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에 빠진 지우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노란 알을 깨고 늘씬하게 긴 하얀다리가 뻗어나오고, 화사한 금발을 지닌 나이스한 몸매를 지닌 서양 미녀가 살짝 고개를 내려 눈웃음치며 지우를 향해 웃는다.
“흠흠. 괜찮군.”
빨간 알을 박차고 정렬적인 붉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도발적으로 쏘아보는 갈색 피부의 건강미 넘치는 미녀. 그 탄력적인 허벅지로 도도한 걸음으로 지우에게…
“크흠. 어헛.”
인간은 상상하는 존재. 그 누구도 신체 건강한 청년의 망상에 태클을 걸수없다.
“어응?”
본인이 스스로 자킬을 하지 않는 이상.
상상의 미녀들의 얼굴이 어째 눈에 익는다.
그 남자의 영혼을 자극하는 만들어진 구도와 분위기.
“서, 설마 맥싱?”
남자의 친구. 흐뭇한 그것.
마지막에 탐독했던 최근호에서 봤던 아가씨들이었다. 갑자기 기운이 빠진 지우가 바람빠진 풍선마냥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아직 미련이 남았다는걸 알지만 하필 잡지에 미련이 남…
“그, 그래! 뭐가 나올지 모른다는거 잖아. 그게 중요한 거야!”
누군가를 향해 필사적인 외침을 내지르자, 동굴 벽을 타고 본인에게 되돌아온다.
알을 깨고 용이 태어나든, 사람이 나오든 지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단지 기다리고 기다릴 뿐이다.
“하아아아…!”
꼬르르륵.
한숨과 뱃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이 와중에도 배는 고픈 모양이었다. 먹고는 살아야겠는지 신체는 지우에게 어서 빨리 먹을것을 내놓으라며 호통을 친다.
동굴 안에만 있었으니 이곳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방법이 없다. 그렇단 얘기는 지우가 얼마나 굶었는지 모른단 얘기였다.
“먹을게 없잖아?”
배가고파 쓰린 배를 문질러 보지만, 동굴 안에 먹을게 있을까 싶었다.
물론 제대로 탐색을 하진 않아서 찾아보면 혹시 먹을만한 풀이나 이끼라든지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생존 전문가라던 베어 형님처럼 동굴에 벌레라도 잡아 먹던가.
“우에엑! 그건 좀…”
불을 피울 능력도 없으니 구어먹지도 못한다. 그럼 날 것 그대로 먹으란 얘긴데…! 벌레를 날로 먹으라니!
“그러고 보니, 아직 저쪽도 확인 안해봤네.”
출입구가 있는 벽과 반대방향에 아래쪽으로 움푹 들어가는 지형이 보이긴 한다.
단지 지우가 피곤함과 허기에 지쳐 살펴볼 기력이 없었을 뿐이었다.
꼬르륵. 꼬륵. 꼬륵.
“아주 노래를 해라! 내 뱃속아…!”
설마 기절한지 이삼일이 지난거라던가, 몸이 심하게 보챘다.
“에이...! 라면 먹고싶다아! 그래, 계란도! 하나! 아니 두개! 세개! 네…개?”
더 이상 버틸 기력이 없어 누워버린 지우가 투덜거리며 매콤한 라면을 떠올렸다.
그 얼큰한 국물에 면을 넣어 보글보글 끓이고, 딱! 좋은 타이밍에 계란을 그냥 하나둘셋넷다섯여섯!!
휘익! 누운채로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알들이 보인다.
꿀꺽!
뽀얀 자태와 어둠속에서도 유혹적인 광택을 보라!
“그, 그래. 계란을 팍팍 넣어서…, 쓰읍!”
애초에 계란을 저렇게 폭탄 투하하듯이 물량전으로 밀고나가면 더 이상 라면이 아니다. 계란국이라 칭해도 될터.
“저, 저것도 계란이랑 같은거 잖아…”
눈이 충열되고 숨이 거칠어 진 지우가 헉헉 숨을 내쉰다.
이에 살기라도 느꼈는지 알들이 움찔 움찔 떠는듯한 환상이 보인다.
“베어형도 새, 생존을 위해 별거 다 먹던데에!”
지우가 침을 흘리며 내적 갈등을 느낄 때, 중얼거리듯 친하긴 커녕 생면부지의 생존전문가를 부를 때였다.
스스스스스.
바람소리와 함께 바닥을 타고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바람? 진동?’
멍하니 흐릿한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기 시작한다.
