 힘에 몸을 맡겼다. 공중에 붕 뜬 그의 몸이 뒤쪽으로 날아갔다.
“으윽!”
“어이쿠!”
헨리의 몸을 받아낸 아군 서넛이 휘청거리며 나가떨어졌다. 이를 악물고 튕기듯 일어난 헨리는 상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꼽추도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들여다보았다.
“풍문! 국경의 영웅, 풍문!”
“북부의 수호자에게 영광 있으라!”
제국 병사들의 환호에 꼽추 기사, 풍문은 장도를 한 손으로 높이 들어 화답해주었다. 제국군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와아아아아!”
“풍문! 풍문!”
함성이 잦아질 무렵 풍문이 장도를 헨리에게 겨누며 말했다.
“제국의 기사 풍문이다.”
바위처럼 묵직한 목소리. 제국 예법을 모르더라도 이것은 명백한 결투를 신청하는 모양새였다. 헨리는 대결을 승낙하는 대신 잠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기세가 꺾였군.’
어느새 전투는 서서히 멈추고 있었다. 적은 반쯤 무너진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고, 아군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겁을 먹었단 게 정확하겠지.’
그도 그럴 것이, 이 풍문이라는 놈은 그 무력도 무력이지만 몸에서 풍기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온갖 전투로 전장에서 잔뼈가 굵어진 그가, 가히 ‘압도적’이라 평할 수 있을 정도로. 아마 이놈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후방에서도 놈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아무리 그래도…….’
적을 앞에 두고 위축된 모습을 보여? 조국의 운명이 걸린 전투인데?
이 일은 후에 꼭 손보겠다고 다짐한 헨리는 검을 높이 들어 대답했다.
“전력을 다해 싸우겠소.”
원하던 대답인지, 풍문은 씩 웃어 보였다.
“나 역시.”
“와아아아!”
“풍문! 풍문!”
제국군의 함성에 키프로스군도 병장기를 들며 환호했다.
“헨리! 헨리 마일로!”
급작스러운 일기토임에도 양군은 자연스레 서로 간격을 넓혀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사이 헨리는 약간 초조한 얼굴로 성벽과 제국군을 번갈아 보았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적을 돌파할 시간을 감안하면…….
‘시간이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아앗!”
……속전속결!
발이 크게 한 발 내딛자 흰 선이 앞으로 쭉 뻗어졌다. 빠르고 단호한, 심지어 날카롭고 정확하기까지 한 일격에 풍문은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섰다. 스윽- 공격을 완벽히 피해냈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푸학!
“……!”
풍문의 왼쪽 어깨, 오른쪽 팔꿈치, 오른쪽 허리, 가슴팍, 왼쪽 허벅지, 왼쪽 목가 등에서 피가 솟구쳤다. 고통과 함께 찾아온 충격에 풍문이 크게 비틀거렸다. 누가 보아도 기회였지만 헨리는 공격하기는커녕 혀를 차며 뒤로 빠졌다. 마치 공격에 실패한 자의 모양새로.
‘이걸 피하다니.’
헨리는 경계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풍문을 보았다. 분명 이 한 방에 무력화시키고 숨통을 끊어놓으려 했거늘…….
반면 풍문은 풍문대로 놀라 있었다.
‘무슨 기술이지?’
분명 공격을 피해냈다. 아주 완벽하게! 그러나 그 순간 마치 그 일격에서 분화된 수십 개의 보이지 않는 검들이 그를 덮치는 느낌이 일었다. 만약 몸을 트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바로 치명상을 허용했을 것이다.
‘가만.’
상대를 관찰하던 풍문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작전 참모인 베하임 남작과의 대화가 떠오른 탓이다.
‘적진에서 장군을 상대할 만한 사람은 넷입니다.’
‘넷밖에 안 되는가?’
‘넷‘이나’되는 겁니다만……. 아무튼, 그중에서도 장군과 맞닥뜨릴 가능성이 가장 높고, 가장 위험한 자가 있습니다. 그동안 저흴 지독하게 괴롭혀온 놈이죠.’
‘아아. 설마 그 이종족 출신이라는?’
