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도착한 기사단이 방벽을 깨고 진입했습니다만, 이미 전부 사라진 후였습니다. 인근 순찰 중대장이 순찰자 50명을 이끌고 직접 흔적을 분석했지만 상대가 제국군이 아니란 사실과, 흔적이 청색 산맥으로 이어졌단 것밖에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전령의 말을 가만히 듣던 로저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제국군이 아니다?”
전령이 끄덕였다.
“예. 다수 대 일에 능숙한 놈들 같다 햇습니다.”
“다구리에 능한 놈들이라……. 확실히 제국군엔 없는 놈들이긴 하네.”
“혹시나 로저 경은 아실까 해서 여쭤본 겁니다.”
“짐작 가는 놈들은 있지만……. 아무튼, 나 이제 가도 되지?”
“어딜…….”
“어디긴 어디냐. 12분 먼저 태어나셨다 120년은 먼저 가시게 생긴 우리 형님 찾으러 가야지.”
전령은 다급히 자리를 일어서는 로저를 붙잡았다.
“안 됩니다.”
로저가 신경질적으로 팔을 뿌리쳤다.
“왜 안 돼, 임마. 어딜 하전사 계급장도 없는 자식이.”
“사령관님의 전언입니다. ‘수색은 순찰 중대가 전담 할 테니, 로저 경은 남은 휴가 잘 보낼 수 있도록.’”
“사령관이? 오즈릭이 그딴 소릴 했다고?”
로저는 인상을 찡그렸다. 청색 산맥은 보통 넓은 곳이 아니다. 고작 순찰자 몇 가지곤 택도 없을 터. 그걸 오즈릭 3세가 모를 린 없을 텐데.
잠시 생각하던 로저는 학교 응접실 구석에 있는 ‘무언가’에게 말을 걸었다.
“야.”
“…….”
“야!”
“…….”
“야, 새꺄. 대답 안 해?”
“…….”
“이게 쳐 돌았나.”
뻥! 제 집마냥 소파를 차지하고 있던 앤더슨이 ‘컥!’하며 일어났다. 소파 위에서 부들거리는 그를 본 로저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너 뭐하냐?”
“우…… 카아아아아……. 잠만. 지금 뒤지겠거든? 그러니까…….”
“너 지금까지 우리 얘기 들은 거 맞지?”
“뭔 무슨 얘길 했는…… 잠깐, 잠깐. 형, 우리 이러지 말자.”
“자, 지금까지 들은 거 3초 안에 3줄 요약 안 하면 여기서 죽는 겁니다.”
“헨리 형이 뒤졌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근데 사령관은 형은 그냥 가만히 있으라 하고, 형은 독단적으로 형 찾으러 간다. 그 수색에 나 끼워 팔라 한다. 맞잖아. 그치?”
내리꽂히려던 주먹이 딱, 멈췄다.
“그래서 답은?”
“응, 안 해. 남이사 죽든가 말든가.”
잠시 주먹과 앤더슨을 번갈아 보던 로저가 얼굴을 푸들거리며 말했다.
“이 개새끼가……. 그게 할 소리냐? 엉?”
“왜 이러신대.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우애 넘치는 관계였다고. 아니 그것보다.”
부스스 일어난 앤더슨은 슬그머니 로저에게 다가오더니, 자세를 숙여 로저의 이마에 제 이마를 쿵 맞댔다.
“이 순진한 엉아야, 이렇게 상황극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어떻게든 나 끌어 들일라고 수작 부리는 거? 으이구, 행님아, 그 빌어먹을 연기 연습이나 좀 더 하고 오세요. 내가 이런 거 한두 번 겪은 줄 알아? 헨리 형 위험하단 거도 구라지?”
“……티 나냐?”
"예, 티 아주 많이 나십니다.“
낄낄 웃어댄 앤더슨이 이마를 떼고는, 손을 흔들며 응접실 문고리를 잡았다.
“잘 있으셔. 다음엔 연기 실력 좀 올리고. 그럼 나……아아아악!”
쾅!