지우의 등으로 점차 진동이 주기가 빨라져왔다. 지금 둥지로 접근하는 존재라고 하면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용의 둥지.
둥지의 주인.
용.
“……”
어미가 접근하는데 배고프다고 알을 깨먹을 생각을 하다니! 물론 정말 그럴 마음은 아주아주 쪼오금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욕망에 충실해 그대로 실행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지우가 한기에 몸을 떨며 스스로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넌 욕망을 이겨냈다고! 살해의 함정에서 벗어났다 라며.
쿠웅!
조금 더큰 진동을 느껴졌다. 아마도 용이 출입구에서 내려왔으리라.
그 덩치에도 불구하고 이정도 진동이라니, 생각보다 민첩한 육신이었다.
다시 용을 면전에 둘 생각에 심장이 두근두근 빨라졌다. 그래도 두번째 만남이라고 생각하니 두려움은 많이 사라진 듯 했다.
지우 본인이 본래 이런 대범한 성격이었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상체를 일이켰다.
용이 호의적이라는 것은 느낄수있지만, 되도록이면 무방비 상태로 누워있고 싶지 않았다.
지우가 한번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돌려 용을 향했다.
‘호랑이 굴에도 물려가서 정신만 차리면 살수있다고 했어!!’
물론 호랑이가 아닌, 어마무시한 용이라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여하튼, 아주 훌륭한 속담을 되내이며 눈에 힘을 준 지우가 용을 마주했다.
절대 놀라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툭! 투두둑!
“……어…”
점성이 높은 액체가 눈앞에서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린다.
지우가 발앞에 떨어진 액체를 손으로 슥 찍어보자 끈적함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침인가 싶었지만 자세히보니 색이 다르다.
붉은색이 짙은 점성의 액체.
“아하하…! 피네…”
힘없이 내뱉는 말과 함께 붉은 액체의 근원지로 고개를 들자, 지우가 더욱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절대 놀라지 않을거란 다짐은 지금 눈앞의 광경에서 산산히 조각나 버렸다. 아니, 아주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버린다.
“그르르릉!”
커다란 주둥에 날카롭게 빛나는 이빨이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제법 큰 짐승인지 무게가 상당해 보이는데도 용은 가뿐하게 들고 있었다.
툭. 툭.
그리고 축 쳐진 고깃덩어리에선 핏방울이 점점이 바닥을 적신다.
정말 여름을 겨냥한 호러영화를 보라면 지우는 이 장면을 추천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정말로.
꼬르르륵!
눈치없는 지우의 배꼽시계만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 * * * * *
툭.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엔 소리가 제법 컸다.
“……”
당연한 것이 용이 입에 문 것을 땅에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제법 덩치가 큰 짐승은 생긴 것은 사슴처럼 생겼는데 이마에 거대한 뿔이 달렸다. 게다가 양쪽으로 기다란 송곳니가 길쭉하게 나 있어서인지 사나워 보였다.
쿠드득!
내려놓은 먹이를 지우가 살피는 듯 하자, 용이 그 큰 주둥이로 섬세한 작업을 보여줬다.
쿠득! 뿌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슴이 삼등분 되어 지우의 앞에 조심스레 놓였다.
용이 데코레이션을 하는 모습을 보던 지우가 확신했다. 알에서 태어난 지우를 새끼로 착각했을 거라고.
‘그게 아니면 이 상황이 말이 안되지…’
애초에 용의 새끼와 인간인 지우의 모습은 닮을래야 닮을 수가 없다. 종이 틀린데 어디 비슷한 곳이 한군데라도 있을까!
지우 입장에서는 정말 다행이다. 최소한 눈뜨자마자 용에게 한끼식사로 전락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은 것이니까 말이다.
새 삶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눈 앞에 먹이와 함께 용의 자식이 된 것이다.
‘그럼 용 새끼…’
왠지 욕하는 것 같아 더 이상 생각을 멈췄다.
푸후훅!
바람소리와 함께 용이 주둥이로 먹이로 가져왔다고 생각된 사체를 툭툭 건드렸다.
“음…? 먹으라고?”
“크르르릉.”
용이 웃음을 터트리듯 높은 울음 소리를 낸다.
“저기, 고맙긴한데 난 하나도 배가 안고프니까. 이건 네가 먹는게 좋을 것 같다.”
꼬르륵.
“…저, 정말이야! 입맛이 없어서 그래!”
꼬르르륵.
지우가 먹이를 앞에 두고도 움직이지 않자, 용이 그런 지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잠시 먹이와 지우를 살피던 용.
“크릉!”
