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 당할 수 없다 싶은 론은 인내심을 가지고 저녁까지 타이밍을 노렸고, 곧 그 타이밍이 찾아왔다.
세이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바이안을 찾고 있었고, 이때다 싶어 세이나에게 다가갔다.
“반은?”
역시 바로 물어본다.
론은 아주 친절한 가면을 쓴 상태로 손가락으로 이층을 가리켜줬다.
“아까 전에 올라가던데?”
세이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론을 의심했지만, 한두 번도 아닌 것이라 무시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가 무슨 꿍꿍이였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방문이 작게 열려서 희미한 불빛이 세어 나오고 있었다.
그 틈으로 조용히 본 방안에서는 덩치가 큰 금발의 뒤통수가 침대 맡에서 무언가를 꿈질꿈질 하고 있었다.
더는 볼 것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 머리통에 손을 척하고 얹었다.
“뭐하냐? 지금.”
“......”
주변의 신경을 완전히 끊고 집중에 집중을 하고 있었던 바이안은 크게 몸을 움찔하며 딱딱 끊어지듯 고개를 돌려 무섭게 내려다보고 있는 세이나와 마주쳤다.
안쓰러울 정도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바이안은 슥 하고 손을 뒤로 숨겼지만 뻔해 보이는 그의 행동에 세이나는 눈은 가만히 두고 입 꼬리만 진하게 올렸다.
“손.”
간결한 말에 숨겼던 손이 본능적으로 슥 하고 올라가다 멈췄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세이나한테 들켜버렸고, 바이안은 온 힘을 다해 눈치를 봤다.
“내가 말했잖아. 스토커 짓 하지 말라고. 우와~ 대박.”
바이안의 손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은색의 머리카락이 예쁘게 땋여져 있었고, 바이안의 뒤로 보이는 침대 맡에서는 자신이 쓰던 빗이 놓여있었다.
커다랗고 투박한 손으로 어찌 저리 예쁘게 땋았을꼬 감탄해 마지않을 정도였다.
“내놔.”
거세게 좌우로 붕붕 흔들며 그 머리카락을 품에 안는 바이안의 행동을 보던 세이나는 작게 한 숨을 한 번 내쉬고 더는 뭐라고 하지 않고, 그냥 내려갔다.
아직도 행여 뺏길 세라 눈치만 보며 우물쭈물하는 바이안에게 고개를 돌려 다시 시선을 주었다.
“뭐해? 할아범이 내려오래.”
그 말을 듣고서야, 바이안은 서둘러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품속에 넣고 세이나의 내민 손을 잡고 내려갔다.
그리고, 밑에서 흥미롭게 결과를 기다리던 론은 생각과는 다른 분위기에 혀만 한번 찼다.
자신 몰래 무언가를 수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하다하다 머리카락이냐 싶어도 저 스토커가 마냥 밉지가 않기도 했지만, 이번의 그 머리카락의 의미를 모르지 않기에 세이나는 일부러 모른 척 넘어갔다.
라이트리아의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퍼져있는 하나의 풍습이 있다.
소중한 이의 안위나 건강, 하는 것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을 모아 조그마한 천에 담아 부적처럼 주는 풍습이었다.
보통 가족이나 연인들이 많이 하는 풍습이기도 했고, 그 속에 멀리 있어도 자신이 함께 한다, 라는 뜻도 내포되어있었다.
넘어가 준 세이나 덕분에 바이안의 마음은 하늘을 뚫고 우주로 날아갈 정도로 좋았다.
연인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인정 해 주고 있다는 것을 다른 때보다 크게 느끼게 되어서 더욱 그랬다.
현궁에서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화려한 방안에 그 방의 주인임을 증명하듯 화려한 여인이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플로아님께서는 어쩜 이리도 고우십니까?”
“이렇게 아름다우신 플로아님의 고운 머릿결을 만질 수 있는 매일 매일이 행복합니다.”
시녀들의 칭찬에 방의 주인은 기분이 좋았다.
“그러니? 호호호. 나도 가끔 내 모습을 보면 한 번씩 놀란단다. 어쩜 이리도 예쁠까.”
전혀 겸손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녀의 말에도 시녀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요. 이리 아름다우신 분이시니, 플로아님과 어울리시는 남성분도 엄청 멋지신 분이 아니시면 플로아님의 외모에 묻힐게 분명해요.”
