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전, 서벽.
숨 막히게 상황이 돌아가는 동벽과 달리 서벽은 비교적 한가해 보였다. 병사들의 얼굴엔 큰 긴장감이 없고, 행동은 부산스럽지 않다.
물론 이 한가함은 서벽이 상대하는 적인 ‘오크’의 특성과 와디-알키비르에서 끌어들인 수로가 든든한 해자 역할을 하는 것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 서벽이 여유로워 보이는 진짜 이유는, 지휘관 때문이었다.
“이 세상 최고의 남자가 누구냐!”
“무니!”
“이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할 자 누구냐!”
“무니!”
“에- 가만있어 보자. 어디…….”
“무니! 무니! 무니이이!”
“여보게, 친구들. 아직 말도 안 했다고…… 허허.”
열광하는 병사들 중간에 있는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흐뭇하게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군중을 둘러보았다.
이 무니라는 사내는 환호소리가 무색하게도 추한 인상의 남자였다. 땅딸막한 몸에 머리는 스님과 군인의 중간 정도로 밀어버렸고, 얼굴은 검었으며, 밤톨처럼 숭숭 난 수염은 구레나룻까지 덮고 있었다. 그나마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게 듣기 좋았지만…….
“어떠냐, 마고야. 이 형님의 능력이?”
무니의 말에 무니와 비슷한, 그러나 체구는 거인에 가까울 정도로 큰 사내가 고개를 조아렸다.
“아무렴! 역-시 형님이십니다. 세치 혀 하나로 이 많은 군인 놈들을 휘어잡으시다니, 이 마고, 감탄, 또 감탄 했습니다요!”
그의 말에 무니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허허허허허! 마고야, 네 녀석 아부 솜씨가 아주 경지에 올랐구나.”
“아부라니요. 천부당만부당! 소인은 그저 극히 일부의 사실을 말한 것뿐이옵니다!”
“오냐, 더 해봐라. 더!”
무니는 마고의 아부를 뒤로 하고 다시 열광하는 병사들을 보았다.
며칠 전 그가 처음 이곳에 나타나 서벽의 지휘관임을 밝혔을 땐 다들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게 당연한 것이, 이름 있는 기사도 아니고 척 보아도 칼 한 번 안 잡아본 추남이 대장을 자처했으니. 무니 뒤에 선 한 여자가 아니었다면 그는 진즉 하극상에 직면했을 것이다.
마침 그녀가 생각나자 무니는 그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니엘 경은 정해진 위치로 가주시오.”
그의 뒤에 묵묵히 서 있던 다니엘 델린저가 고개를 살짝 까딱이더니 성벽 한쪽으로 사라졌다. 찜찜한 여자가 사라지자 무니는 다시 기분 좋은 얼굴로 며칠 전 일을 상기했다.
굴러들어온 돌을 보던 장병들의 시선은 그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마치 이야기꾼이 이야기하듯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는 톤,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말투, 그리고 몸에서 알게 모르게 흘러나오는,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까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 광란의 도가니 속에서 한 기사가 조심스레 무니에게 말을 걸었다.
“저, 지휘관님.”
“스읍!”
무니가 눈을 부라리자 기사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이마를 딱 치더니 양팔로 만세를 하였다.
“무니 형님 만세!”
“옹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수성 준비는 끝났습니다. 가져오신 것도 배치했고…… 놈들도 공격 준비를 마친 것 같습니다.”
기사의 보고에 무니는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음, 그래, 그래. 고생했네.”
그때 마고가 불쑥 무니 앞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진짜 고생은 제가 했습죠. 저걸 열 가마 넘게 푸느라 제가 얼마나…….”
마고의 호소는 ‘딱!’하는 소리에 끊겨버렸다. 지휘봉으로 마고의 머리를 후려친 무니가 마고의 뺨을 쿡쿡 찌르며 옆으로 밀어냈다.
“야 이놈아, 어딜 윗분들이 말씀하시는데 함부로 끼어드냐, 이놈아! 면상이라도 좀 잘 생겼음 내가 말을 안 하지. 얼른 대가리 썩 안 치워? 에잉, 생긴 것도 밥맛 떨어지게 생겨가지곤…….”
“우우…… 형님…… 접니다…… 마고예요…….”
“썩 꺼져라, 이놈아!”