아무래도 삼등분 해놓은 먹이조차 먹기에 부담스러운 크기였나 보다. 용이 앞발을 슬쩍 들더니 발톱 하나를 빼 들었다.
“어…!?”
분명 발톱인데 어두운 동굴 안에서도 빛이 나는 듯 하다. 그만큼 예리하단 말이 된다.
샤사삭. 휙.
흡사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격정적이고 유려한 움직임이었다. 그 큰 앞발로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지우가 입을 쩌억 벌리곤 쳐다봤다.
‘스치면 그냥 골로 가겠구나!’
잠깐 사이에 고깃덩어리가 수십조각으로 잘라졌다.
“푸후―!”
횟집마냥 정갈하게 나눠진 조각을 만족스럽게 보던 용이 지우 앞에 앞발을 깔고 턱을 괴었다.
“……하하.”
이렇게 까지 했는데 밥투정하면 때릴 거라는 표정이 왠지 모르게 느껴졌다.
지우가 울상을 지으며 고기를 손에 들었다. 두 손으로 들었는데도 묵직한 것이, 한 덩이만 먹어도 배가 가득 찰 것 같았다.
“…그래!, 그래도 신선은 하잖아!”
잡은지 얼마 안된 사냥감인지 손안에서 아직도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몽골의 유목민들은 생으로도 갓 잡은 짐승을 먹는다고 들었다.
물론, 그 유목민들도 생피와 간등 특수부위만 날로 먹는다.
언뜻 떠오른 정보를 위안 삼아보며, 지우가 고기를 입가로 가져가 보았다.
“…흐으우어.”
입술에! 날것이! 생고기가 닿았다.
몸살 걸린 사람마냥 앎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안전한 음식인지, 기생충은 없는 것인지, A등급 판정을 받은 고기인지 갖은 생각이 지우의 머리속을 헤집어 놓았다.
입가에서 멈칫한 지우가 눈을 굴려 슬그머니 용을 살폈다. 혹여나 지우에게 관심을 끊고 잠이라도 들었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크르르.”
지우의 바램은 냉정하게 거절당했다.
샛노란 용의 눈동자가 여전히 그를, 지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용의 안색(?)이 조금 피곤해 보이는것도 같지만 절대로 먼저 잠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
용이 지우를 보며 그린 듯이 히쭉 웃자, 날카로운 이빨들이 가지런하게 보인다.
참 가지런한 치열이다. 튼튼하게 보인다. 게다가 날카롭겠지.
“하하…”
그 무언의 압박에 지우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호의를 호이로 알면 둘리라던가.
“...역시 고기는 생고기죠! 하핫!”
될 때로 되란 심정이었던가. 지우가 과감하게 덥썩 고기를 물었다. 비릿한 혈향이 콧속을 치고 올라오자 눈물이 핑 돌았다. 새삼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하다못해 굽기라도 했으면…! 크흐흑!’
인류의 발견인 불은 지우에게 혜택을 주지 못했다.
간신히 한입을 베어 물은 지우가 입가에서 핏물을 뚝뚝 떨궜다.
껌을 씹듯 질겅질겅 턱을 움직여 본다.
“….꿀꺽!? 어어?”
맛있었다.
“잠깐!? 맛있다고? 원래 날고기가 맛있는 건가?”
굳이 비교하자면 육회의 식감인데 씹으면 씹을수록 달디달다. 비릿한 향과 달리 엄청난 맛을 숨기고 있었다!
‘미미(美味)!’
혓바닥 위에서 사슴으로 추정되는 짐승이 브레이크 댄스를 춘다!
터업!
고기를 뜯는 지우의 행동이 빨라졌다. 허기진 육체가 그새 힘이 돌았는지 무서울 정도로 정신 없이 달려들었다.
“마, 맛있다아앗!”
한 덩이를 모두 먹어 치운 지우가 눈에 불을 켰다. 온몸에 활력이 휘몰아치는듯한 느낌!
지우가 새로운 맛에 눈을 떴다.
“괜찮네. 생각해 보니까. 육회도 날것이고! 회도 날것이잖아!”
원래 인생은 날로먹는다고 하지 않던가!? 지우에게 더 이상의 꺼리낌은 없었다.
입맛을 다시며 지우가 남은 육회(?) 덩어리들을 사냥감을 노리듯 맹수의 눈빛으로 보았다.
“냠냠!”
지우는 스무살.
한창 배고플 나이였다.
“질겅! 질겅! 꿀걱! 우와 맛있어!, 맛있어!!”
용이든 뭐든 배고픈 청춘을 막을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