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하고 거대하며, 성스러운 분위기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넘실거리는 홀에 유례없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제의 기사들이 왼편에 서있으면, 현자의 기사인 공백의 기사단들 모두가 오른편에 도열해 있었고, 그 뒤편의 양쪽으로 갈라서 귀족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고급스러운 융단이 길게 깔려 상단 쪽까지 연결 되어, 그 상단에는 손을 살짝 오므리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여신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말을 하는 이가 없었고, 알 수 없는 긴장감만이 팽배하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침묵은 거대한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플로아의 등장에 깨졌다.
그녀를 호위하듯 나란히 걷고 있는 네 명의 기사들 사이에 붉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려 고정시킨 보석들과 귀걸이를 했으며, 진한 화장이 맞물려 화려한 모습의 플로아에게 시선이 집중 되자마자 주변의 모든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바로 뒤에 끌려오듯 목줄을 한 채로 따라가고 있는 바이안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된 귀족들과 황제와 황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의 행색은 처참했다.
얼굴은 몹시 야위었으며, 초점이 없이 허공에 시선을 두고 비틀 거리며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움직이고 있었고,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그런 그를 한 번씩 목줄을 잡아 당겨 방향을 잡는 플로아에게 흔들리며 끌려가는 상태에 황후는 순간 비틀거리며 쓰러질 뻔했지만 조용히 자신을 잡아주는 황제에게 간신히 의지하며, 주먹을 꽉 쥐고 의연하게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움직일 준비를 하는 황제의 기사들과 황제의 시선이 잠깐 오갔지만 황제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그들을 대기시켰다.
플로아는 천천히 걸으며 위대한 자신을 보기 위해 도열해 있는 이들의 면면을 감상했다.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침통한 표정을 한 이들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들, 그리고 어둡게 가라앉은 황제와 황후의 모습에 쾌감까지 일었다.
모두가 자신의 발아래 있는 듯 행복감에 젖어 상단 바로 밑으로 도착해 뒤를 돌아 높은 콧대를 세우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오호홋~ 나를 축하해 주기 위해서 모인 모두에게 오늘이 뜻 깊은 날이 될 것이다.”
황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플로아의 입에서는 하대만이 나왔다.
왼편에 도열해 있는 기사들과 귀족들은 황제를 무시하는 플로아의 행태에 분노가 치솟았지만, 황제 본인이 참고 있기에 감히 대꾸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공백의 기사단들은 떫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주인 앞에서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플로아의 축사 아닌 잡담이 이어지고 있을 때에 문 밖에서 커다란 대화소리가 입구 쪽에 가까이 있는 이들의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그들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입구 쪽으로 돌리자 소리가 들리지 않아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자연히 그들을 따라 방향을 돌렸다.
문 밖에서 떠들고 있는 사람들은 역시 세이나와 론이다.
“이게 무슨 계획인데요? 아주 무대포에 단순무식한 방법이잖습니까?”
“아 뭐래? 말했잖아. 플랜C. 너도 동의했잖아. 지금은 이 방법이 최고라고.”
세이나가 바락바락 소리 지르자 론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난 또 무슨 생각이 있겠거니 했지, 그냥 이렇게 진짜로 들이밀 줄 누가 알았냐고요.”
“내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난 단순한 걸 좋아하는 성격이거든? 복잡한 게 제일 싫고 귀찮아. 그리고 나도 나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고. 주댕이로 조져버리기! 얼마나 좋아.”
“아~ 예예. 어련 하시겠습니까.”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도 모두가 침묵하고 있다 보니 거대한 홀 안에 문 바로 앞에서 떠들고 있는 둘의 목소리가 울려 플로아의 귀에도 작게나마 들려왔다.
덕분에 방해받은 플로아의 기분은 짜증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사이에 도열해 있는 하일과 동료들은 눈이 커지다 못해 빠져나올 듯이 커졌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 중 하나가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는 감옥에서 넋을 놓고 있어야 할 론의 목소리임이 확실했고, 누군가에게 존칭을 써가며 티격 거리는 소리에 다른 누구들 보다 빠르게 상황 파악을 위해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무언의 대화를 했다.
“카시어스경...다시 한 번 말할게. 전우들에게 검을 들이밀 수도 있어.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괜찮겠어?”
“이미 각오한 바입니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 정면에 닫혀있는 문을 노려보았다.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못된 미소를 지은 세이나와 동시에 론은 양 손바닥을 거대한 문에 대자 세이나가 신나게 외쳤다.
“화려하게 가보자고!”
론의 마력이 폭발하듯 증폭되며 문 구석구석 마력의 줄기를 뻗어갔다.
그리고 엉망으로 뻗어나가며 섞이는 마력을 버티지 못하던 문이 이내 떨리며 진동을 시작했다.
“전방! 수류탄!!”
세이나의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크게 외침과 동시에 거대했던 문은 하나하나의 파편이 되어 홀의 사방으로 튀어 여기저기 날아갔다.