“로저 오빠!”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거세게 열린 문이 앤더슨의 콧등을 후려쳤다. 문을 열고 등장한 아리엘은 바닥을 나뒹구는 그에게는 눈길도 안 주고 로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가 들은 게 맞아요? 스승님이 위험하단 거?”
“그거 구라…….”
“맞아.”
로저는 즉시 앤더슨의 말을 끊고는 그를 보았다.
“딴 건 몰라도 헨리가 위험하단 건 진짜야. ‘청색 산맥’에 있단 것도.”
아리엘은 로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왕국군은요? 고작 오십 명 풀어놓고, 땡이에요? 스승님 훈장이 몇 갠데…….”
“응, 그렇지. 훈장.”
로저는 새삼스레 자기가 입은, 훈장이 빼곡한 헨리의 군복을 보았다. 이 양반, 참 스펙타클하게 살긴 했군.
“이 비열한 늙은이. 애초에 날 노린 게 아니었구만?”
코를 이리저리 비트는 바람에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앤더슨의 말에 로저는 씩 웃었다.
“너 노린 거 맞아. 그래서 아리엘, 갈 거지?”
“당연하죠!”
“자, 다시 너. 갈 거지?”
“예, 예. 아무렴요. 빌어먹을 난쟁이 똥자루 같으니.”
“흠, 흠. 이거 참 기묘하군.”
발자국을 살피던 갈색 비늘의 리저드맨이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옆에 있던 빅소드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흠. 무슨, 일이라기보단.”
리저드맨은 머리를 까딱였다.
“흠, 흔적이 무슨 순찰, 순찰자랑 순찰자 같애. 흠, 흠. 헨리 경, 이야 원래 숲의…… 흠, 종족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제국놈들은…… 순찰자는, 아닌데, 흠, 순찰자랑 비슷해. 추적하는 게. 그래도 흔적 지우는, 지우는 건 미숙하군. 어설퍼. 흠, 그건 다행이지.”
리저드맨은 말하면서도 계속 ‘흠, 흠’거리며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던 그는 이내 푸념을 쏟아냈다.
“그보다 청색 산맥에서 우리만으로 추적하라니. 흠. 말이 되나. 흠, 흠. 흔적 끊기면 그거 찾고 추적하는데 얼마나, 흠, 흠. 피똥 싸는지 알기는 하는 건지. 흠.”
“인력도 인력입니다만.”
빅소드는 목소리를 낮추며 리저드맨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보다 배신자들이 문제입니다. 최근 대규모 감사 결과 군 내 첩자 수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단 게 드러났잖습니까. 혹 순찰 중대에도…….”
가만히 듣고 있던 리저드맨은 녹색 눈으로 빅소드를 똑바로 보았다. 파충류 특유의 무심한 세로 동공이 자신을 향하자, 빅소드는 심장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나름 강심장이라 자부하는 그조차.
“흠, 흠, 흠. 순찰 중대장 앞에서, 흠, 할 말은 아니, 군.”
빅소드는 급히 손사래 쳤다.
“혹시나 해서입니다. 혹시나! 아무렴 제가 쿠인 경을 무시했겠습니까. 그저…….”
“됐소.”
쿠인은 시선을 거두고 다시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짧은 말을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남겨놓고선.
“사실이니까.”
“……예?”
남겨진 빅소드는 멍하니 쿠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쩐지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면, 착각일까?
아니, 그것보다 그는 쿠인이 한 말의 파장이 더 무서웠다. 키프로스 육군 최정예 부대인 순찰자 내에, 배신자가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군부는 물론이요, 정치계까지 발칵 뒤집히게 될 터.
‘잘못 들은 거겠지.’
머리를 휘휘 저어 생각을 떨쳐낸 빅소드가 묵묵히 쿠인의 뒤를 따랐다. 그 뒤로 이젠 모든 행동이 의심스럽게 보이기 시작한, 오십 명의 순찰자가 따라왔다.
그때 쿠인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었다.
“흠, 여기군.”
쿠인이 멈춰선 것은 한 커다란 나무 앞이었다. 두 눈을 부릅뜬, 이마에 십자 문양이 새겨진 머리가 나뭇가지 밑에 걸려 있는.
