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키비르 공방전 후 6년. 세상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주요 전선은 모두 고착 상태에 이르렀고, 이종족들 사이의 불화도 왕의 중재로 어느 정도 소화되었다. 옛 왕을 부르짖던 자들도 이젠 겉으로는 사라져 왕국 내 잡음도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최근 후방에서는 소란이 일어났다. 최근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한 제국군 게릴라가 그 발단이었다. 6년 전 사령관에게 버림받은 제국 레인저 외에도 오백 명에 달하는 게릴라가 후방에 쏟아졌다. 15명 규모로 이루어진 분대 단위로 움직이는 이들은 작은 마을 따위를 습격해 민심을 어지럽혔다.
그들은 점점 대담해져, 작금에 들어서는 알키비르 북쪽의 청색 산맥을 근거지로 하여 수도 주변을 들쑤시기에 이르렀다.
키프로스군으로서는 여간 골머리를 앓지 않으면서도 방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 이유로는 우선 첫째로 제국군 게릴라의 무력이 강력해 지방 자경대로서는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제국 정규군이나 레인저로 이루어진 이들을 민간인이 상대하기는 아무리 봐도 무리였다.
둘째로 이들을 잡기 위해 병력을 뺄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 오백 명이 넘는 게릴라를 잡으려면 그 서너 배 이상은 되는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데, 모든 병력을 고작 전선 유지를 하는 데 그치는 지금 그만한 병사를 돌리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닌가.
이 딜레마 속에서 민간인들의 희생은 커져만 갔다. 알키비르 동쪽의 한 마을도 그중 하나였다.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4~50명쯤 돼 봬는 제국군에게 도륙 당하고, 약탈당했다.
“살고 싶냐?”
키프로스인들 억양에 비하면 유해 보이는 말투가 담배 연기와 함께 허공에 흩어졌다. 상전사 계급장을 단 그는 포로들 앞에 앉아 처형을 주관하고 있었다.
“사, 살려주십…….”
피투성이 포로의 간절함은 담뱃재를 툭, 툭 털며 내뱉은 말에 끊겼다.
“그어.”
그 말에 대기하던 덩치 큰 제국 병사가 성큼 걸어가 ㅍ로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히익!”하는 비명은 목을 가르는 강철에 바람 새는 소리가 되었다.
마지막 포로의 머리가 휙 날아가 먼저 기다리고 있던 머리 무덤에 합류했다. 머리가 데구르르 굴러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던 상전사는 진절머리를 내며 말했다.
“젠장, 이 짓거릴 언제까지 해야 되는 거야. 차라리 제대로 된 놈들 상대로 푸닥거리나 하고 싶은데.”
명색이 제국 정규군 상전사가 무기력한 민간인이나 썰고 있다니. 자존심이야 둘째 치고 재미가 없다. 재미가. 학살이 너무 쉬우니까.
담배를 뻑뻑 태우던 그는 문득 머리 무덤 앞에 낯선 이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뭐야. 귀신이야?’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남자의 출현은 뜬금없었다. 물론 쬐깐한 키에, 그 키를 훨씬 넘는 거대한 할버드를 오른쪽 어깨에 걸친 남자 귀신 따위,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지만. 여유롭게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형식상 항복을 종용하려던 찰나였다. 문득 한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잠깐. 저쪽에 분명 파수를 세워 놨는데?’
그것도 다섯 명이나. 다음 순간 그의 눈에 남자가 든 할버드의 도끼날이 들어왔다. 시뻘건 피가 날을 타고 뚝뚝 흐르고 있었다. 웬 피지? 싶은 순간 할버드는 이미 그의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어?”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담배를 쥔 검지와 중지에 화끈한 통증이 일어나나 싶더니 세상이 깜깜해졌다.
“쳐라!”
눈 깜빡할 사이에 자신들 사이에 뛰어든 남자를 보고 경악한 제국 병사들이 외쳤다. 채챙, 검들이 즉각 검갑을 빠져나왔다.
재빠른 대응에 오히려 포위된 형국이었지만 남자는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할버드를 휘둘렀다.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치는 일격에 제국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상체에서 피를 뿜어댔다. 오른쪽으로 돌며 자신을 덮치는 피를 피해낸 그는 그대로 그 방향에 있던 적에게 할버드를 내리쳤다. 체중과 원심력이 실린 도끼날이 두개골을 쪼개고 가슴까지 박혔다.
적병들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창을 든 놈 하나가 남자 뒤에서 등허리를, 검수 하나가 머리를 노렸다. 남자는 시체를 걷어차며 할버드를 뽑고, 왼쪽으로 돌았다. 왼손으로는 찔러오는 창을 잡고, 오른손에 든 할버드는 검수에게 휘둘렀다.
챙!
“윽!”
압도적인 힘에 검을 쥔 병사가 검을 떨어뜨리며 물러났다. 창은 아슬아슬하게 남자를 찌르지 못하였다. 약지와 소지가 없는, 세 손가락밖에 없는 손인데도 병사는 창을 찌르지도, 빼지도 못하였다. 이어 날아온 일격에 병사의 목이 댕강 잘려나갔다.
“죽여!”
“한꺼번에 덮쳐!”
순식간에 셋이 죽자 구경만 하던 주위의 병사들이 가세하였다. 그중에는 당연히 기사와 마법사도 있을 터.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검수를 마저 추격해 무자비하게 처치하였다. 그리고는 몰려드는 적을 향해 뛰어들었다.
재앙이 시작되었다.
서른 명 남짓 되는 제국군 중 남자의 일격을 제대로 받아내거나, 하다못해 접근이라도 하는 자는 손에 꼽을만 했다. 태반이 도끼날에 살이 찢기거나 뼈가 박살났고, 창날에 꿰인 뒤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심지어 기사조차.
