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알키비르 남동쪽 숲.
“이 비겁한 개자식들아! 정정당당하게…… 우악!”
나무 뒤에 숨어 고래고래 소리치던 로저가 비산하는 나무 파편에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의 옆에 붙어 있던 부관이 절망적으로 외쳤다.
“장군,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습니다!”
“알아 임마!”
로저는 퉤, 침을 뱉고는 나무 너머를 쏘아보았다. 녹색 물결들이 앞에서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 그는 이를 갈았다.
‘실수다. 놈들이 순찰자를 쓸 줄이야.’
적 사령관 존 맨드빌 후작은 병적일 정도로 순찰자를 혐오한다. 때문에 아군 순찰자들은 모두 서벽 쪽에 배치돼 있다. 그런데 그것이 그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을 줄이야…….
실수는 실수고, 적을 뚫어내는 게 우선. 때문에 그는 피해를 무릅쓰고 아군을 돌격시켰다. 그러나 빗발치는 수백 발의 화살을 뚫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놈들, 딱 우리가 전진하는 만큼만 물러나고 있어.’
어느새 전진이 불가능할 정도로 쏟아지던 화살비는 뚝 그쳐 있었다. 나무 뒤에 얼핏얼핏 보이던 순찰자 놈들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 밖으로 도망친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도망친 게 아니었다. 물러나 새로 자리를 잡은 거지. 아군이 피해를 감수하고 돌격하면 화살비를 쏟아내다가, 거리가 좁혀졌다 싶으면 반절은 후퇴하고 나머지 반절이 엄호한 뒤 그 반절도 후퇴한다. 이런 식으로 싸우니 적의 피해는 전혀 없는 반면 키프로스군의 피해는 심각했다.
“으으…….”
“내 팔, 내 팔이…….”
“어머니…….”
부상으로 신음하는 아군의 상태를 돌아본 부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장군, 이대로 가다간…….”
“알아! 이대로 가면…….”
그는 간신히 전장에서 금기시되는 그 단어를 삼켜냈다.
‘패배!’
현재 보이는 적 병력은 순찰자 오백. 오백이 전부다. 나머지 적 병력은 전투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 숲 너머에 기다리고 있다 지친 아군을 덮칠 수도 있고, 아예 이 숲은 순찰자들에게 일임하고 본대에 대기하고 있다 성벽이 무너지면 곧바로 돌격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아군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은 분명한 사실.
“그거야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지금은 저 개자식들을 싹 족치는 게 먼저야.”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방패라도 없는 이상…….”
숲을 지나는데 중갑과 방패는 너무 거치적거린다. 그래서 경무장으로 온 것인데 이것도 악수가 되어 돌아왔다.
“그래, 방패. 방패만 있으면……. 방패, 방패라. 방패……. 방패?”
중얼거리며 주위를 돌아보던 로저의 눈에 문득 발치에 널브러진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표정이 확 밝아진 그는 슬쩍 부관에게 눈짓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를 모르는 부관은 멀뚱멀뚱 그를 쳐다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로저는 다시 한 번 눈짓했고, 그 다음엔…….
빡!
“악!”
“들라고, 들라고, 들라고! 새꺄! 꼭 말을 해야 알아 처먹어? 모두 주위의 시체를 들어라! 시체를 방패 삼아 돌파한다!”
병사들이 대답했다.
“옛!”
로저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버럭 소리쳤다.
“야 이 개새끼들아! 명색이 키프로스 기사란 놈들이, 목소리가 이것밖에 안 나와?”
병사들이 악을 쓰며 외쳤다.
“와아아아아!”
“돌격!”
“씨이바알! 겁나 무겁네!”
돌격 명령은 부관이었고, 욕설은 제 몸의 두 배는 될 법한 시체를 들어 올린 로저의 것이었다. 그러나 욕설과는 달리 가볍게 시체를 든 로저를 필두로 키프로스군이 줄줄이 돌격했다.
“전우의 시체를 이용하는 건가. 제법 머리를 쓰는군.”
키프로스군을 지켜보던, 지저분한 수염과 산발한 갈색 머리의 남자가 입에 담배를 문 채 말하였다. 옆에 있던 제국 순찰자가 말했다.
“놈들이 곧 우리에게 붙을 겁니다.”
“맨드빌 쪽은? 뭐라던가?”
“시간을 더 끌어달랍니다.”
“그렇군.”
푸, 담배를 뱉은 남자가 꽁초를 발로 비벼 끈 뒤 쇠뇌를 들며 주변의 순찰자들에게 명령했다.
“사네, 시르암, 세테르. 부하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해라. 그곳에서 공격하다가 놈들이 따라붙으면 계속 도망쳐. 절대 맞서서 싸우지 말고. 단, 놈들이 추격을 포기하게 둬선 안 돼. 도망치되 적당히 거리를 둬라. 그러다가 추적하는 놈들이 줄어들었다 싶으면 다 죽여.”