“여보시오, 정보장교. 흠, 이 청색 산맥의, 흠, 별명을 아시오.”
빅소드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악의 발상지’…….”
쿠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곳은 각양각색의 마수와 괴물들이 판치는 곳이, 흠, 요. 괜히 고대에 이계의, 흠, 문이 열렸단 소문이 도는 게, 흠, 아닐 정도로. 알키비르가 청색 산맥을 끼고 있는, 있는 것도, 이 청색 산맥의 괴물들 때문이란 건, 알고 있겠지.”
“그럼 이자는?”
“맞소. 마수(魔獸)요. 우리가, 흠, 찾던 놈이 맞는 것, 같군. 방금 죽었, 소.”
“방금 죽었다고요?”
빅소드는 나무 위에 걸린, 팔 한쪽을 제외하고 뼈만 남은 시체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방금 죽은 시체가 저 지경이란 말인가. 뭔진 몰라도 식성 하나는 끝내주는 놈이군.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추적자는 ‘놈’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거미줄 표범(Cobweb Panther), 이요.”
한쪽 무릎을 꿇어 발자국을 살피던 쿠인이 말했다. 빅소드가 놀라 물었다.
“표범? 어떻게 알았습니까?”
쿠인은 손가락으로 발자국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말해주었다.
“흠흠. 일자걸음, 숨긴 발톱, 을 보면. 흠, 고양이과 마수. 표범이란 건, 흠, 느낌.”
“느낌.”
“청색 산맥에서, 흠. 가장 흔한 마수요. 가장 위험하기도.”
쿠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 근처에, 있군. 여기서 쉬었다, 흠, 갑시다.”
“이동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괜스레 불안해진 빅소드가 말했다. 그를 흘끗 본 쿠인이 근처 나무에 털썩 앉았다.
“이동 중, 당한 거요. 저, 시체.”
“아, 예…….”
얼굴을 찌푸린 채 휴식 준비를 하는 순찰자들을 보던 빅소드는, 마뜩잖은 기색으로 쿠인 옆에 앉았다. 나 원, 갈 길이 바쁜데 한가하게 휴식이라니. 이미 포식한 맹수가 뭐가 위험해서. 하지만 추격대장이 쉬자는데 외인인 그가 반대해서 어쩌겠는가. 게다가 상대는 계급조차 ‘씹어먹는’ 순찰중대장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쿠인은 두 눈을 감으며 청각과 후각을 집중하였다.
주변 어딘가에서 느껴지던 살기가 사라질 때까지.
그것은 한참 동안 남아 있었고, 사라진 후에야 그는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하였다.
사실 그는 빅소드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표범은 아주, 아주 오랫동안 굶주렸다는 것. 아마 경쟁에 밀린 표범이 운 좋게 인간을 습격해 사냥에 성공했을 테지. 그리고 언제 찾아올지 모를 그 운을 다시 잡기 위해 집요하게 우릴 노릴 테고.
하지만 맹수도 제 목숨 아까운 줄은 안다. 빈틈이 없다면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진 않으리라. 그리 판단한 쿠인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가 문제군. 추격이 더 길어지겠어…….’
험한 산맥임에도 헨리는 믿을 수 없이 빨랐고, 그 뒤를 쫓는 제국인들도 순찰자 못잖게 빠르다. 그런 놈들을 섬멸하는 것도 문제지만, 산맥에 체류하는 기간이 길수록 산맥에 삼켜질 가능성은 점점 커진다.
‘거기에 놈들을 추적 섬멸하라니. 어떤 적인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거늘.’
미지의 적, ‘위험하다’는 말은 백 번도 부족한 산맥, 거기에 ‘헨리 마일로를 찾아 보호하고, 적은 섬멸하되 그루크 볼턴은 가능한 한 생포할 것’이라는 막무가내식 명령. 이건 도대체, 우리보고 죽으란 말과 진배없지 않은가.
어쩌랴.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쿠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모두, 이동! 흠! 추격, 재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