치장이 끝난 듯 플로아는 이리저리 거울에 자신을 비쳐보았다.
누가 보아도 고급스러우며 부드럽고, 가벼운 재질의 연보라색에 어깨까지 파여 그대로 가슴골까지 드러나는 드레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석으로 치장한 자신의 모습에 잔뜩 취해있는 플로아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도 좋구나.”
“황송합니다. 플로아님.”
그녀의 칭찬에 시녀들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보였다.
그런 시녀들을 내려다보며 자신만의 희열에 열이 들뜨듯 마음이 들떴다.
예전부터 그녀가 가지고 싶었던 재물과 최고의 권력을 모두 가지게 된 플로아는 늘 매일이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플로아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장식 하나는 자신을 더욱 돋보여줄 직위와 능력을 겸비한 잘생긴 남자였다.
시녀들이 따로 준비해 놓은 자리에 앉아 차와 다과를 즐기고 있을 때 플로아의 근처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은 표정이 굳어있었다.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주인을 모시며 긴장하고 있음이라 굳어있다 해도 되겠지만, 그러기에는 표정이 썩 좋지는 않다.
하지만 플로아는 그런 그들의 표정은 모른 채로 시종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이곳 천공의 땅에 들어 온지 오래 되지 않아서 그러는데 새삼 궁금한 것이 있구나.”
“무엇이옵니까?”
“소인들이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답하겠습니다.”
자신의 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시녀들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서 최고라 불리는 이는 누구더냐?”
플로아의 질문의 의도를 바로 눈치 챈 시녀들은 한명씩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당연히 황제 폐하이시지 않을까요.”
처음 말을 꺼낸 시녀의 의도를 살짝 어긋난 말을 다른 시녀들이 반박했다.
“에이~ 황제폐하는 예외이시지. 연세도 있으시고, 황후님이 계시잖아. 오히려 테일러공작님이 플로아님과 나이도 비슷하고 제일이지 않아?”
“테일러공작님도 최고라 할 수 있지만, 외모가 조금.. 그렇지?”
“하긴.. 조금 무섭게 생기셨지? 플로아님께는 조금 아쉬울지도..”
플로아는 서로 자신에게 잘 보이려 알아서 떠드는 시녀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황태자님은?”
“황태자님이야 당연히 최고이시지만, 그리 말하면 역시 누가 뭐래도 2황자님을 따라올 분은 없지 않아?”
“응? 2황자?”
플로아는 처음 듣는 다는 듯 의문스러웠다.
“내가 처음 천공의 땅에 들어와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태자와 황녀를 만났었지만 둘째아들도 있었느냐? 처음 듣는구나.”
황제와 자신은 엄연히 서로 존중되어야할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플로아는 황족들을 자연스럽게 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녀들은 이미 신이 나있어서 의식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뒤에 서있는 기사들은 자신들의 주인의 말투에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예. 있었습니다.”
“맞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황태자자리는 지금의 황태자전하가 아니라 2황자님께서 황태자위에 오르셨어야 합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오르실 예정이셨죠.”
열심히 떠드는 동료의 대답에 막 떠올랐다는 듯이 손뼉을 치면서 마주 대답했다.
“맞다 맞아. 절대자라 불리우시는 황제폐하의 능력을 그대로 물려받으심은 물론이요, 황제폐하와 황후마마의 장점인 외모만을 그대로 받으셔서 누가 뭐라 해도 아마 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분이실 것입니다.”
“그렇죠. 거기에다가 2황자님의 실력은 이미 황제폐하를 능가했다는 말도 들릴 정도였는걸요.”
플로아는 수줍은 소녀들처럼 꺄르륵 웃으며 떠드는 시녀들이 너도나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그 2황자에게 강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다면 그 2황자는 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이냐?”
플로아의 질문에 시녀들은 퍽 안타까워했다.
“황자님께서는 어리셨을 때, 황족위를 버리시고 기사가 되셨습니다. 아니었으면 황태자위에 바로 올라가셨을 거예요.”
“그럼 뭐하니? 이제 기사도 아니 시라더라. 그러니 백작님도 황자님도 보이질 않는 거잖니.”
그녀들의 수다를 들으며 한쪽 다리를 꼰 상태로 조용히 읊조렸다.