‘예. 이름은 헨리 마일로. 이종족이 아니었다면 진작 ‘드히라스 알키비르’가 됐을 자입니다.’
‘호!’
평소 키프로스 최고 전사라 불리는 자들의 무용담을 익히 들어본 적 있던 그는, 그 말에 호기심이 일었었다.
‘만약 적진에서 키가 작고, 검을 쓰는 자를 발견하면 조심하십시오. 그의 기술은…….’
“공격 하나를 수십 개로 나눌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말에 헨리가 움찔했다. 풍문이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런 거였나. 그래, 이게 원래는 하나라는 거지?”
말하면서 자신의 부상을 둘러본 그는 혀를 내둘렀다. 그럼 본래의 공격은 도대체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자, 그럼 이제 이쪽에서 가겠네.”
장도를 움켜쥔 풍문이 한 발 살짝 물러서며 숨을 터질 듯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상태로 크게 한 발 내딛으며 장도를 휘둘렀다.
붕-
심상찮은 소리에 헨리는 막는 대신 후퇴해 피해냈다. 넓은 공격 범위 탓에 옆으로 피할 수 없어 한 선택이었지만, 그것이 풍문의 노림수였다.
“헛.”
장도가 허공을 가른 틈을 타 반격에 나서려던 헨리. 그러나 풍문은 곧바로 날 반대편으로 그를 후려쳤다. 그는 헛바람을 들이켜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붕! 장도가 허공을 갈랐다.
공격을 완벽히 피해낸 그가 이번에야말로 반격에 나서려던 참이었다. 풍문은 이번에는 날을 그의 어깨 너머로 넘겼다. 그 순간…….
“맙소사!”
“칼이, 칼이 휜다!”
횃불을 켠 채 대결을 지켜보던 키프로스 병사들이 풍문의 무기가 보이는 변화에 경악하여 외쳤다. 그중에서도 ‘칼이 휜다’는 외침은 너무나도 정확한 말이었다. 풍문이 장도를 뒤로 넘겼을 땐 장도의 절반에서부터 날에 이르는 부분이 뒤쪽으로 휘어졌고, 그가 휘둘렀을 땐 뒤쪽으로 휜 장도가 앞쪽으로 휘었다.
그러자 공격 범위도, 공격 방향도 짐작키 어려워졌고, 거기에 공격이 날아오는 속도도 미묘하게 빨라졌다. 덕분에 장도는 헨리의 가슴팍을 쓱 훑고 지나갔다.
왼손으로 가슴을 꾹 누른 헨리의 얼굴에는, 최대한 억누르긴 했지만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놈, 공격 다음에 바로 타점을 잡았다.’
첫 공격이 빗나간 뒤 허공을 벤 장도는 곧바로 반동을 이이용, 날 반대편으로 그를 후려치려 했다. 그후 다시 반동을 이용, 풍문의 뒤로 넘어간 장도의 날이 대각선으로 그를 덮쳤다. 공격과 공격 사이에 틈이 전혀 없는 공격에 그는 반격할 타이밍을 완전히 놓쳐버렸다.
‘그리고 뭐지, 방금 그건?’
첫 공격엔 칼이 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두 번째엔 도대체 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우선 적이 쓰는 기술을 파악해야 했다. 헨리는 일단 막거나 공격하는 대신 피해내는 데 집중했다.
‘이번엔 휘지 않았다.’
두 번째 공격이 날아왔다. 이번에도 그는 맞붙는 대신 피해냈다.
‘또?’
휘어졌다면 분명 유효타를 입혔을 텐데, 장도는 휘지 않았다.
‘필요할 때 멋대로 휘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란 건가?’
그럼 마법은 아니란 뜻이다.
그때 풍문이 장도를 어깨 뒤로 넘겼다. 팔에 힘줄이 투두둑 돋아남과 동시에, 장도가 헨리에게 쏘아졌다.
부웅!
“웃!”
물러나던 헨리가 짧게 신음하며 왼쪽 어깨를 쥐었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충분히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일방적인 손해에 표정이 어두워질 만 한 데도 헨리의 얼굴은 되레 밝아졌다. 마침내 기술의 비밀을 파헤친 것이다.