제 수하를 모질게 밀어낸 무니는 그에게 슬쩍 엄지를 치켜 세워주고는 기사에게 계쏙 말했다.
“저놈은 신경 쓰지 말게. 저놈이야 본바탕이 천한 놈이니 저런 일이 어울리지만, 자네들이 어디 저놈 같은가. 손대기도 싫었을 텐데 고생 많았네.”
그가 의도한 대로 기사는 크게 감격해 그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장군…… 형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 그래! 아주 믿음직하구만. 자, 이제 자네도 위치로 가주게.”
“옛!”
우렁찬 대답과 함께 기사가 사라지자 무니는 그제야 한숨을 푹 쉬었다.
“휘유! 것참, 대장 노릇 하기 힘들구먼.”
“고생하셨슴다, 형님.”
“오냐. 마고, 역시 네놈밖에 없구나.”
어느새 잽싸게 다가와 어깨를 주무르는 마고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무니는 가시거리까지 다가온 적을 바라보았다.
“움직이면 무슨 숲이 움직이는 것 같겠구먼.”
어둠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오크들 특유의 녹색 피부를 본 무니가 중얼거렸다. 그의 추측이 정확했다는 건 오백의 오크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곧바로 증명되었다. 달빛과 횃불에 희미하게 비친 모습임에도 그들의 움직임은 선명했고, 거대했다.
함성은 없었다. 지휘를 위한 고함도. 당연하다. 오크 전사에겐 두려움이 없으니까. 서로가 서로를 형제라고 생각하니까. 다만 점점 다가오는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그들의 진군을 알려줄 뿐이었다.
사실 백만의 함성보다는 이쪽이 더 섬뜩하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적은 보이지 않는 공포를 자극한다. 그 증거로 이제껏 여유롭던 키프로스군도 막상 오크들이 진군하자 두려움의 기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거, 기운차게도 오는구만. 1대, 2대 발사 준비.”
무니의 침착한 명령에 정신을 차린 마고가 목젖이 터져라 외쳐댔다.
“쇠뇌병, 전원 발사 준비!”
서벽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에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오백의 쇠뇌병들이 이 열 횡대로 모여 섰다. 선진에 선 병사들이 쇠뇌를 성가퀴에 걸었다. 후진에 선 이들은 바닥에 쇠뇌를 대고 대기하였다.
“1대 발사!”
무니의 손짓에 마고가 즉시 소리쳤다. 나팔을 든 병사가 나팔을 불었다. 수백 발의 화살이 동시에 쇠뇌를 떠났다. 바람을 타고 날아간 화살들은 성벽 앞의 구덩이를 지나, 해자 역할을 하는 도랑을 넘어…… 성큼성큼 다가오는 오크를 덮쳤다.
이 다음은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근거리라면 두꺼운 철판도 우습게 꿰는 키프로스제 명품 쇠뇌의 화살이, 저 괴물들의 녹색 피부를 조금 파고드나 싶더니 죄다 튕겨졌다. 더러는 운 좋게 눈 따위의 급소로 날아들던 화살도 있었지만 이 역시 여지없이 막혀버렸다. 그들이 휘두르는, 그들의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무기에.
붕-
한 오크가 날만 해도 어지간한 인간의 상체만한 도끼를 휘둘렀다. 귀찮은 파리를 내쫓듯 가벼운 일격. 그 일격에 일어난 세찬 바람이 그에게 날아들던 화살들을 모조리 꺾어버렸다.
단지 선두에 있는 몇몇이 그러는 것만으로도 1대의 공격은 무용지물이 됐다. 그럼에도 무니는 표정 하나 변치 않고 명령했다.
“2대 발사.”
선두에 있던 1대가 뒤로 물러나 장전하고, 대기하던 2대가 앞으로 나와 도랑 가까이 다가온 적을 쏘았다. 사격 후 조금의 차이도 두지 않고 무니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3대! 발사!”
성벽 너머, 성문을 지키는 예비대 뒤에는 오백 가량의 장궁병이 시위에 화살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다. 명령이 내려지자 이들은 곧장 활을 높이 들어 화살을 쏘았다.
쉬이익!
오백의 화살이 성벽 병사들 머리 위를 넘어 앞서 떠나간 쇠뇌 화살들의 뒤를 따랐다.
오크들은 먼젓번과 같이 무기를 휘둘러 2대의 화살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안심하고 계속 진군하려던 그들은 시야 밖에서 날아드는 공격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
“크어억!”
