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범과 세이나가 사라져서도 한참동안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멀리서 보는 이들이 있었다.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있는 론과 바이안이었다.
“참 좋은 도시야. 다들 근심도 걱정도 없어 보이지 않냐?”
“별로..”
감흥 없이 무미건조한 반응에 론은 쓰게 웃었다.
황폐의 사막에 갔었을 때, 조금은 어렸을 때의 모습이 돌아와서 좀 나아 졌을 것이라 생각을 했지만, 그 이후에 평소의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무표정의 친구로 원상복귀 한 바이안이 론은 못내 아쉬웠다.
“축제가 끝나고 복귀하면 볼일이 없는 곳이다.”
“싱거운 새끼.”
적당히 둘러보고 바로 숙소로 돌아와서도 둘은 크게 무언가 하지 않고 대충 시간을 때웠다.
“혼자서 좀 돌아다니고 해라. 내가 뭐 때문에 시간을 만들었다고 생각 하냐? 오늘도 내가 나가자고 하니까 나갔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냐.”
침대에 누워서 띄겁게 따져서야 바이안이 못이기는 척 그러겠다는 대답을 간신히 받아 낼 수 있었다.
이른 저녁에 집으로 끌려와 투덜거리는 세이나의 손을 꼬옥 잡은 할아범은 조심히 그녀를 달랜다.
“너도 이제 자리를 잡아야 하지 않것어?”
별 말이 없는 세이나의 손을 살살 쓰다듬었다.
“결혼도 하고 말이다. 너도 이제 행복해 져야지.”
세이나는 할아범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케리프는 어떠냐? 응? 그도 너에게 아예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 듯 하더만.”
“뭐래. 난 할아범만 있으면 되.”
하지만 세이나는 필요 없어 하는 것이 그냥 하는 말은 아닌 듯 보였다.
“이늠아. 이 할애비가 언제까지 옆에 있어 줄 거라 생각하는 겨? 이 늙은이가 살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누구를 닮아서 고집이 저리 센지 세이나는 전혀 굽히지를 않는다.
“장수하면 돼. 할아범은 오래 살 상이야.”
보통 같았으면 이 타이밍에 뭐라 해야 할 할아범이 오늘은 반응이 전혀 달랐다.
안쓰럽고 씁쓸해 보이는 할아범은 다시 조곤조곤 나직하게 말을 할 뿐이었다.
“케리프에게 아예 마음이 없는 게냐?”
“그냥 친한 친구야.”
소용이 없을 것이라 이미 예상은 했지만 안다고 해도 나오는 것은 한 숨이었다.
“후~ 아가 세이나. 이제 그만해도 된다. 언제까지 그리 숨어만 있을 게야? 그만 하고 이제 나오려므나. 네 주변에 그리 사람들이 많아도, 정작 너는 그 누구도 옆에 두려 하지 않잖니.”
할아범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할아범은 그 이상 그녀에게 뭐라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봐 주었다.
‘누구는 좋아서 이렇게 사나? 나도 이런 내가 좋진 않은걸..’
“아 배고프다. 할아범 배 안고파? 밥 먹자.”
무거운 분위기에 화제를 급하게 바꾸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세이나의 뒷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몹시 작고 여렸다.
축제 3일 전이 되어서야, 바이안은 혼자 밖으로 나와 도시 주변을 목적 없이 걸어 다녔다.
축제가 시작 될 때가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확실히 주변 분위기는 눈에 띌 정도로 들떠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아낙들과 막바지 축제 준비에 분주히 움직이는 청년들, 그리고 그 축제를 기다리며 기대하는 여행객들과 보따리상인들, 그리고 모험자들이 간간히 섞여 있었다.
론에게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바이안 역시 이 도시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잠깐이었지만 제일 행복했었던 카카리아 마을 같이 떠들썩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가득 채워진 이 곳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딛고 일어났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공허함과 상처가 카카리아 마을을 떠올리는 이 곳이 자신을 더 아리게 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연고를 발라 주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앞을 빠르게 지나쳐 달려가는 두 명의 아이들이 눈에 띄자마자 그는 발걸음을 그대로 멈추고 가만히 쳐다본다.
남자아이 한명이 자신보다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꼬옥 잡고 여자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신경 쓰며 환하게 웃은 채로 달려갔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아이들이 사라질 때까지 넋을 놓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나는 너를 잡고 있나 보구나...”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있던 바이안을 향해서 우다다 달려오는 소녀가 그대로 그의 가슴팍에 헤딩을 했다.
퍽 소리와 함께 돌진하던 소녀는 그대로 멈췄고, 바이안 역시 깜짝 놀랐다.