‘힘이 절정에 이를 때 장도가 휜다. 특수 재질로 만든 칼이구나!’
대체 뭘 어떻게 만든 건진 몰라도 휘어지는 부분은 일정 수준의(아마 매우 강한) 힘을 받으면 휘는 재질, 혹은 특수 공정을 거친 것이 분명하다. 듣도 보도 못한 데다 당하고도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헨리 경…….”
“헨리 경, 괜찮으십니까!”
헨리의 부상을 본 키프로스 병사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반면 저희 대장이 승기를 잡은 듯하자 제국군은 사기가 올라 함성을 질러댔다
“와아아아!”
“풍문 만세!”
적군과 아군의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에서도 헨리는 평온했다. 적의 비밀을 알아낸 이상 두려워 할 이유는 없다. 물론 더 숨겨놓은 수가 있을 순 있지만…….
‘이번에 끝낸다.’
철컥, 헨리는 검을 고쳐 잡으며 칼자루를 그의 어깨 위에 붙였다. 마치 황소가 뿔을 곧추세운 듯한 모습에 풍문은 긴장한 얼굴로 장도를 꾹 눌렀다.
‘이번에 승부가 나겠군.’
그리고 어쩌면, 아니 분명! 이 전투의 향방이 여기서 결정나리라.
“으아아아!”
검과 함께 내뻗는, 비명과도 같은 외침. 풍문도 마주 고함을 지르며 장도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헨리도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깡!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결투가 시작된 이래 두 사람의 첫 격돌이었다. 검과 장도가 서로 맞붙은 채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과연, 이번에는 나누지 않는군.’
공격을 나누지 않았단 것은 이것이 헨리의 전력이라는 것. 어설프게 이득을 보겠답시고 공격을 나누었다간 그대로 몸이 조각날 테니 불가피하게 한 선택이겠지. 하지만 이는 풍문에게 중요한 사실을 하나 노출했다.
전력이라-.
고작 이게?
“하!”
기합을 지른 풍문이 장도를 밀어 헨리를 밀어냈다. 그대로 힘으로 밀어낸 뒤 장도를 휘둘러 검과 함께 토막 낼 의도였다. 그러나 헨리는 검을 장도에 붙인 채 몸은 풍문의 오른쪽으로 이동해 힘을 흘려내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파고들어 무릎으로 풍문의 몸을 찍었다.
퍽!
“쿨럭!”
늑골이 부러지는 통증에 풍문이 기침을 토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는 왼쪽 주먹으로 헨리의 머리를 내리쳤다. 창졸간에 한 공격이라 머리를 박살내기엔 부족하다. 그래도 이어지는 공격의 맥을 끊기는 충분했다.
빡!
“윽!”
뇌를 울리는 충격에 헨리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장도에 착 달라붙은 검에서 힘이 다소 빠지는 걸 느낀 풍문이 장도의 날 반대편을 휘둘러 헨리의 머리를 후려쳤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헨리는 검을 회수에 머리 위에 수평으로 세웠다.
깡!
쩌적-
또다시 울리는 쇳소리!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막아낸 헨리가 검을 확인하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이 자식, 내 검을 노리고 있구나!’
두 번의 격돌에 검 중간에 균열이 생겼다. 아무리 놈의 힘이 세도 공격 두 번에 칼이 이 모양일 리 없다. 두 번 모두 의도적으로, 정확히 같은 지점을 공격하지 않은 이상.
검의 상태를 감안하면 물러나서 새 검을 찾는 게 타당하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위험을 감수한다!’
이번에 물러나면 더 이상 단시간 내에 끝낼 기회는 없다. 이렇게 붙어 있을 때 승부를 봐야 한다.
현재 헨리는 왼손으론 검면을 잡고, 오른손으론 자루를 잡은 채 장도를 막고 있었다.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왼손을 검에서 살짝 떼었다. 그러자 헨리의 검이 마치 천칭처럼 왼쪽으로 기울었고, 장도가 미끄럼을 타듯 쭉 미끄러졌다.
