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흰머리가 군데군데 난 노년에 접어들고 있었던 할아범은 그때의 직업이 모험가였다.
그리고 직업 특성상 늘 위험한 곳을 찾아 다니며, 한 곳에 오래 있지를 않고 떠돌기만 하다 보니 결혼도 하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버렸고, 그는 이제 슬슬 은퇴해서 한 곳에 정착해 노후를 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살기 좋고 풍요로운 남쪽에 자리를 잡으려 마지막 여정을 하던 때에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해야했다.
“허... 이게 무슨 조화인가...”
갑자기 눈이 멀 정도로 커다란 빛이 번쩍하더니 광활하게 펼쳐진 녹음이 가득했던 모든 것들이 그 한 번에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푸르렀던 모습이 오히려 신기루였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할아범의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지금 이 상황이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허겁지겁 산에서 내려와 본능적으로 사막 쪽으로 뛰어갔다.
사막의 여기저기를 꼼꼼히 살피며 돌아다녀 봤지만 어떤 생명도 살지 않았고, 풀 한포기도 보이지 않았다.
생명의 흔적 자체가 없었던 것이었다.
3일을 그렇게 돌던 그때에 처음으로 자신 외에 살아있는 생명과 마주 할 수 있었다.
사막의 모래에 반쯤 파묻혀서 식은땀을 흘리며 괴롭게 신음을 흘리고 있는 어린 여자 아이였다.
할아범은 서둘러 모래를 파내어 여자 아이를 꺼내 들어 내려다본 모습은 무척 좋지 못했다.
입술은 마르다 못해 갈라져 있었고, 창백한 피부에 전신은 피가 말라 굳어진 듯, 피범벅에 모래가 뒤섞여 매우 지저분했다.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챙겨왔던 물주머니를 꺼내 아이의 입에 흘려 넣었다.
그리고 품에 꽉 끌어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뛰어 사막을 벗어났다.
“그리고 야영을 하면서 그 아이를 간호했고, 세이나가 드디어 눈을 떴을 때 나는 결심했다네. 이 아이의 가족이 되 주기로 말이네.”
중간에 잠시 말을 끊고 할아범은 주먹을 꽉 쥐고 괴로워하고 있는 바이안을 유심히 보았다.
“왜 그랬는줄 아는가? 몇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못했을 아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눈을 뜨자마자 내 얼굴을 보더니 기겁을 하며 도망치더구먼.. 저러다가 또 쓰러질 것 같아서 안아서 달래려니 발작을 일으키더군.”
말을 하던 중에 할아범은 바이안의 등을 짝하고 때렸다.
“아이고 이늠아. 늙은이를 살기로 죽이려고 그러냐?”
할아범의 호통에 바이안은 자신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깨닫고 서둘러 살기를 내리눌렀다.
“어떻게 해도 달래지지 않았지만 할애비라고 말하며 등을 토닥여 주는 것을 반복하니 천천히 진정하더구먼. 눈물범벅으로 내 옷을 꼬옥 잡고 잠이 들었고, 깨어날 때까지 놓지를 않았어. 그리고 다시 깨어 났을 때에서야 알 수 있었지. 자신의 이름과 나이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더구먼. 거기다 다 놓고 온 게야. 그 사막에 다 묻은 게지.. 이것도 인연인가 싶더구먼. 고아로 자라 홀로 사는 내가 하늘이 불쌍했는지, 가족이라는 연을 내려준 것이야.. 끌끌끌”
바이안은 할아범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백 마디 말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감사의 인사였다.
할아범의 이야기가 끝나고, 대화 없이 둘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시기만 했다.
가지고 온 술이 거의 동이 날 때 즈음에서야 할아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궁금했던 것은 조금은 풀렸는가?”
“예.”
너무 어두운 얘기만 한 듯싶던 할아범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화재를 바꿨다.
“오래 떨어져 살던 가족이었는가? 그러기에는 상당히 애틋하던데.”
“세나의 약혼자입니다.”
“그려. 약혼....약혼자?”
고개를 끄덕이다가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놀랐다.