세 사람이 주먹을 가슴에 붙이며 대답했다.
“예, 대장.”
“오아마케, 이슬라, 칼렉스. 너희들은 동쪽으로 가거라. 임무는 똑같다. 명심해라. 너희의 임무는 적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예.”
“나머지 조, 요릭, 랄프는 나와 함께 한다.”
조라고 불린 사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두목, 고작 이백 명으로 저놈들과 싸우는 건 불가능할 텐데?”
남자, 빅터 프랑코가 그의 눈을 응시했다. 단지 바라보았을 뿐인데 조는 뱀과 맞닥뜨린 쥐마냥 몸을 움츠러뜨렸다. 빅터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작전을 설명해주었다.
“싸우잔 게 아니다. 놈들의 머리를 치고 재빨리 빠져나가잔 거지. 머리만 치면 시간을 끄는 건 일도 아냐.”
“이백 명이 적 대빵 한 놈을 치자. 그리고 튀자. 이 말이지? 좋아. 바로 하자고.”
요릭이 쇠뇌를 들며 씩 웃었다. 나머지 순찰자들도 싸늘한 웃음으로 호응했다.
“와아아아!”
어느새 함성 소리가 지척에 다다랐다. 순찰자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았다. 빅터는 선두에 선 로저를 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이군.”
이종족 출신이자 헨리 마일로의 쌍둥이 동생인 로저 마일로. 창을 귀신같이 잘 쓴다는 키프로스 기사. 어두운 데다 시체 방패로 가려 보기가 쉽진 않았지만 워낙 작은 키 탓에 아예 눈에 띄지 않는 수준은 아니었다.
“대장, 각이 전혀 안 나오는데.”
로저를 보던 조가 우려 섞인 말을 하였다. 그의 말대로 제 몸보다 훨씬 큰 시체 너머에 숨은 로저를 맞추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어 보였다. 빅터가 나직이 말했다.
“아니. 나온다.”
그때 로저가 시체를 버리고 창을 양손으로 쥔 채 빅터가 숨은 나무를 향해 뛰어들었다. 두세 걸음쯤 내딛었을까. 방패가 치워지기를 기다리던 이백의 순찰자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로저는 창을 들어 막으려고 했지만 아무리 창의 달인이라도 그 많은 화살을 전부 튕겨내기는 불가능한 일. 화살에 고슴도치가 된 로저가 뒤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던 빅터가 것 보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대장이면서 선봉에 선 놈이다. 그만큼 성격이 급한 놈이란 뜻이지. 당연히 제일 먼저 방패를 버리고 덤빌 놈이었어.”
조는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이었다.
“역시 대장! 근데 저놈은 대장 위치는 어떻게 알았대?”
“그건……. 나중에 얘기하지. 후퇴한다.”
“알았어. 후퇴…….”
후퇴 명령을 내리던 조가 고개를 픽 떨궜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던 빅터는 고개를 꺾은 조의 뒤로 누군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그 누군가는 조를 옆으로 툭, 걷어찼다. 조의 몸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힘없이 바닥을 뒹굴었다.
‘누군가’는 빅터에게 비웃듯 말하였다.
“야. 가긴 어딜 가, 이 새끼야?”
목소리를 알아본 빅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 너!”
창을 꼬나 쥔 로저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하, 이 새끼! 아주 내가 니 손바닥에 있는 줄 알지? 하여간 어린 노무 새끼가…….”
“죽여!”
빅터의 외침에 쇠뇌의 장전을 마친 순찰자들이 로저를 쏘려 하였다. 그러나 그때 빅터 앞에 서 있던 로저의 모습이 꺼지듯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순찰자들은 당황했고, 빅터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화살에 고슴도치가 된 놈이 갑자기 이쪽에 나타났고, 이번엔 완전히 사라졌다. 이건 설마…….
“환상이다! 놈이 우리에게 환상을 걸고 있어!”
“늦었어, 병신아.”
싸늘한 목소리 뒤로 처절한 비명이 이어졌다.
“으악!”
“아아악!”
“내 눈. 내 눈!”
무언가가 공간을 거세게 가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지척에서 부하들의 비명 소리가 커져갔다. 로저가 제국 순찰자들 사이에 나타나 학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악문 빅터가 단검을 뽑아 로저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무방비하게 노출된 로저의 등에 단검을 꽂았다.
다시 한 번 로저의 모습이 픽, 사라졌다.
동시에 그의 뒷목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창을 빅터의 목에 댄 로저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네 작전 참모님이 말씀 안 하시든? 우리 형제 눈깔엔 야간 투시 능력만 있는 게 아니라고.”
“…….”
“뭐, 그게 네가 뒈지는 이유겠지. 잘 가.”