“읏!”
뜻밖의 상황에 풍문이 장도를 회수하려 했다. 초인적인 반사 신경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론 치명적인 악수가 되었다. 다시 왼손으론 칼끝 쪽을 잡고, 자루를 쥐고 있던 오른손으론 가드(칼날과 칼자루 사이 손을 보호해주는 장치) 윗부분을 쥔 헨리가 폼멜(칼자루 가장 밑부분에서 칼의 무게중심을 맞춰주는 장치)을 풍문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무기를 빼는 데 급급하던 풍문은 속수무책으로 공격을 허용하였다.
빠각!
“크악!”
크게 충격을 받은 풍문이 한손으로 머릴 쥐고 비틀거렸다.
‘끝이다!’
다시 칼자루를 잡아 찌르기로 풍문의 얼굴을 꿰뚫어 마무리를 하려 할 때였다. 오른발을 탁, 내딛으려던 헨리는 문득 시선이 뒤집히는 걸 느꼈다.
“……?!”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주 잠시 동안 공중에 뜬 자신을 내리치는 장도를 보는 순간 그는 매우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상황 파악보단 대응에 나선 것이다.
캉!
간신히 검을 세워 막았지만 그 압도적인 힘이 자신을 그대로 땅에 박아버리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쾅!
“쿨럭!”
내장을 뒤흔드는 고통에 헨리가 답답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그를 향해 다시 날아오는 일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막으면 죽는다!’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림과 동시에 그는 몸을 데굴데굴 굴러 공격을 피해냈다. 꽝! 벼락같은 굉음이 그가 있던 자릴 내리쳤다. 벌떡 일어난 그는 손으로 입가의 피를 훔쳤다.
‘분명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는데…….’
비록 짧은 거리 탓에 온힘을 다하진 못했어도 폼멜로 관자놀이를 정확히 찍었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최소한 머리가 깨졌을 일격이다. 그런데 지금 장도를 고쳐 잡는 놈의 모습은 너무나도 멀쩡해 보였다.
‘갈비뼈가 부러진 놈이…… 내구력이 보통이 아니군.’
거기에 순발력도 뛰어나다. 그는 잠시 조금 전의 싸움을 복기해 보았다.
그가 찌르기로 마무리를 하려 했을 때, 풍문은 물러나 막거나 피하는 대신 오히려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왼손은 장도를 날 쪽에 바짝 가깝게 쥐고, 오른손은 장도 중간 어름을 쥐면서. 그리고 헨리가 찌르기를 위해 오른발을 앞으로 딛으려는 순간, 그가 왼쪽 발로만 서 있는 반의 반 초도 안 되는 순간, 장도를 마치 봉처럼 이용해 헨리의 다리를 걸었다.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아무튼 이번 격돌로 검의 상태가 더욱 안 좋아졌다. 온통 균열이 번진 자신의 검을 힐끗 본 헨리가 검을 꽉 쥐며 생각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그가 죽건 놈이 죽건 이번 격돌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한번에 모든 걸 쏟아내야 한다.
풍문도 마지막을 직감했는지 비장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헨리에 비하면 비교적 여유로워 보인다. 헨리가 물러난 새 포션을 마셔 부상을 회복한 탓도 있지만, 그간의 격돌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건 확실히 일리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제기랄, 눈이…….’
풍문을 바라보던 헨리의 시야가 흐려졌다. 뭔지는 몰라도 방금 땅에 박힌 충격이 그에게 상상 이상의 타격을 준 게 분명하다. 거기에 등과 옆구리고 시큰시큰한 게, 뼈도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던 헨리가 이를 악물었다.
‘정신 차려라, 이 자식아! 뼈 삭았다고 궁시렁 댈 거면 애초에 전장에 서지 말았어야 할 거 아니냐?’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낸 그는 후, 깊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철컥, 칼을 고쳐 잡았다. 눈은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두 걸음 뛰어나가며 검을 찔러 넣었다. 제자리에서 장도를 목 뒤로 넘기고 있던 풍문이 장도를 휘둘렀다. 장도가 조금 빨리 헨리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