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전부 없어져 버렸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역시 아름다움은 한 순간이고, 이렇게 다 없어져버린 후에는 정신이 혼미해져버린단 말이지.
장엄한 모습을 뽐내며 그 위용을 숨김없이 드러내던 성채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마 성채를 짓기 전에 터를 잡기 위해 만들었을 직사각형의 거대한 바닥만이 마왕성의 존재를 증명해준다. 그럼에도 삭막함과 적막함, 방금 전까지 있었던 기둥이 사라졌다는 허무함은 씻어낼 수 없었다.
"─마치 어제 꾼 꿈 같네."
"꿈이요?"
물론 당연하게도 평범한 꿈은 아니다. 미믹으로 태어난 이후부터 보이는 대로 이것저것 많이 먹곤 했는데, 아무래도 그 아이템 중 이상한 놈이 섞여있었는지 꿈조차 편히 못 꾸게 되어버렸다.
"'예언의 꿈'이라고, 먹은 아이템 중에 골치 아픈 능력을 가진 보물 때문에 매일 밤 꾸는 꿈이 있어."
"아니, 마물이 꿈을 꾸고, 심지어 그 꿈의 내용이 구체적이라는 사실에 놀랍네요. 자세히 들려줄래요?"
"나도 초면에 미믹을 두드리며 '계세요?'라고 묻는 모험가는 충분히 놀랍다만."
에피소드는 빙긋 웃으며 내 앞에 다리를 포개고 앉았다. 그 와중에 먼지로 원피스가 더러워지는 걸 막기 위해서 사용한 바람 마법의 영창이 단지 '핫!'이라니. 이 정도면 자고 있는 드래곤도 '주무세요?'라고 깨우지 않을까. 무서운 인간.
그렇게 나름 눈높이를 같게 맞추고, 수첩을 꺼내어 적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꿈'에 대해 더 알려달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아니, 내 눈높이는 정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거대한 마왕성이 무너지는 꿈. 이것보다 더 크고 장엄한 마왕성이 하나의 거인이 쓰러지듯, 침식하고 붕괴하는 꿈─ 이건 거의 매일 꾸는 정도라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오늘에야 일어나다니. 아, 참고로 너를 닮은 사람도 나왔어."
"저요? 저는 어떻게 나왔죠? 저도 더 멋진 모습으로?"
이것도 매일 꾸던 꿈이라서 사실은 이거 예연이 아니라 그냥 다른 모험가의 기억을 투영해주는 거 아니까─싶었다.
역시 이 여자를 만난 거나, 마왕성 붕괴를 보면 확실히 예언의 꿈이 맞는 것 같네.
잘 떠올려보면 엄청 닮았으니.
"교사....였던 것 같은데. 고풍스러운 학원에서 마법이랑 여러 가지 잡학을 알려주다가 종종 같이 산책하는 꿈을 꿨어. 너랑 다르게 안경은 안 썼는데, 다른 부분은 본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
"어라, 선생님이라니. 나중에 제가 당신에게 한 수 가르쳐줘야 할 때가 올 거라는 말인가요."
"예언은 시간 순이야. 헛소리마"
그 아쉽다는 표정도 어떻게 좀 해라. 이래봬도 마물인데 인간에게 가르침이나 받고 있어야겠냐.
"그리고 이제 곧 헤어질 건데, 무슨 교육."
"예? 같이 갈 건데요?"
내가 평범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했다는 듯이 놀라지 말아줄래?!
"어이, 몬스터랑 인간이랑 동행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마물! 그리고 제 이름은 에피소드!"
"거참 깐깐하네─! 에피소드! 나는 마왕성으로 갈거라고?!"
서둘러 뚜껑을 열고 안에 넣었던 에피소드의 가방을 꺼내려고 했더니, 안 됀다며 양 손으로 부풀어 나오고 있는 가방을 다시 밀어넣는다. 재차 손으로 밀어넣어봤자 내가 넣으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어차피 무겁지도 않잖아요!"
"그 괴력이면 네가 들어도 안 무거울 껄?"
아까 남자냐고 물으며 가방 안의 내용물을 보지 말아달라는 순간의 조신함은 어디로 간거냐.
일단, 틀린 말도 아니고 이런 일로 힘 낭비를 하는 것도 귀찮으니 가방을 도로 집어넣는다. 다시 논점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반적인 사람이나 마물이 가진 상식'부터 확인했다. 이제와서 새삼 묻는 것도 이상하지만─
"마왕성이 뭔지는 알지?"
"예. 제 직업이 몬스터 조사관인데, 마물 관련으로는 완전히 꿰고 있죠."
"마왕은 뭔지 알아?"