“흠흠.. 어흐흠.”
주책없이 놀란 것에 상당히 민망해져 헛기침을 연신 해댔다.
“그 그렇구먼. 몸이 보통은 아닌 듯 한디.. 하는 일은 모험가인가? 어디에 사는가? 집은 있고?”
“사는 곳은 저 위에 천공의 땅입니다. 직업이 기사이다 보니, 집이라고 할 것은 아직 없습니다.”
“푸웁~”
입에 술을 집어넣자마자 할아범은 그대로 술을 뿜어버렸다.
“쿠..쿨럭”
“할아버님.”
바이안은 자신의 발언 때문인 것도 모르고 사례가 들려 쿨럭 거리는 할아범의 등을 쓸어 내렸다.
“귀..귀.. 귀족?”
산전수전 다 겪어 이제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할아범은 놀랄 것이 아직 있었다싶었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다시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고 알게 된 것은 대륙의 지상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정중한 태도에서 나오는 격식과 군더더기가 보이지 않은 행동이었다.
동공이 격하게 흔들리며 당황해 하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할아범의 모습에 바이안은 문제가 무엇인지 그제야 바로 알 수 있었다.
“세나의 할아버님이십니다.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저는 그것이 편합니다.”
“그..그렇....그려. 그려”
태도를 정리하며 할아범은 아무래도 자신이 대단한 아이를 손녀로 거두었다 싶었다.
그때 바이안이 자세를 고쳐 잡으며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할아버님. 엘라이어 바이안이라고 합니다.”
바이안의 인사를 받으며 흐뭇해하면서도 조심히 물었다.
“그렇다는 것은 세이나도 그.. 귀족인가?”
바이안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닙니다. 세나의 어머니께서는 분명 귀족이셨지만, 귀족의 자리를 놓으시고, 대륙에 내려가 지상인과 결혼 하셔 가정을 꾸리셨습니다.”
지상인들에게 귀족이라는 이들은 엄청나게 큰 존재들이라서 그게 그거잖아 싶었지만 아니라는데, 더 말해서 무엇 하리 라며 다른 부분을 걱정했다.
“앞으로 어찌할 생각인가? 손녀딸을 데리고 올라갈 건가?”
할아범의 말에 바이안은 씁쓸히 웃었다.
“아니오. 세나가 싫어하는 것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살아서 밝게 살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합니다. 억지로 데려갈 생각은 없습니다.”
당장에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세이나와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작게 안도가 되면서도 저리 말하는 바이안의 마음은 얼마나 쓸지 예상이 되니, 못내 안타까웠다.
“다만.. 이 곳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조용히 지켜보고 싶습니다.”
“끌끌끌 그걸 왜 나에게 허락을 구하 듯 말하나? 알아서 하면 되지. 기억이 없다고 안 되겠는가? 젊은 남녀가 만나고 부딪히다보면 언제든 알아서 싹이 트는 법인디.”
바이안과 헤어지고 난 후에 할아범은 집으로 돌아와 세이나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조용히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쓸었다.
‘세이나, 내 새끼. 예쁘고, 불쌍한 내 새끼. 그랬구나, 그랬어.’
바이안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오늘 처음 본 바이안의 이야기를 전부 믿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귀족이 지상인에게 거짓을 말한다고 무슨 이득이 남을까? 그리고 개인적으로 할아범은 바이안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귀족이라고 거드름 피우지도 않고, 자신을 처음부터 쭉 존중해주는 태도와 올곧아 보이는 눈빛이 든든했다.
“끌끌끌 케리프 총각 미안해서 어쩔꼬. 세이나랑 어떻게든 이어주려고 혔는디, 이제는 눈에 차지도 않는구먼~ 손주사위랑 비교가 안 돼. 암~ 여러 의미로 어렵지. 끌끌”
할아범은 어느 순간부터 바이안을 손주사위로 자연스럽게 부르며 내심 뿌듯해 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손녀딸에 대한 걱정이 한시름 덜은 것 같은 마음이 가득해진 하루의 마감에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