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마한 언덕 중심에 어른 다섯이 둘러 앉아 서야 다 감싸질 정도의 커다란 나무등치 앞에서 맑고 청아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케리프는 그 노랫소리를 따라 언덕을 올라 목소리의 주인공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세이나는 그의 인기척을 느끼며 부르던 노래를 멈췄다.
“왔어요?”
“세이나님의 노래, 무척 오랜만에 듣는 것 같습니다.”
서로 나무에 등을 기대며 앉았다.
“뭐, 어렸을 때는 자주 불렀으니까요. 그런데 웬일이에요? 여기에 다 오고.”
“하하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오겠습니까? 저도 오랜만에 바람이 쐬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케리프는 세이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처럼 이신데 노래.. 더 부르지 않으십니까?”
“별로요.”
“노래 부르시는 거 좋아하셨잖습니까?”
케리프의 말을 들으니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는 무척 좋아했더랬다.
지금이야 가끔 부르지만.
“기억에는 없지만 엄마의 영향인가 보죠. 반이 그러던데 저한테 자주 노래 들려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그 후에 서로 대화가 멈추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그리고 그 어색한 분위기를 케리프가 먼저 깼다.
“세이나님. 몇일 전에 무섭게 찾아오셔서 여쭈신 뒤로 더 묻지 않으십니까?”
불안과 걱정이 그대로 느껴지자 세이나는 케리프 쪽으로 고개를 틀어 그대로 세운 무릎위에 머리를 기댔다.
“그랬죠. 그 다음날 이것저것 불게 하려고 했는데. 관뒀어요.”
“어째서..”
“뭐~ 녀석들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첫 번째는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케리프씨가 알아서 찾아 올 거라고 예상도 했고요.”
세이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케리프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지금 진짜로 중요한 것은 녀석들의 행방이 아니라, 나 자신 이예요.”
“자신인가요?”
진지하게 묻는 케리프에 세이나는 작게 웃었다.
“네. 사람과 사람이 스쳐 지나가기도, 만나기도 하며 맺어지는 인연이라는 것이 재밌지 않아요?”
“무엇을 말씀 하시려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요, 지금까지 그 인연이라는 것을 크게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구태여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이대로 흘러가는 대로 대충 살려고만 했지... 그런데도 만들어지는 인연은 꼭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지네요.”
그제서야 세이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깨닫게 된 케리프였다.
“결국 두 분에 대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게요. 굳이 잃어버린 과거에 관심도 없고, 일부러 찾고 싶지도 않은데. 물론 지금도 조금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지만, 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데굴데굴 굴러와 이미 박혀있던 돌이었던 것처럼, 꼭 박히지를 않나, 멋대로 지켜주겠다고 쫒아 다니고, 이제는 멋대로 자취를 감춰버리네요.”
세이나는 자세를 고쳐서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댔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제 자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은 많은데 책임지기 싫어서 케리프씨에게 다 떠넘겨버리고, 핵심적인 이유는 잘 몰라도 도망치고 숨으려고 제 자신을 꾸며 그 속에 숨었죠. 그거 상당히 편해요.”
그 방법을 추천한다는 듯이 반짝 빛내다가 다시 진지해졌다.
“하지만 그건 그것밖에 안 되는 인생이 되는 거죠. 분명 마지막은 재미없는 인생 뿐일 거예요. 둘이 저를 지켜 주려고 열심히 했던 것처럼, 그리고 아무런 말없이 떠난 것도 저와 관계 되어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고, 오히려 알지도 못하는 제 일에 마주볼 생각도 하지 않고 둘에게 어리광만 부리니, 그런데도 그 어리광을 들어주려고 노력하는데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했다.
“저 자신의 존재는 아마도 커다란 문제의 중심에 들어가 있겠죠. 그렇다면 제가 계속 이렇게 있어도 언젠가는 억지로라도 그 문제가 저를 묶을 것이고요. 이제 저도 졸업해야죠.”
“졸업..입니까?”
자신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늘 진지해지는 케리프에게 환하게 웃으며 그만 내려가자 손짓했다.
“제 자신은 제 것 이예요. 내가 나를 외면한다고 좋을 것도 없고, 내 자신을 알아야 가야 할 앞이 보이죠. 그래서, 처음으로 저 스스로 부딪혀보는 인생을 선택해 보려고요. 문제를 피할 수 없으면 선수 쳐서 앞으로 나가야죠. 즉! 피할 수 없으면 선수 쳐라. 아하핫”
언덕을 나란히 내려가다 세이나는 확고한 의지로 마저 말했다.
“책임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크기만큼 비례한다.”