[이 비열한 놈들!]
화살이 박힌 오크들이 분노해 소리쳤다. 놀랍게도 많은 화살들이 그 두꺼운 피부를 뚫고 박혀 있었다.
“키프로스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껏 만든 복합궁과 특수 화살이다. 맛이 어떠냐, 이 뚱땡이 매생이 자식들아.”
낄낄 웃어대던 무니는 그 다음 장면에 사레가 들려 켁켁댔다.
세 차례의 화살비가 쏟아진 뒤 오크들은 기다란 물줄기와 마주하였다. 와디-알키비르에서 끌어들인 이 인공 강은 긴 길이 탓에 그리 넓진 않아도 뛰어넘는 걸 저지하기엔 충분히 넓었다. 깊이도 치명적으로 작용하기엔 전혀 모자라지 않았고.
착각이었다. 오크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든, 오크들이 그들조차 모르던 힘을 발휘한 것이든.
선두에 달리던 오크는 눈앞의 장애물을 보고도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가속을 하였고, 해자를 마주한 순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의 형제들 또한.
짧은 시간 공중에 머무른 그들은 약간의 여유를 둔 채 강 건너편에 착지하였다. 어떤 인간도 하지 못할 곡예를 선보인 그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곧장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저런 미친!”
사레를 가라앉힌 무니가 뒤늦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지휘봉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쏴라! 알아서 계속 퍼부어!”
헛된 시도였다. 오크들은 생긴 것과는 달리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쇠뇌든, 장궁이든 어떤 화살도 오크의 몸을 두 번 꿰뚫는 일은 없었다.
강변을 넘어선 오크의 앞을 가로막은 건 수십 개의 구덩이였다. 바닥에 뾰족한 말뚝을 박아놓은 구덩이들. 만약 그런 것들이 수백 개는 되었다면 강을 넘어선 오크들은 여기서 저지됐을 것이다. 분명히.
그러나 시간이 없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구덩이는 수십 개에 불과했고, 그 정도 숫자는 그저 성가신 정도의 장애물에 불과했다.
[성벽을 넘어라! 승리는 우리 것이다!]
선두에 선 오크 대장이 외치는 순간 무니가 지휘봉을 휘둘렀다.
“지금이다. 쏟아 부어!”
무니의 명령에 병사들이 장대로 성가퀴에 올려놓은 통들을 밀어냈다. 기사가 배치했다는 ‘그것’……. ‘그것’이 쏟아지자 오크들은 비웃었다. 불 따위는 그들을 해할 수 없다면서. 아마 끓는 물이나 기름 정도로 안 것이리라. 그 뛰어난 후각에 조금만 집중했더라도 아니란 걸 알았을 텐데.
그들은 ‘그것’이 그들을 덮치고 나서야 그게 뭔지 알았고, ‘그것’의 이름을 부르며 길길이 날뛰었다.
[똥! 똥물이다!]
[크아아! 키프로스, 이 비겁한 놈들!]
모르는 언어로 지껄여도 욕하는 건 알아들을 수 있는 법. 무니는 흐뭇하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오냐, 많이들 욕해라. 덕분에 이 어르신은 천년만년 만수무강하겠구나.”
“형님 만수무강을 위해 소인이 한 노고는 잊지 말아주십쇼.”
그의 옆에서 마고가 푸념을 해댔다. 고결하신 키프로스 직업 군인들이 분뇨를 푸는 일을 할 순 없는 노릇. 당연히 이런 지저분한 일을 맡는 건 마고와 그의 부하들이었던 것이다.
무니가 마고의 머릴 지휘봉으로 가볍게 쳤다.
“떽! 산적 놈이 국가의 녹을 받아먹게 됐음 일을 마다하지 말아야지. 안 그러냐?”
“그치만…….”
“어허! 시끄럽다. 어서 화살이랑 똥이나 쏟아 부어라. 냉큼!"
“그건 애들이 이미 알아서 하고 있습니다요.”
더 고결하신 오크 나리들이 똥에 진저리를 치는 게 그리도 신나는 일이었는지, 병사들은 웃음을 만개한 채 화살과 돌, 그리고 그보다 훨씬 효과적인 무기를 성벽 아래로 쏟아 부었다. 오크들이 기겁을 하며 성벽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화살이 빗발쳐 그들을 덮쳤다.