‘잘 가’라는 말과 함께 창이 그대로 빅터의 목을 꿰뚫으려던 순간, 빅터는 재빠르게 왼쪽으로 반 바퀴 돌아 공격을 회피했다. 그리고는 단검을 쥔 손의 반대편, 왼손으로 창대를 콱 움켜쥐었다.
“!”
창을 빼내려던 로저는 가공할 힘이 그를 저지하는 것을 느꼈다.
꽈드득-
‘이 새끼, 무슨 놈의 악력이……!’
“눈이라. 이제 기억나는군. 네놈들 능력이.”
창을 쥔 빅터가 씩 웃었다.
“한 놈은 초가속(超加速), 다른 녀석은 잠깐 동안 원하는 모든 대상에게 환상을 거는 능력이 있다고. 거의 제약 없이 쓸 수 있다지만, 이렇게 접촉하고 있을 땐 못 쓴다지?”
로저가 이를 부득 갈았다.
“너, 신나서 지껄이는 건 알겠는데…….”
“……!”
로저의 팔뚝에 지렁이 같은 힘줄들이 투두둑 돋아났다. 창을 잡고 있던 빅터는 자신의 몸이, 정확히는 그가 잡은 창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경악한 그는 발과 손에 힘을 주었지만 창은 아랑곳 않고 계속 올라갔다.
로저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얌마, 이 형이 키가 작지 힘도 작은 줄 아냐?”
“죽여!”
빅터가 외치자 로저는 괴성을 들으며 창을 번쩍 들고, 휘둘렀다. 건장의 체구의 빅터가 창을 따라 공중에 떠오르고, 창과 함께 휘둘러지는 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빅터는 창을 놓고 바닥을 굴렀다. 저들 대장이 빠져나가자 요릭과 랄프가 로저에게 사격을 가했다.
“그래, 어디 해봐! 내가 이기나 니들이 이기나!”
화살 한 발은 피하고, 다른 한 발은 창을 휘둘러 튕겨낸 그는 한 마리 야수처럼 두 사람에게 뛰어들었다.
“흐아압!”
기합과 함께 창이 큰 원을 그렸다. 원의 궤적에 걸린 랄프는 얼굴이 조각나 그대로 즉사하고, 요릭은 들고 있던 쇠뇌를 들어 막았다.
“으아악!”
쇠뇌가 박살나며 얼굴을 크게 베인 요릭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피를 철철 흘리는 악귀 같은 얼굴로 왼손으로 로저의 이마를 겨눴다. 왼쪽 손목에 달린 작다란 쇠뇌에서 퉁, 하고 화살이 발사되었다. 본래 위력은 시답잖아도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화살은 분명 치명적인 터였다.
로저는 신속하게 창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이마에 가져갔다. 화살이 빨려 들어오듯 손에 쥐이는 걸 느낀 그는 그대로 오른손을 꽉 쥐며 오른쪽으로 당겼다.
촤아악!
화살은 로저의 머리를 파고드는 대신 이마를 가로로 길게 찢었다. 그와 함께 그는 왼손으로 창을 휙 휘둘렀다.
“큭!”
창에 양 허벅지를 베인 요릭이 무릎을 꿇었다. 요릭의 뒤에서 기회를 엿보던 빅터가 즉시 화살을 쏘았다. 로저는 오른손에 쥔 화살을 놓으며 요릭의 머리채를 움켜쥔 뒤, 체중을 실어 머리를 땅에 내리꽂았다. 쐐액! 자연스레 자세를 낮춘 꼴이 된 로저의 머리 위로 화살이 지나갔고, 쾅! 하고 땅에 박힌 요릭의 머리에선 연신 뿌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끄으으…….”
잠깐 신음을 흘리며 저항하던 요릭은 로저가 그의 머리를 살짝 들었다 내리치자 조용해졌다. 그의 머리에서 빠져나온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자리에서 일어선 로저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후……. 자, 이제……. 내가 갈까? 아님 너가 올래?”
빅터는 불문곡직하고 화살을 쏘았다. 퉁, 쇠뇌의 화살이 로저의 목을 노렸다. 로저는 창대를 휘둘러 화살을 쳐냈다. 딱! 화살이 허공으로 튕겨나갔다.
화살을 쏘자마자 빅터는 단검을 쥐고 로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는 방어는 포기하고 단검으로 빠르게 적의 가슴, 허리, 허벅지를 베었다. 세 부위에서 피가 터졌다.
그러나 빅터의 단검을 쥔 오른팔과 오른쪽 허벅지에서도 피가 솟구쳤다. 마찬가지로 방어를 도외시한 로저가 치명타를 가한 것이다.
“큭!”
힘이 풀린 손에서 단검이 빠져나갔다. 빅터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로저는 승리자의 표정으로 빅터의 머리에 창을 겨눴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있냐?”
“마지막? 마지막이라고?”
큭큭큭, 빅터가 기분 나쁜 웃음소릴 내었다.
“그건 이쪽이 할 말 같은데?”
빅터가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주위로 수십 명의 순찰자들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