그러다 빙글 몸을 돌아 한 꺼풀 벗겨진 시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 결론입니다. 제 자리를 찾으려 해요.”
케리프는 이내 걷던 걸음을 멈추고 복잡한 마음으로 세이나의 이름을 불렀다.
“세이나님.”
“이제 세이나가 아니예요. 대현자 하이론 세이아나. 그것이 저의 본질입니다.”
주먹을 말아 쥐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케리프는 그녀의 가까이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옷깃에 키스를 했다.
“모든 것은 존귀하신 분의 뜻대로..”
키스를 한 후 그 자세 그대로 세이나에게 묶어 두었던 말을 꺼냈다.
“세이아나님 오늘 저희 저택에 모시고 싶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함께 해 주십시오.”
“네.”
케리프의 안내로 그의 자택의 서재로 자리를 옮겼고, 세이나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작은 상자를 챙겨와 마주 앉는 케리프와 마주했다.
그리고 케리프는 비밀로 하기로 했었던 일들인 바이안, 론과 함께 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세이나에게 풀었다.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세이나는 작게 인상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건드리며 이야기를 속으로 정리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겠네요.”
“네 맞습니다.”
케리프의 대답에 세이나는 표정을 구기며 화가 난 감정을 목소리에 살짝 섞었다.
“내가 목적이 아니라 둘이 목적이라는 거네요. 이것들이 아주 제 발로 사지로 들어가서 어쩌란 말이야.”
“화내시는 것이 그쪽입니까?”
“응? 그럼요?”
“아니, 그... 가짜 대현자에게 화를 내실 줄 알았습니다.”
“아~ 물론 그것도 화는 나죠. 아무래도 제가 서둘러서 천공의 땅으로 가야 하겠어요.”
하지만 정작 올라갈 수단도 방법도 모르기에 세이나는 다시 생각에 잠겨야 했다.
“홀로 올라가시는 것은 오히려 두 분이 아니라, 세이아나님께서 사지로 들어가시는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세이나는 그 질문을 당당하게 씹었다.
“올라갑니다.”
“후우~~~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앞에 올려 둔 나무상자를 세이나의 앞에 밀어놓자 그녀는 그 나무상자를 집어 들고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 속에 있는 것은 고대 문자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손바닥 크기의 구체였다.
“천공의 땅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통행구입니다.”
이런 걸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의아해 하는 세이나의 궁금증을 바로 풀어주었다.
“예전에 엘라이어님께 선물로 받았던 물건입니다. 엘라이어님께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다음에 이 통행구로 천공의 땅으로 놀러오라시며 주시더군요. 황족들이 쓰는 물건이라시며, 지금은 자신은 황족이 아니나, 제가 사용해서 올라가면 황족의 손님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
아무 말 없이 그 구를 집어 든 세이나는 두 손으로 꼬옥 쥐었다.
“사용법은?”
“마력이 없는 저희 지상인들은 정해놓은 패턴대로 만지면 신호를 받은 위에서 저를 소환하여 데려간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마력이 있으면 자신의 마력을 불어 넣는 것만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 사용 패턴..”
“그건 됐어요.”
“네?”
사용하는 패턴을 알려주려고 하다가 말을 자르는 세이나에 반문했다.
“그러면 마중 나온다면서요? 번거롭고 귀찮아져요. 위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상태면 오히려 몰래 들어가는 것이 제일 좋아요.”
“하..하지만 세이아나님께선 마력이..”
당황해 하는 케리프의 모습이 너무 웃겨 일부러 개구지게 웃으며 한 번 더 그를 당황시켰다.
“귀족이었던 엄마에게 감사해야죠.”
“?!!!!”
바이안과 론 덕분에 이제는 더 이상 놀랄 것이 없다는 케리프였지만 새삼 다시 크게 놀라야했다.
“어..언제..”
“응? 아~ 얼마 안됐어요. 주변에 알려줄 사람도, 보여줄 사람도 없으니 깨닫는 것이 늦죠. 마력이나 능력이 어떤 것 인줄도 몰랐으니까요.”
그리고는 자리에 일어나 넓은 곳으로 옮긴 세이나는 작게 신 호흡을 했다.
“설마!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바로 가시려고요?”
“여기서 준비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해져있는지 모르니 서두르려고요.”
케리프도 덩달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세이나가 더 빨랐다.
마력을 손에 집중해서 구로 옮기자, 희미하게 빛이 생기며 세이나의 몸 전체를 감쌌다.
“케리프씨. 할아범을 부탁할게요.”
“세이아나님!”
하지만 케리프의 다급해하는 목소리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모습은 빛과 함께 그 곳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사라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기도했다.
“저는 이렇게 기도 하는 방법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세 분 모두, 부디.. 무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