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과 행동은 항상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론과 바이안에게 오늘이 그렇게 느껴졌다.
이미 한차례 설치고 나가면 다음날에 찾아오는 것이 플로아였는데, 늦은 시간에 단 세명의 기사만을 대동한 채로 다시 바이안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한 쪽에 놓여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억지로 무릎 꿇려진 바이안을 내려다봤다.
“내가 무어라 하여도 네놈은 같은 반응이겠지.”
굳이 바이안의 대답을 바라지도 않는 다는 듯 오히려 더 깊게 웃었다.
“하지만 오늘로 네놈은 내 앞에서 무너질 것이다.”
플로아의 너무도 확신에 찬 음성에 론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느낌에 흠칫하며 창살 쪽으로 몸을 가까이 대었다.
“세이나”
여태껏 그 어떤 반응도 없었던 바이안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플로아는 동요하는 바이안의 눈동자와 모습에 자신이 생각하던 것이 맞아 떨어지자 너무 재미있어했다.
“참으로 귀엽지 않으냐? 고작 그깟 계집애 하나 때문에 그리 고집을 부렸다니 말이다.”
“큿~”
플로아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자신의 팔을 한쪽씩 잡고 있는 기사들에 의해 저지당한 채 바이안은 흥분했다.
“내가 여기서 말 한마디만 한다면, 네가 아끼는 그년은 죽겠지. 무슨 뜻인지 잘 알겠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설마 자신 때문에 이렇게 쉽게 세이나가 노출 될 줄은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던 바이안은 냉정한 사고 판단을 잃어버렸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 세이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단단히 잡힌 두 팔은 움직일 수도 없었고, 마력이 봉인 된 상태에서 무수히 받은 고문에 그럴 체력도 힘도 없기에 덧없는 저항만이 전부였다.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에 혼란함은 론 역시 비슷했다.
이렇게 되면 케리프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으며, 믿는 구석은 있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것이 뻔했다.
바이안의 머릿속은 현재 어서 빨리 이 곳에서 나가 세이나를 지켜야 한다는 것 하나 뿐이다.
플로아는 처음으로 바뀐 바이안의 절망적인 표정에 작게 희열을 느꼈다.
어떤 고문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고,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던 바이안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만 보면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난 참으로 자비로운 존재야. 네 놈의 어리석은 행동에도 불구하고 옆에 두려하지 않느냐.”
“큭...”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바이안에게 서슴없이 가까이 다가가 머리채를 거칠게 틀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얌전히 나에게 굴복만 한다면, 그 년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을 것이다.”
동공이 격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이니, 절로 고양감에 사로잡혔다.
플로아는 잡았던 머리채를 밀치고 품에서 준비해온 작은 병을 하나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플로아를 급하게 말렸다.
“프..플로아님.”
“너무한 처사이십니다. 물러주십시오.”
얌전히 말만 잘 듣던 기사들이 누구라 할 것 없이 그녀를 말렸지만, 오히려 플로아의 심기를 건드렸다.
떨어져서 잘 보이지 않던 론은 심상치 않음에 철창 쪽으로 더욱 몸을 가까이 해, 그 병이 무엇인지 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 병이 무엇인지는 기사들 덕분에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데스페어 포이즌이 아니옵니까? 거두어 주십시오.”
“어이 어이 어이 뭐라는 거야.”
잘 못 들은 것은 아닌지 생각을 하려 해도 상황이 급하게 돌아간다.
“시끄럽구나. 닥치거라.”
기사들에게 성을 낸 후에 플로아는 망설임 없이 다시금 바이안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렸다.
데스페어 포이즌. 절망의 독이라 불리는 그 독은 최고의 형인 사형보다 더한 죄인에게 내릴 때 쓰는 독이었다.
기본은 마력을 쓰지 못하게 하고 무력하게 만든다고 하는 독이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그 독을 마심과 동시에 처음으로 오는 것은 마력과 강한 충돌을 일으키며 몸 속 구석구석에서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충격이 찾아온다.
특히, 가지고 있는 마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충격은 배가 되고, 물론 뇌에도 상당한 충격이 가해지는 독이었다.
그 독이 너무도 독한 것은 그 후에도 찾아오는 영향이었는데, 마력은 당연히 쓸 수 없게 되고, 천천히 정신마저 갉아 먹고 끝내는 폐인이 되는 그런 독이다.
설령 해독을 한다 하여도, 완벽히 해독이 되지 못하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을 재기불능으로 살 수도 있는 독이었다.
특히나 기사들에게는 그 독은 잔인한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플로아는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자신을 말리는 기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감히 자신이 하려는 것에 토를 단다고만 생각했고, 그 행동이 독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 보였다.
단지 무지한 플로아에게 그 것은 마력의 봉인과 무기력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크게 상관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어이 어이. 바이안 그거 마시지마. 마시면 끝이라고.”