“기사라...”
그리고 자세를 바꿔 고개를 그녀들에게 가까지 가져가며 플로아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흥미롭구나.”
그때 자신의 뒤에서 묵묵히 서있던 한명의 기사가 조심히 플로아에게 말을 걸었다.
“주군...”
플로아는 뒤를 돌아보며 그 기사와 눈을 맞췄지만, 그 기사의 어두운 표정은 신경 쓰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의 말을 자른 그 기사가 못마땅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시끄럽구나.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지 그 입을 다물 거라. 즐거운 흐름을 끊다니 버릇이 없어.”
그리고는 바로 획하고 고개를 돌려 더 이야기 해보라는 듯 재촉해댔다.
기사는 명령이라 조용히 하고 있지만 그는 어쩔 줄 모르며 안절부절 해댔다.
암묵적으로 꺼내지 않게 되어있던 말이었지만, 역시 기사들의 바람과는 달리 수다를 좋아하고, 잘 보이려하는 시녀들은 플로아를 등에 업고 신나서 흐르는 소문을 너도나도 떠들어댔다.
“저희들도 자세한 것은 모르옵니다. 다만, 스스로 기사위를 버렸다는 소문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듣기로는 기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셔서 백작님과 함께 추방당하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시녀 둘이 서로의 말이 맞다 면서 이야기 하는 말들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플로아의 뒤에 서있는 기사들은 그 진위를 알기에 더더욱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시녀들의 입으로 흘러들어간 말을 막을 수단도 없었기에 그저 어정쩡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흐음~ 어디 기사단이었더냐?”
“휴~ 아쉬울 따름이옵니다.”
“황자님은 플로아님께옵서 거느리시는 기사단에 계셨사옵니다.”
흥미롭게 듣고 있던 플로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눈매를 가늘게 띈 상태로 왼손을 머리쯤으로 들어 검지로 까딱거리며 자신의 뒤에 나열해 있는 기사를 불렀다.
기사는 죽을상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숙여 플로아의 시선에 맞추었다.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냐? 네놈이 가 기사단장을 불러 오거라. 내가 조금 더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구나.”
그리고 서둘러 단장을 만나 상황을 전한 기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한참을 말이 없던 단장과 함께 오후가 되어서 자신들의 주인인 플로아를 알현했다.
플로아는 자신의 앞에 부복해 있는 기사단장을 아니꼽게 내려다보았다.
“이 몸이 너희들이 주인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헌데 내가 전혀 듣지 못한 이야기가 나오더구나.”
“......”
자신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단장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 둘은 저희 기사단의 수치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플로아님께서 오신지 얼마 되시지도 않으셨으며, 플로아님께 누가 될까, 기사법대로 저희 선에서 해결하려 함이었습니다.”
“건방지구나.”
한마디로 일축하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기사단장에게 화를 냈다.
“내, 이야기를 들어보니, 실력만을 보았을 때, 그를 뛰어 넘을 이가 없다고 하더구나. 참으로 아까운 인재가 아니냐?”
“......”
플로아는 진심으로 그리 말을 했지만 속으로는 2황자의 타이틀과 외모에의 탐욕이 제일 컸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것은 일체 말을 하지 않으며, 잘 꾸며진 말을 늘여놓았다.
“너의 충의를 내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가 몰라야 하는 것은 없어야 한다 생각한다.”
자신의 말에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기사단장의 모습에 우쭐해 하며 마저 말을 이었다.
“내가 이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용할 수 있는 인재가 고프구나.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둘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그렇지 아니한다면 조용히 처리하는 것보다는 본보기를 보이는 것 또한 이 자리를 다지기에 중요한 일환이라 생각하는데, 내 생각에 틀림이 있느냐?”
플로아 그녀의 말에 그 누가 반박하랴, 그리고 나름 일리가 있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하면 그녀의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즉, 궁금하니 데리고 와라 그리고, 싫다면 명분에 의해 벌하겠다는 뜻이었다.
그 뜻을 눈치 챘다 하더라고 단장으로써는 거부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 볼 것이니, 둘을 구속해 내 앞에 데리고 오거라.”
이내 그녀의 명이 떨어졌고, 기사단장은 어찌 할 수 없이 그 명령을 받아 들였다.
“명을 이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