"물론이죠. 마왕의 유형에는 대게 4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천성적으로 거대한 양의 마나, 또는 마력이나 순수한 힘을 가지고 태어나는 '엘리트[Elite]'. 두 번째는 노멀[Nomal]이나 레어[Rare]의 개체가 모여서 군락을 이룬 뒤, 지성이 높은 개체를 우두머리로 추대하는 경우. 세 번째는 엘리트 이하의 개체가 숱한 전투를 거치면서 용병[Veteran]이 된 후, 소규모 파티를 구성하는 경우. 마지막은─"
별로 저렇게 장황한 설명을 요구한 건 아닌데, 역시 이쪽의 의도를 모르는 걸 보아 말이 안 통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겠다.
그래도 끝까지 들어주기로 했다. 나중에도 신세질 성의 주인들의 타입이니까. 각 유형의 성격에 따라 미믹으로서 상대할 모험가도 달라지니까. 전투광인 유형은 아무래도 피곤하잖아?
"─마물이 아닌 종족이 문명을 벗어나 타락하는 것."
"그건 단순한 악인 아니야?
마물하고 인간하고 다른 점이라곤 단지 생김새가 다를 뿐인데, 그런데도 '마물이 아닌 종족'이라 대놓고 따로 유형을 구분한다니, 아아 세상은 어쩜 이렇게 인간 중심적인지.
"아뇨. '지성을 가진 존재'가 타락한다는 말은 단순히 악인에 그칠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보다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인간을 적대시하죠. 재앙 그 자체입니다. 다시는 있어서 안 되는 마왕의 유형이죠."
말의 분위기가 달랐다. 책에 적혀있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구보다 치밀하고 계획적이게─ 마치 당해봤다는 듯한 설명에, '다시는'이라니. 깊게 파고들지 않는 걸로 했다. 같은 존재 내부에서'절대 악의 탄생'이 일어났다는 건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제 '인간'마저도 아군이 아니게되어버린, '신뢰'라는 말을 역사에서 오래간 지워버릴 사건이었겠지.
"뭐, 그건 그렇다치고. 그런 두렵고 강력한 마왕이 있는 장소로 갈거라니까?"
자연스럽게 아이템박스에서 모형 뿔을 꺼내서 머리에 다는 걸 보고, 몸의 일부를 움직여 엑스 사인을 보냈다. 꼬리까지 꺼내서 붙이는 걸 보고 '왜 그런 걸 마법의 공간 안에 넣는 거야, 쓸데 없잖아'라고 말했다가 여러모로 풀이 죽어서는 도로 아이템 박스 안에 넣는다.
"몬스터 조사관이라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냐? 그보다 직업 이름에만 몬스터라고 하는 거 물편하니까 마물로 통일하자. ─그 특유의 불만 표정 짓지 말고."
수 초간 고민 하더니 '마물 조사관이라도─'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마물 조사관이라도 수인과 마물을 헷갈리는 경우는 많아요. 그 차이를 결정하는 요소는 상당히 애매하니까 말이죠. 그나마 쉽게 구분하는 방법이 스테이터스 창을 쓸 수 있는지─였는데, 그마저도 미믹 씨가 부숴버렸네요."
"부쉈다니, 말이 너무한데. 나는 스테이터스 창을 마물이 쓸 수 없다는 사실조차 처음 알았거든?!"
"말 나온 김에 구경이나 하죠. 굳이 말하지 않아도 거부할 것 같으니 서로 보여주기로 하자구요? 스테이터스 오픈."
너무 막무가내이긴 했지만, 이걸로 저쪽의 스테이터스를 빌미로 마왕성까지 동행하기에는 짐짝이 된다고 거절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짧디 짧은 생각으로 스테이터스 창을 자신만만하게 켰다.
"스테이터스 오픈. ─아?!"
"훗─ 보나마나 약하다고 할 생각이었죠?"
예. 정말 짧디 짧은 생각이었습니다.
내 생각만큼이나 간략하게 에피소드의 능력치를 간추려 말하자면─
─클래스[Class]:대현자
대상의 전투 계열을 분류하는 항목. 직업과는 별개다.
─레벨[Level]:999[MAX]
대상의 경험 축적치를 분류하는 항목. 이에 따라 능력치도 상승한다.
─마나[Mana]:???/???[측정 불가]
대상이 마법을 쓸 때 사용하는 재원 중 하나로 재생 가능하다.
스테이터스란 '신의 은총' 중 일부로서, 인간의 질서와 규율을 잡기 쉽도록 만들어놓은 네모난 가상의 글자 적힌 유리판이라 보면 된다. 이른바 쉽고 간편한 절대적 신원 체계. 때문에 그 내용에는 거짓이 없으며, '예외'는 없다.
없어야만 하는데─
─측정 불가라니.
"....아니 잠깐만. 마력은 평범한 마법사랑 동급인데? 대현자라면 마법사의 상위 클래스 아니야?"
"아하하─ 그게 다 마나를 인정받아서 그럴 거랄까. 실제로 마력을 주로 쓰는 전투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999도 거의 제작 마법으로 올린 거죠. 의미는 없어요."