오크들이 성벽 밑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오크 대장을 비롯한 몇 명이 앞으로 나섰다. 오물을 뒤집어쓰는 걸 감수하고.
[죽여 버리겠다!]
“어어어? 저놈들이……. 집중사격해라! 저 다섯 놈!”
그 모습에 무니가 펄펄 뛰었지만 이미 다섯 오크가 허리에 두르고 있던 밧줄 달린 갈고리를 던져 성벽에 건 뒤였다. 그들이 성벽 위에 오르는 건 그야말로 삽시간이었다.
성벽에 오른 오크의 모습은 ‘압도적’이란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2m가 넘는 키, 성벽 통로 절반을 차지하는 몸집, 그 키와 몸집을 온통 뒤덮은 울퉁불퉁한 근육, 거기에 대미를 장식하는 거대한 도끼까지.
“마, 막아라!”
[다 덤벼라, 인간 놈들!]
노호성을 내지른 오크가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말 서너 마리가 충분히 다닐 수 있는 성벽이다. 그 성벽을 반 가까이 채우는 덩치에서 나오는 힘은 오죽하랴.
일격을 받아낸 키프로스 병사들이 조각조각 흩어졌다. 더러는 머리가, 팔다리가, 두려움에 젖은 오합지졸들이. 고작 다섯에 성벽은 혼란에 빠졌다.
그중 하나, 오크 대장은 우연히도 무니의 근처에 있었다. 병사들을 도륙하던 오크 대장이 무니의 지휘봉을 보고 함성을 질렀다.
[결투다!]
“히익!”
무니는 기겁하며 물러났지만 그 짜리몽땅한 다리보다 오크가 훨씬 빠를 터였다. 그때 마고가 검을 뽑으며 무니 앞으로 나섰다.
“물러나십쇼, 형님! 제가 맡겠습니다!”
이때만큼은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았다…… 이때만큼은.
“마고, 이 자식……. 이 전투 끝나면 넌 바로 기사다. 내 반드시 어르신께 아뢰어…….”
감동에 젖은 무니의 목소리는 마고의 검과 함께 뚝 끊겼다. 운 좋게 몸은 무사한 마고가 즉시 뒤돌아 반 토막 난 검을 무니에게 쥐어주고는, 무니 뒤에 몸을 숨겼다.
“자, 이제 형님 차롑니다.”
“이 씹새끼야! 이 전투 끝나면 넌 바로 모가지야!”
도저히 눈 뜨고 보기 힘든 추태에 화가 났는지 오크 대장이 고함을 지르며 도끼를 들었다. “히이이이익!” 두 사람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비명을 질렀을 때였다.
은밀하고 날랜 발걸음이 오크 뒤로 다가왔다. 발걸음의 주인은 뛰어올라 오크의 허리를 딛고, 어깨에 손을 얹은 뒤 도움닫기를 하듯 뛰어올라 오크 어깨에 목마를 탔다. 오크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양 손등에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칼날이 오크의 머리를 인정사정 없이 들쑤셨다.
푹, 푹, 푹, 푹, 푹!
귀, 관자놀이, 뺨과 목, 그리고 눈……. 머리의 수많은 급소에 구멍이 났다. 구멍들로 피가 뽑혀져 나왔다. 눈에 생명의 빛이 꺼진 오크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쿵
그녀는 시체가 앞으로 쓰러지기 전 등으로 자리를 옮겨 착지하였다. 그녀를 알아본 무니와 마고가 동시에 외쳤다.
“델린저 경!”
“…….”
다니엘은 말없이 성벽 밑을, 그다음엔 북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두 곳을 연달아 돌아본 무니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성벽 밑에선 오물을 뒤집어쓴 오크들이 앞서 올라간 동료를 따라 갈고리를 던지고 있었고, 북서쪽에는 늑대를 탄 오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다니엘은 손가락을 무니에게 향했다.
“지휘하시오.”
나지막한 말에 무니는 불에 댄 듯이 튀어 올랐다.
“기사들은 오크를 상대하고, 병사들은 갈고리를 떼! 아니, 밧줄을 잘라라! 놈들이 다 넘어오면 끝장이야. 예비대, 예비대! 예비대는 북서쪽으로! 수비를 지원하라! 빨리빨리 움직여!”
마고가 명령을 전달했고, 혼란에 빠진 키프로스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명령을 수행하였다.
