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둔지 인근에는 예상대로 병사들이 매복해 있었다. 아마 그들의 주요 임무는 제국군의 지원 차단과 침투군 퇴로 차단이겠지만, 세 사람과 같은 목적의 침입자를 경계도 있을 터. 발각되면 결코 호의적인 반응을 얻진 못하리라. 그렇다고 대 침투 작전에 이골이 난 키프로스 병사들의 이목으 ㄹ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눈’을 써야 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로저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너네, 도대체 뭐 하고 다닌 거냐? 뭔데 이리 순찰자 뺨치게 은밀해?”
앤더슨이 대수롭잖다는 듯 말했다.
“야밤에 나가다 주지 스님한테 걸린 경험이 세 번쯤 되면 형 같이 말 못할걸.”
“자랑이다, 이 새끼야.”
로저는 앤더슨의 말에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엘에게 꿀밤을 먹였다. 그리고 빗나가는 주먹.
“어럽쇼. 허허, 이놈 보게.”
“이년이겠죠. 바보.”
주먹을 피하고 혀를 날름거리는 소녀의 모습에 미묘하게 짜증이 났다. 어라? 이거 뭔가 익숙한 장면인데? ……역시 이 녀석들, 닮긴 닮았단 말야.
로저는 질렸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말을 말자, 말을. 흔적 분석이나 해봐.”
주둔지에 난 핏자국과 지워진 흔적을 보고 한 말이었다. 코를 헹, 푼 앤더슨이 말했다.
“싸웠네.”
“아이구, 대단하셔라. 참 대단한 거 알아내셨네.”
로저의 조롱에도 앤더슨은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일단……. 제국군은 아냐. 몸이 가벼운 놈들이군. 갑옷을 안 입었어. 그리고 이건…… 줄다리기라도 했나? 끌린 흔적이 있는데. 어이구야, 힘도 좋으셔. 노친네 아직도 팔팔한데 어떻게 묶어놨대.”
끌린 흔적은 지워진 흔적 사이로 희미하게 보였다. 바닥을 훑은 앤더슨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로저를 돌아보았다.
“뭐, 왜.”
“형, ‘성 동포회’라고 혹시 알아?”
“그게 뭔데?”
아리엘의 물음에 앤더슨은 코를 쓱 문질렀다.
“형 알 거 아냐. 말해줘.”
“……제국 십자회 소속 자경 단체야.”
로저는 ‘왜 내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제국 내 치안 유지, 이단 척결, 범죄자 추포 따윌 하는 놈들이지. 가장 중요한 게 마지막, 범죄자 추포야.”
“추포가 뭔데?”
“추적해서(追) 잡아들인다고(捕). 사냥이랑 똑같다고 보면 돼. 짐승 사냥이 아니라 인간 사냥이지만. 헨리가 괜히 도망친 게 아니구만……. 그놈들 서른이면 고전 할만 하지. 다수 대 일에 특화된 놈들이니.”
“다구리 잘한단 소리네?”
“고렇…… 넌 애가 뭔 그런 말을 다 아냐?”
로저의 훈계는 앤더슨이 적절한 타이밍에 끊어주었다.
“형, 이거 봐. 흔적이 좀 변했는데?”
“어떻게?”
앤더슨은 입술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손가락으로 발자국을 짚었다.
“양쪽에서 헨리 형을 묶었어. 묶고……. 흠, 글쎄. 이건 느낌적인 느낌이라 설명하기 어려운데. 암튼 뭔가 바뀌었어.”
“칼이야.”
아리엘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그 꼽추 아저씨랑 마지막으로 싸우고 할버드 제작했잖아. 가벼운 검으로는 못 이긴다고.”
로저가 까끌까끌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랬지. 풍문이랑 몸무게 차이만큼 무겁게 만들어서 더럽게 무거웠지.”
“어라? 헨리 형은 그 꼽추 새끼 무게는 어떻게 알았대? 혹시 새 인생을…… 윽!”