자신이 잠시 넋을 놓기는 했어도, 누구와 부딪힐 사람이 아니었는데 순간적으로 틈을 보였는지, 그대로 그녀에게 품을 내어주는 격이 되었고, 커진 눈으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그는 또 한 번 심하게 놀라 굳어야 했으며, 그의 눈동자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시선 밑 가슴께에 얼굴을 묻고 있는 소녀의 짧은 단발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심하게 그의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아니.. 흔한 머리색은 아니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내가 너무 생각했던가..’
다시 애써 추스르고 있는 그의 가슴팍에서 한 번 꿈틀하다가 고개를 획 드는 소녀와 눈이 맞았다.
“푸하~ 겁나 딱딱하네.”
바이안의 가슴을 밀며 세이나는 엉뚱한 감상을 내뱉었다.
밝게 빛나는 홍안이 담긴 눈이 작게 휘며 바이안을 향해서 웃자 그는 그대로 모든 사고와 행동을 멈췄다.
“우와~ 겁나 크다. 오~ 잘생겼는데? 아! 부딪혀서 미안!”
혼자서 감탄 했다가, 빠르게 사과를 마친 세이나는 그대로 달려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바이안은 꿈쩍도 하지 못했다.
“홍안까지... 같을 수는 없어... 잘 못 본..”
착각했다며 혼란한 마음을 어떻게든 다시 추스르려 해보지만 쉽지가 않아, 세차게 뛰는 가슴에 손을 얹어 심호흡을 하며 중얼 거릴 때, 그녀를 쫒아 달려오던 노인의 고함 소리에 그대로 하던 모든 것을 중지시켰다.
“야이늠악! 세이나!”
“세..?”
그리고 고개를 휙 하고 세이나가 사라진 방향으로 돌리자마자 무작정 뛰었다.
이미 시야에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달리고 있는 바이안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이름만이 가득 찼다.
“세나. 세나.”
도시 곳곳을 쉬지 않고 달리며 세나라는 이름을 불렀지만 꼭꼭 숨었는지 그 뒤로 모습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바이안의 표정은 초조함만이 가득 남아 그를 괴롭혔다.
바이안이 사방을 헤매고 있을 때, 다른 의미의 초조함에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이가 있었다.
“이 자식은 어디 가서 돌아오지 않는 거야? 벌써 날이 밝아오는데, 무슨 일이 일어 난거야?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 녀석이 해를 입을 녀석도 아니고...”
바이안을 잘 알고 있는 론은 처음 겪는 그의 외박에 인상을 팍 쓰며 걱정했다.
그리고 완연히 해가 뜬 아침이 되어서야 벌컥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자신의 친구를 볼 수 있었다.
“너 뭐 하다가 이제... 어이..”
콱 한 소리 하려다가 엉망인 그의 모습에 론은 어버버 하며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어디를 얼마나 뛰어 다녔는지, 온몸이 땀에 절어 축축했고, 찰랑거리던 머리카락들은 여기저기 땀에 붙고, 날려 뒤죽박죽이었다.
게다가 표정은 더욱 가관이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으며, 부정하면서 긍정하는 듯 혼잡한 표정이 쉴 새 없이 바이안의 얼굴에서 경쟁해댔다.
“너...”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론에게 서슴없이 성큼성큼 다가간 바이안은 그대로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찾아야해.... 살아있어...있나? 아니.. 잘못 본.. 확인, 확인해야해. 찾아야한다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친구를 억지로 진정 시키기 위해 자리에 앉혀 주전자와 물 잔을 건네주자 바이안은 그대로 잔에 따라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주전자의 입구에 입을 가져가 그대로 벌컥벌컥하며 들이켰다.
혼란스러워하는 바이안의 상태가 그대로 론에게 넘어갔는지, 론 역시 무척 혼란스러워졌다.
9년 동안 모든 것에 무감각했던 친구가 그동안 짓지 않았던 9년분을 한꺼번에 표출하는 듯 잔뜩 흥분해서 돌아온 모습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진정 좀 하고 말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으니까.”
주전자에 들어있던 물이 동이 나서야 바이안은 아직도 세차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우며 론에게 바로 대답을 해주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세이아나...우웅...다들 세이나라고 날 부르니까 응. 세나!’
‘세나?’
‘응, 우리들만 부르는 애칭. 오빠만이야~ 세나라고 오빠만 불러야대.’
‘그럼 으음... 난 반. 이 애칭은 너만 부를 수 있어. 에헴! 황자의 권한으로 짐을 반이라 부르는 것을 허락하노라.’
‘아하하 뭐야 그게’
“세나...”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한 번 더 그 이름을 되뇌던 바이안은 그제야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