“크아아!”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도끼를 휘둘렀다. 수많은 무기와 그 주인을 벤 공격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챙, 도끼가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남자의 검에 막혔다.
검의 재질이 다른 건 아니었다. 단지 그 주인이 다를 뿐이었다. 병사가 아닌, 기사. 오로지 오크만을 상대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조직.
검은 매끄럽게 도끼를 흘려내고는 오크의 어깨를 긁었다. 분노한 오크가 그에게 도끼를 마구 휘둘러댔다. 분노에 눈이 먼 나머지 뒤통수를 노리는 철퇴는 보지 못하였다.
빡!
인간의 머리였다면 그대로 곤죽이 됐겠지만 오크는 골통도 쉽게 빠개지지 않았다. 애초에 다니엘처럼 칼로 오크 머릿속을 제 집 드나들 듯 들쑤시는 게 말이 안 됐던 것이다. 오크 머리로 철퇴를 만들어 쓰는 미친놈도 있는데.
그래도 오크가 큰 충격을 받은 건 확실했다. 머리야 모든 생물의 약점이니. 다만 맹수가 으레 그렇듯 부상 입은 오크는 멀쩡한 오크보다 몇 배는 위험하다.
“으아아아!”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오크가 이전보다 두 배는 강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훙, 공기를 찢는 소리가 폐부를 찌르는 듯 했다. 그러나 냉정을 잃은 자는 앞밖에 보이지 않는 법. 그는 결국 끝까지 옆에서 날아오는 도끼를 보지 못하였다.
퍽!
도끼가 오크의 머리에 박혔고, 철퇴를 든 기사가 도끼를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겉에만 박혀 있던 도끼가 푹 들어갔다. 뇌가 두 조각 난 오크가 무릎을 꿇었다. 검을 든 기사가 다가와 목을 쳤다. 도끼 박힌 그루터기 꼴을 한 머리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기사들은 그 머리에는 눈길도 안 주고 다음 오크가 있는 쪽으로 갔다.
반면 병사들의 싸움은 간단하고 단순했다.
“잘라!”
성가퀴에 달라붙은 병사들이 검을 톱처럼 써 밧줄을 썰어댔다. 오크의 무게를 견딜 만큼 두꺼운 밧줄이었지만, 상대가 나빴다. 키프로스 강철로 제련한 키프로스 칼에, 완력 강하기로 소문난 키프로스 병사라. 어떤 밧줄이라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저으리라.
시간은 좀 걸렸어도 밧줄은 이내 투두둑 소릴 내며 끊어졌다. 오크들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그 괴물 같은 생명력 덕에 태반이 신음만 잠깐 흘리다 신경질적으로 일어났다. 운 나쁘게 구덩이에 떨어져 머리가 그대로 말뚝에 꿰인 몇을 빼곤, 대체로 그랬다.
떨어진 오크들은 아우성을 쳤다.
[비겁한 인간 놈들! 명예도 모르느냐!]
[나와서 싸우자!]
“형님, 저놈들이 저희보고 명예도 모르냐는뎁쇼,”
무식한 몰골과 출신과는 달리 의외로 오크어에 능통한 마고가 말했다. 무니가 기도 안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이기는 게 내 명예다, 요놈들아. 전쟁에 명예는 무슨 얼어죽을.”
성벽을 넘어서면 아이고 여자고 모조리 도륙할 놈들이다. 그런 주제에 명예를 논해? 암만 명예에 살고 죽는 오크래도 개소리가 너무 하늘을 찌르지 않은가.
아무튼 전황은 순조로웠다. 오크는 더 이상 성벽을 넘어오지 못했고, 북서쪽, 해자가 가장 얕고 좁은 곳을 건너온 늑대 기수들도 오물 기사단과 화살 군단의 위용에 격퇴되는 분위기였다. 쏟아지는 오물에 오크를 태운 늑대는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오크나 인간이나 정예일수록 고결하신 건 똑같거든. 거기에 제가 사냥한 것만 먹는다는 귀족 똥개라.’
끼리끼리 잘 노는구나, 무니는 실소를 흘렸다.
동벽이 야전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 서벽은 이렇게 서서히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아마 이대로라면, 적어도 서벽에서 이 전쟁의 향방이 갈리는 일은 없으리라.
그렇게 믿도록 하고 있었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노련한 전략가들이 그들의 적에게 으레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