“물러나라! 마법으로 상대해!”
제국군 장교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마법사들이 마법을 발현하였다.
[환상-실명!]
[적-화염구!]
환상 마법은 사내에게 작용하였으나 루비색 눈에 한 번 빛이 돌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뒤이어 화염구를 비롯한 갖가지 전투 마법이 그를 덮쳤다.
콰콰쾅!
굉음과 함께 피어오르는 연기에 난쟁이 괴물의 모습이 가려졌다. 제국군은 긴장과 기대가 섞인 얼굴로 연기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해치웠나?”
이내 연기가 걷히자 장탄식이 이어졌다.
괴물은 쓰러지지 않았다. 쓰러지기는커녕 옷깃에 남은 불씨를 제하면 마법이 시전 됐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멀쩡하였다. 저 괴물은 마항력조차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압도적인 실력과 비정상적으로 강한 마항력. 전의를 상실한 제국군 장교가 이를 갈며 외쳤다.
“빌어먹을…… 퇴각해라. 퇴각해! 다음 지점에서 집결한다!”
장교의 명령에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괴물이라도 저 짧은 다리로 모든 병사를 추격할 순 없을 터. 현명한 선택이었다. 분명코 살아남을 확률이 비약적으로 늘어났으리라.
상대가 형이 아니라 동생이었다면. 그들의 불행은 상대가 껄렁대는 동생이 아니라 용의주도한 형이라는 점에 있었다.
제국군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자마자 화살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쐐액- 쐑!
“아악!”
“매복이다!”
“흩어지지 마라! 매복이 있다!”
뒤늦게 기사가 명령했지만 너무 늦은 의침이었다. 이미 병력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완벽히 흩어진 상태였고, 키프로스 명사수들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결국 제국군은 한 명도 남김없이 차가운 바닥에 몸을 뉘여야 했다.
적이 모두 쓰러지자 수풀에서 푸른 군복을 입은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등에 맨 거대한 장검 덕에 이름보다는 ‘빅소드’라고 불리는 이 사내는 제국군을 학살한 괴물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고생하셨습니다, 헨리 경.”
빅소드는 험악한 인상과 달리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할버드를 어깨에 걸친 헨리는 눈만 돌려 그를 보았다. 시선을 느낀 빅소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손가락을 잃은 헨리는 그 전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다. 본디 무뚝뚝하긴 했어도 이렇게까지 성격이 각 지진 않았었는데. 이젠 뭐랄까…… 사람 같지가 않달까. 제국군이나 키프로스군이나 그를 보는 시선이 별반 다를 게 없을 지경이었다.
그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그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오즈릭 공이 찾으십니다.”
“…….”
빅소드의 말에 헨리는 시선을 거두었다. 명백한 거부에 빅소드는 볼을 긁적였다.
2년 전, 동부 전선 총사령관 오즈릭 2세가 죽었다. 알키비르 공방전 당시 풍문에게 입은 부상 때문이었다. 그보다 부상을 돌보기보단 임무에 집중한 탓이겠지만. 후임으로 올해 서른두 살인 오즈릭 3세가 결정되었다. 새파랗게 어린 ‘낙하산’은 모두에게, 특히 헨리의 경멸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좀 심하다 싶긴 하지만.’
사령관 교체에 가장 신경 안 쓸 것 같던 사람이 이런다. 의아하긴 해도 최근의 변화 때문에 그는 그러려니 생각하고헨리의 뒤를 따랐다.
“급보가 또 들어와 있습니다. 북쪽, 청색산맥 인근에 그루크 볼턴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헨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하였다. 생기가 전혀 없는 목소리였다.
“바르그 볼턴의 아들인가.”
“예에…… 애송입니다. 그래도 제 아비 덕에 병사는 꽤 많은 거 같습니다. 한 오십 명 정도?”
드라고노프의 영주 바르그 볼턴은 최근 급부상한 맨드빌 후작의 왼팔이다. 무력과 교활함, 그리고 잔혹함마저 겸비한 그는 행방불명된 풍문의 빈자리를 완벽히 메우고 있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적을 농락하는 아비와 달리 그 막내아들은 쉽사리 빅소드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미숙한 경험 탓인지 아비의 지혜를 물려받지 못한 것인지. 어느 쪽이건 그것이 그의 죽음을 불러들일 것이다.
“증원은…….”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지금 이 근처에 있는 빅소드 휘하 병력은 서른. 반면 적은 오십 명이다. 백이나 천 단위의 백병전이면 모를까 소수 대 소수라면 무조건 제국군이 유리하다. 수적 우위를 그쪽이 점한다면 더더욱. 그런 면에서 볼 때 증원 없이 그루크를 치는 건 자살 행위다. 암만 그가 애송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빅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가는 헨리를 보를 그의 눈엔 무한한 신뢰가 가득했다.
손가락 두 개를 잃었음에도 헨리는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의 날랜 움직임과 현재의 압도적인 힘이 결합한 지금, 그의 전성기는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드히라스가 아닌 게 아쉽군.’
키프로스 최고 전사에게 주어지는 과실은 결코 작지 않다. 현 드히라스 알키비르인 다니엘 델린저를 보라. 명성, 명예는 물론이요, 최고 권력자인 콘월 공작의 정치적 후원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온갖 혜택을 받고 있지 않은가. 그 휘하에 있었다면 그 온갖 혜택의 떡고물이라도 챙길 수 있었을 텐데.
부하가 뒤에서 노골적인 시선을 던지건 말건 헨리는 제 갈 길을 걸어갈 뿐이었다. 빅소드와 어디선가 나타난 서른 명의 키프로스 병사가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