뒤에서 소리치는 론을 웽웽 대는 모기를 보는 것처럼 한번 흘끔 보던 플로아는 그를 무시했다.
그리고 바로 액체를 바이안의 입에 흘려 넣으려 했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거부하며 어떻게든 버티려 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바이안의 귀에 입을 댄 플로아의 말에 힘없이 입이 열렸다.
“세이나.”
이제는 계획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론은 바로 실력행사를 해서 바이안을 빼내고 탈주하려 했을 찰나에 바이안과 눈이 맞았다.
그의 눈이 작게 휘며 웃는 것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버렸다.
‘세나를 부탁할게.’
끝내는 그 독은 바이안의 목을 타고 넘어갔고,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다.
플로아는 빈병을 만족하며 대충 바닥에 던져 카라랑 거리는 소리만이 감옥 안에 울려 퍼졌을 타이밍에 바이안의 몸이 크게 움찔하더니 이내 격하게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커헉! 윽....카학”
독의 침투에 몸에 갈무리 되어있는 마력과의 충돌의 여파와 그 충돌이 이내 뇌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왔고, 한참을 괴로워하던 바이안은 이내 몸을 추욱 늘어뜨린 상태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내 방으로 데려와.”
차마 괴로워하는 바이안을 볼 수 없어서 고개를 돌리고 있던 기사들은 플로아의 명령에 침통한 표정으로 바이안을 조심히 안아 들고 플로아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기사들에게 들어 올려 질 때 바이안의 왼손에서 검고 작은 물건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 것을 눈치 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빠져나가고 한참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론은 멍하니 바이안이 누워있었던 감옥 쪽에서 시선을 거두지를 못했다.
“미친놈.... 멍청한 놈. 미련한 놈아, 끝까지 이러기냐...”
정신을 놓은 듯한 표정을 짓고 중얼거리던 론의 한쪽 눈에서 주르륵 하고 눈물이 흘러 내렸다.
“조금만 생각해도 하면 안 된다는 건 잘 알잖아. 왜... 마셔 그걸... 미친놈아... 나중에 세이나를 만나도 못 알아보면 어쩔 건데. 평생 지켜주고 싶다며, 그런데 네가 폐인이 되면 어쩌라고.”
이내 머리를 감싸 쥐며 울부짖었다.
플로아는 요즘 매일이 즐거웠다.
자신의 침대에서 곱게 차려입고 잠이든 바이안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쓰다듬기도 하고, 부드러운 머릿결을 만지작거리며 마치 작품을 감상하듯 바이안의 하나하나를 감상했다.
“후후훗 어쩜 이리도 고울 수가 있을까?”
검지손가락으로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천천히 내려가며 자신이 취한 작품 감상을 입으로 뱉으며 행복해했다.
독의 영향이었는지, 바이안은 눈을 떠도 초점이 없는 눈동자로 멍하게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단순한 살아있는 인형이다.
그렇다고 플로아는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을 돋보일 최고의 장식품이 필요했을 뿐이었으니까 오히려 지금의 모습이 더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이제 몇일 뒤에는 대현자로서의 의식이 있었고, 그때 진정으로 대현자로 모두를 굴복시키는 일만 남았다.
물론 황제도 불러 그 의식을 할 때 바이안을 데리고 입장해 자신이 위라는 희열을 만끽할 생각을 하자 부르르하며 몸이 떨렸다.
“하아아 좋구나.”
즐거워하는 플로아와는 반대로 기사단 전체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원인은 플로아가 바이안에게 한 행동이 컸다.
“우리가 모시는 분이 정말로 대현자라고 할 수가 있을까?”
“어리석은 생각 하지마.”
“하지만....”
그들은 바이안과 론이 기사의 명예를 저버린 모습에 한때는 경멸도 했었지만 지금 그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같은 기사로서 보고 있었다.
“이미 수순대로 처벌은 끝난 상태였었다. 그런 둘을 억지로 끌고 와서 다시 처벌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말이야.”
“그렇겠지. 어떤 역사에서도 이런 일은 없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녀석들은 없을 거다.”
기사란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게 무한한 충심과 자부심으로 사는 이들이었지만, 현재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주인에 대한 불신과 그 주인을 따르며 주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명을 이행하고 있는 자신들에게의 창피함이었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인데.. 둘은 우리들이 모시는 주인이 잘 못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명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모두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자신들도 이미 느끼고 있었던 점이었지만, 기사가 주인을 의심한다는 것은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기에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기사는 주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기도 해서, 더 조심했었던 일이다.
“.....단장님은.. 어째서 아무런 말씀도 없는 것일까..”
그러다 나중에는 의구심의 화살이 단장에게까지 갔다.
단장이 한마디라도, 아니면 무언가 행동이라도 보여주셨으면 좋을 텐데 단장에게서는 그 어떤 말도 행동도 없이 그저 역할에 충실 하라는 말뿐이다.