자기도 잘 알면서 용케 마왕성에 동행할 생각이었구나. 이 정도면 아무리 마법 주문 외는 속도가 빠르더라도, 고작 '하급 정령의 발길질'같은 스킬만 난사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 참고로 그 '하급 정령의 발길질'도 책에서만 봤지 실전에서 쓰는 모험가는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적당히 설득할 말을 찾던 도중 에피소드가 이쪽 스테이터스 창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첩은 손에 쥐어져 있지 않았다.
"혹시 읽을 줄 모르는 거 아니야? 마물의 스테이더스 창이라서 다른 언어로 되있는 것 같던데. 나도 내 이름이나 클래스조차 못 읽겠더라고"
"아─ 그렇죠. 숫자 말고는 잘 모르겠네요. 고대 룬 언어 정도일까요. 레벨도 이상한 언어지만, 두 자릿수인 것 같네요. 훗."
"─어이 방금 웃었지? 자기보다 낮다는 거냐? 뭣하면 지금 싸워볼래?!"
처음 스테이터스 창을 알았을 때부터 레벨은 고정이었다. 삶은 언제나 적당히 살아가자는 주의였던 나도 레벨 같은 수치에는 민감해서, 한동안 드래곤의 씨를 말릴 정도로 레벨수치을 쌓아본 적이 있었다. 다음 레벨까지의 공백을 드래곤으로만 채웠다가는 나중에 인간을 멸명시킬 종족이 없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어느 순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지금과 같다.
"레벨과는 별개로 당신이 강하다는 건 인정하죠. 하지만 여기서 결정적인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 뭐지?"
에피소드는 손가락을 지켜들고 내 얼굴─뚜껑이 열린 가장자리를 향해 고했다.
"미믹 씨는 '색적'스킬이 없습니다. 마왕성을 어떻게 찾을 생각이시죠?"
"그, 그러고 보니 너─!"
자신만만하게 보여주는 스테이터스 창의 하단부에는 '색적'이라는 스킬이 적혀 있었고 그 옆에는 위풍당당하게 3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MAX]라는 반박이 불가능한 절대적 수치가.
"이외에도 여러 잡다한 스킬을 가지고 있네. 이러니까 999레벨이 되도록 전투력이 낮은 거라고?"
"모험가들의 평균 레벨이 100정도인걸 생각해보면 전투력은 그다지 문제될 요소는 아니에요."
"─흘려들을 수 없는데?!"
"강한 마물의 평균 레벨도 대략 100 정도니까 미믹 씨의 레벨도 흘려들을 수 없다구요?"
"크, 크흠."
다른 인간은 넘볼 수 없는 마나의 재능을 가지고 999레벨까지 마법에 대한 노력이 없었다는 게 더 가상하다.
그건 그렇다치고, 확실히 전투력의 높고 낮음은 어찌되든 상관없다. 마물로서 스킬을 배우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인 내게 필요한 건 지도나 주변 지형지물을 수색하는 스킬 '색적'뿐이다. 약하더라도 그거야 내가 지키면 되는 거니까.
"─어때요? 마물 조사관으로서 마왕성의 위치 정도는 금방 찾을 수 있어요. 호위는 미믹 씨가 하면 문제 없구요."
처음부터 에피소드가 이걸 노렸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괜히 드래곤을 먹는다던가 말해버렸고, 스테이터스 창까지 보여줘서는 이래서야 내가 강하다고 스스로 광고한 꼴이다.
"....이것도 예언일려나."
"그 말은 수락의 의미로 받아드려도 괜찮은 걸까요?"
아아, 알아서 해라. 그런 느낌으로 몸의 일부를 움직이자, 순간 에피소드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단지 이거 하나만으로 웃는다고─?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워낙 별난 타입이니까 그러려니 받아드리기로 했다.
"다음 마왕성까지다?"
"네. 잘 부탁드려요."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보라빛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이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한 심산이었으나, 뒤늦게 내가 손이 없다는 고민이 빠진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우선 서로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스테이터스 창이 거슬려서 닫자고 제안을 해야했다.
에피소드의 뒤로부터 햇빛이 비춰왔다. 몸 형태를 똑같이 따라 그려나간 그림자가 내 옆을 아슬아슬하게 비켜지나간다. 뒤로는 황량한 성채의 잔재가 보여서 또다시 허무함에 빠져들 것만 같아서 돌아보지는 않기로 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 앞의 여자가 아직도 내게 악수를 청할 방법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검은 형상을 조금 움직여서 손 모양을 만들어 내민 채 갈팡질팡하고 있는 에피소드의 손바닥을 마주잡았다.
또다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대신, 나는 네가 들어야한다? 나, 색적말고 다리도 없으니까"
순간 어두워진 얼굴을 보고, 이내 서로 마주보고 베시시 웃었다. 어울리지 않는 이쪽의 목소리가 저주스러웠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동안 웃고 나서야 우리는 말을 옮겼다.
뭐 , 이게 그 여자─에피소드와 내가 만나게 된 계기이자 같이 모험을 시작한 계기였다.
아직도 인간과 마물이 저런 식으로 타협할 일이 언제 또 있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