로저는 헨리의 뒤통수를 마구 후려갈겼다.
“눈대중, 눈대중 새꺄! 하여간 매를 벌어요, 매를.”
“아, 쫌! 조용히 좀 해!”
아리엘이 일갈하자 두 사람은 입을 다물며 뒤로 찌그러졌다. 발자국을 살피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암튼 그래서 스승님이 칼을 뽑으면 흔적이 바뀌어. 잘은 몰라도……. 무기의 무게 차이 때문 아닐까? 아니, 그것보단 내가 봤을 땐 보법 같아.”
“보법?”
아리엘은 앞으로 이어진 헨리의 흔적을 짚었다.
“물론 할버드 쓰실 때도 보법을 안 쓰는 건 아냐. 그치만 아무래도 검을 쓸 때보단 덜할 테니까. 그래서 느낌이 달라지는 걸 거야.”
“흐음, 그런가? 그 양반이랑 칼 섞어본지 워낙 오래돼서 고건 몰랐네.”
중얼거리던 앤더슨은 아리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왬마.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스승님이랑 싸워본 적 있어?”
“어. 한 번.”
“누가 이겼는데?”
앤더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다음 흔적은? 칼 뽑고 상황은 좀 변하셨나?”
“결과 알잖아. 말 돌리지 말고.”
‘얍!’하고 아리엘의 발길질을 피한 앤더슨이 말했다.
“몰라, 그런 거. 알아서 뭐하게.”
“그냥. 궁금해서. 발렸지?”
아리엘의 도발에 앤더슨은 코웃음 쳤다.
“뭐래. 그 꼬맹이 노땅한테 지면 사람 새낀가…… 아아악!”
창대로 머리를 후려갈긴 로저가 앤더슨의 귀를 주욱 잡아당겼다.
“야, 잠깐만. 듣다 보니까 빡치네. 걔가 꼬맹이 노땅이면 나도 꼬맹이 노땅이잖아? 그리고 뭐? 헨리한테 지면 사람 새낀가? 이놈 시끼 이거, 사상이 도대체 어디까지 불순한 거야?”
“아아아! 안그럴게요안그럴게요안그럴게요! 형님! 놓고 얘기합시다. 놓고!”
“무기 버리고 무릎 꿇어!”
마지막 말은 명백히 아리엘이나 로저의 것이 아니었다. 주둔지 입구에 몰려드는 푸른 군복의 군인들……. 그들을 본 아리엘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소리쳤다.
“내가 못 살아. 내가 주둥이 좀 닥치랬지!”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따라와. 이쪽이니까!”
아리엘이 서북쪽을 향해 내달리자 그 뒤를 로저와 앤더슨이 따랐다. 몰려드는 키프로스 군인들이 그들을 따라 산맥을 올랐다.
“놓쳤습니다.”
흔적을 찾던 성 동포회 병사가 말했다. 그 말에 그루크가 질렸다는 투로 말했다.
“이건 정말 예상 밖인데. 무슨 놈의 노친네가 이리 팔팔 뛰어? 산삼이라도 주워 먹었나?”
“그래도 다릴 다쳤으니 얼마 가진 못했을 겁니다.”
병사의 말에 그루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추격술의 달인인 성 동포회를 따돌릴 순 없다. 그 증거로 그들은 한 시간 전 헨리를 따라잡았잖은가. 교전 와중에 틈을 보아 도망친 순발력은 분명 칭찬함직 하나, 그 순발력도 이제 끝이다. 그 짧은 다리 하나마저 걸레짝이 됐으니.
“흩어져서 찾아봐. 다리 다친 난쟁이가 흔적 숨길 새가 어디 있겠어? 뛰기 바쁘겠지. 피 냄새건 발자국이건 나뭇가지 꺾인 자국이건 남아있을 거라고.”
“옛.”
한 목소리로 복명한 성 동포회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루크를 비롯한 십자회 성기사 스물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한 늙은 성기사가 그루크에게 다가와 말했다.