대부분의 기사들의 분위기가 어둡다면 그들 중 일부의 기사들은 침통했다.
바이안과 론이 소속되어있었던 팀인 10사단 멤버들이었다.
“하일. 이대로 계속 참아야 하는 거냐?”
분개하는 동료들의 외침에도 하일은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않고 홀로 상념에 잠겨있다.
동료들에게는 이야기 하지 않았던 바이안과 론의 대화, 그리고 막 움직이려 하기 직전에 벌어진 독을 마신 바이안.
그래서 하일은 서둘러 감옥에 남아있는 론에게 찾아갔지만, 론과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도 없었다.
론 역시 자포자기한 듯이 상대해 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짜증 분노 서운 허탈함을 가득 품고 혼자서 서고부터 플로아의 주변까지 조심히 조사하고 있지만, 론의 상태가 나아지질 않으니 찾고자 하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몇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데스페어라니...”
“켄. 오늘 네 담당이었잖아. 바이안.. 어때보였냐?”
켄이라 불린 기사는 오늘 일을 생각하며 이내 초상집에 온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사람도 못 알아보는 것같이 천장만 보고 있더라. 가끔 허공에다 손을 휘젓기도 하고.....”
“믿어지지 않네. 천하의 바이안이... 누구보다 압도적인 능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늘 강한 카리스마로 우리들을 리드해줬던 놈인데...”
“가지고 있는 마력이 크면 클수록 처음에 오는 그 충격도 크단다. 이제 평생 그 모습.. 볼 수도 없겠지.”
모두는 한마음으로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우리를 끌어줄 녀석은 로트론 뿐인데.. 그녀석도 지금은....”
모두가 한창 떠들고 있을 때 갑자기 하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로트론 개새끼.. 보고 온다.”
“하일...”
“그리고 여전히 자포자기하고 있다면... 이제 기대를 버려야지. 으득”
감시하는 이가 한명도 없는 감옥에서 하일은 아직도 여전히 멍청하게 넋을 놓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론에게 화가 났다.
“네가 미쳤냐? 진짜로 미치게 된 건 바이안 그놈이지. 너까지 이 상태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
“이제 그만 설명해줘라... 너희 둘... 진짜... 제발... 우린.. 너마저 잃고 싶지 않다고....”
감옥 창살을 잡고 고개를 떨군 채로, 아무리 호소를 해도 론의 반응은 여전했고, 하일은 끝내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간다... 앞으로는 더 이상 찾아올 일 없을 거다.”
더 이상 론의 멍청한 모습을 보기 싫은 하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감옥을 빠져나가버렸다.
그때 가만히 있던 론은 고개를 돌려 나가는 하일의 등을 가만히 보았는데, 그런 그의 눈빛은 자포자기한눈이 아니었다.
강한 의지와 집념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상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친우에게 대답했다.
“하일.. 그리고 모두들, 미안하다. 우리도 기사야. 주인을 위해서 죽고 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지... 지켜드려야지. 끝까지 말하지 못한 점, 원망해도 할 말이 없다.”
론은 자리에 일어나 이리저리 몸을 풀며 기본 체력을 다졌다.
좁은 감옥 안에서 굳은 몸을 푸는 것은 여간 불편한 것이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바이안 개새끼야.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한다 이 말이다. 너만 소중하게 생각 하냐? 나한테도 소중한 주군이란 말이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니지만, 몸을 계속해서 움직이며 눈앞에 바이안이 있기라도 하는 듯 혼잣말을 이었다.
오랜 시간 움직여서 숨이 차오른 론은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결행은 의식의 날... 걱정마라. 네 몫까지 지켜줄 테니까.”
론의 계획은 경계가 전부 의식을 치르는 곳으로 집중 되었을 타이밍에 감옥을 빠져나와서 바로 대륙으로 탈출 하는 것이다.
탈출은 아마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애초에 자신은 있으나 마나한 관심이라 오히려 잘 되었다.
배후를 찾아내는 것이 이곳에 있었던 또 다른 목적이었지만, 분명 시간이 걸리기도 할 것이며, 만약 들키는 날에는 빼도 박도 아니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었을 시에 혼자 남겨진 세이나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다.
이제는 그녀를 지킬 기사는 자신 하나뿐이었으니, 지금으로서는 돌아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판단했다.
돌아가서 바로 세이나와 할아범을 설득하여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 로도스에서 벗어나는 것이 첫 번째로 그가 할 일이었다.
“으음... 돌아가서 바이안에 대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고민을 해봐도 딱 하고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세이나라면 분명 금방 눈치 챌 것이니, 거짓말도 통하지 않을 것이 뻔해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갑자기 원인 제공자의 얼굴이 떠올라버렸다.
“씁~ 써글년. 정신이상자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