“마일로는 그렇다 치고, 지금쯤 우리에게도 꼬리가 붙었을 걸세. 그쪽은 어쩔 셈인가?”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그루크가 씩 웃었다.
“얼마 전에 빅터가 그러더군요. 사냥 중인 사냥꾼은 자신이 사냥감이 된 건 아닌지 의심해봐야 된다고.”
“……?”
노기사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그 경우를 물어본 게 아닌가. 그러나 곧 그는 깨달았다. 그 말은 그들을 쫓는 키프로스군에게도 해당된다.
“우리 유능한 첩자님께서 추적대 규모부터 인원 구성까지 세세하게 알려줬지요. 2군단 소속 순찰중대(Ranger Company) 50명. 구성은 순찰대(Patrol Party) 7개 조와 강습대(Assault Party) 3개 조. 추격대장은 중대장 쿠인. 그 휘하로 순찰중대 부중대장, 순찰대장, 강습대장. 생각보다 거물을 보내서 놀랐지만 뭐, 그만큼 우리 공이 느는 거니까.”
“그래도 순찰자 오십이면…….”
성 동포회가 절반인 이 구성으론 이기기 힘들다. 우려 섞인 말에 그루크는 쯧쯧, 왼손 검지를 흔들었다.
“쯧쯧. 걱정이 이리 많아서야. 추적대 내에는 우리 사람이 적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선 늙은이부터 잡고, 적당한 데 매복해서 공격하면 우리 사람들이 호응해줄 겁니다. 그나저나 얘넨 왜이리 안 와?”
말하기가 무섭게 저편에서 성 동포회 병사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보던 그루크의 표정이 굳었다. 선두의 병사들이 끌고 온 ‘그것’ 때문에.
털썩
성 동포회 병사 여섯이 침통한 얼굴로 시체 셋을 그루크 앞에 눕혔다. 시체들을 잠시 보던 그루크가 휙 그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분명 세 명씩 조 짜서 경계 철저히 하라 했을 텐데?”
“마수 짓이 아닙니다, 자작님.”
성 동포회 대장이 나서서 말했다.
“아하, 마수가 아니다? 변명이 된다 생각하나, 형제?”
“자작님, 저희는 맹세코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비명도 없이 당해서…….”
“이건……. 순찰자군요.”
죽은 이들을 살펴보던 늙은 성기사가 말했다.
“뒤에서 머리를 잡아 비틀고, 단검으로 경동맥을 찌른 뒤 목을 땄습니다. 저 친구들 말이 맞습니다. 기도가 잘렸으니 비명도 못 질렀겠죠. 디아우스시여, 부디 이들을 품어주소서…….”
“순찰자라.”
흥분을 가라앉힌 그루크는 오른쪽 주먹을 입술에 댄 채 생각에 잠겼다.
‘이거 한 방 먹었군. 설마 특공조가 먼저 다가와 우릴 치다니.’
자, 일단 침착하자. 계획대로만 하면 된다. 적 추격대에 있는 첩자들이 신호를 보내지 않은 걸로 보아 본대와는 거리가 멀다. 놈들은 기껏해야 두셋 정도. 발목을 잡을 셈이야. 공갈 협박을 하는 거지. 우리가 계속 노리고 있다. 그러니 신중해야 할걸? 하고. 무시하고 헨리를 잡아들인 뒤, 매복해 쓸어버리면 된다. 계획대로 하자. 계획대로……. 아니.
계획은 항상 바뀌는 법이지.
“모두 주목.”
생각을 마친 그루크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속도를 늦춘다. 주변에 적이 있으니 주의하면서 움직이도록. 절대 더 이상 죽어선 안 된다.
“옛!”
“자, 추격 재개하지.”
명령하는 그루크의 얇은 입술에 잔인한 웃음이 피어났다.
‘당장은 너희 의도에 놀아나주마. 너희가 우릴 사냥감이라 생각하도록…….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알게 될 거야.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사냥감이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