문의 가까이에 있던 이들은 서둘러 너도나도 마력을 급히 일으켜 날아오는 파편들을 방어하는데 급급했고, 그 뒤 모두는 뭉게뭉게 번진 먼지가 가득한 곳에 흐릿하게 보이는 두 명의 인영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폐하!”
“기다려라.”
황제는 한 손으로 기사들을 말리며, 갑자기 일어난 돌발 상황을 주시했다.
먼지 구름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지만 아직 흐릿해 구분이 어려워 황제는 마력을 두 눈에 집중 하자, 두 명의 모습이 확실히 황제의 눈에 박혔고, 자신도 모르게 크게 놀라버렸다.
한명은 자신도 제일 잘 알고 있는 바이안의 친한 친구인 론이라는 것은 바로 알았지만, 그 옆에 당당하게 서 있는 아직은 소녀티가 남아 있는 여인이 도대체 누구인가 생각하다가 머릿속에 한명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가며 설마 하는 마음과 동시에 확신이 되어버렸다.
숨길 생각도 없는지 그 여인의 목에 너무나도 당당하게 걸려있는 목걸이와 머리색 탓이었다.
“허..허허...”
“폐하 어찌 할까요?”
다시 한 번 상황을 묻는 기사에게 황제는 조금 나아진 표정으로 지시했다.
“아직은 나서지 않는다. 변한 상황을 주시하고 경계만 하라. 그리고 그대들은 황후의 안전을 지키는 것을 우선시하라.”
“예. 폐하”
주변에 들리지 않게 작게 속닥거리며 명령을 하고 있을 때 황후는 불안한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저 바이안이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으로 가득해서 주변의 상황이 돌아가는 것에 몸도 생각도 따라가지 못하는 황후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황제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며 작게 귓속말을 해줬다.
“황후.. 혹.. 저 아이.. 누군지 알아보겠소?”
작은 고갯짓으로 갑자기 나타난 낮선 침입자들을 가리키자 황후는 영문을 몰라 하다가 먼지 구름이 걷히고 나서야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는 믿어지지 않는 사람을 확인 한 황후는 이내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세..세상에...”
한편, 플로아는 자신의 화려한 의식을 망친 침입자들로 인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이 되었다.
그리고 공백의 기사단들은 일제히 둘을 경계했지만 복잡한 표정은 감출 수가 없다.
그 침입자중 한명이 같은 기사단에 있던 론이었기 때문이기도 컸지만 론이 보여준 능력의 크기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들의 틈 한편에서는 하일과 동료들도 역시 잔뜩 긴장을 하며 그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웬 놈이냐? 감히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나타나느냐?”
날카롭게 성을 내는 플로아를 문가에서 빤히 보던 세이나는 론에게 고개를 돌렸다.
“카시어스경. 저게 그 돌은년?”
“네. 그 돌은년입니다.”
“헤~ 저게?”
순간 어느 한 구석에서 웃음을 참지 못해 품 하고 새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곳 홀에 있는 이들 거의 대부분은 마력을 사용할 줄 아는 이들이었기에 남들보다 청력도 시력도 좋아서 플로아를 대놓고 까는 세이나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고, 이내 참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물론 마력도 없는 플로아는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세이나의 손가락질만으로도 짜증이 치솟고 열불이 났다.
“이익~ 이곳은 신성한 의식이 치러지는 곳이다.”
플로아의 일갈에 세이나는 콧방귀를 선물로 날려줬다.
“하~ 뭐래니? 신성함이 다 뒈졌다.”
세이나 역시 플로아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한방 날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변이 시끄럽게 변해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던 바이안의 몸이 작게 떨리기 시작하면서 이내 크게 몸을 떨었다.
갑자기 귀에 들리는 한명의 목소리가 그를 자극한 것이다.
아직도 환상이 보이고 들리는 것인가? 느릿하게 몸을 돌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아....아......헤...세.....”
하지만 힘없이 바로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세이나는 플로아에게 소리치다가 그녀의 옆에 있던 바이안이 자신을 돌아보며 넘어지는 모습을 보자마자 몸을 굳혔다.
“......”
그녀의 옆에 있던 론 역시 오만상을 찌푸리며 아차 싶어 하면서 자신을 책망했다.
플로아의 남들에게 보여주며 자신을 과시하는 그 성향을 알았으면 조금 더 생각 할 수 있었던 부분이었다.
설마 대놓고 제 몸도 못 가누는 바이안을 끌고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카시어스경... 나에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구나.”
“그게...”
“닥쳐.”
분노가 가득한 한마디에 론은 곧바로 세이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내가 묻는 것에만 대답해. 변명은 듣지 않겠어.”
“예.”
단순히 고문에 의해서 약해진 것이라고는 보기 힘든 모습에 이성이 날아갈 것 같아 세이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화를 가라앉혀갔다.
“반이 왜 저러는 거야?”
“그...”
하지만 쉽게 나오지 않는 론의 목소리에 으르렁거렸다.
“카시어스경. 다시 한 번 물을까?”
“아닙니다. 데스페어라는 독을 마셨습니다. 마력과의 충돌을 일으켜 마력을 쓰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목적이 있지만, 그 충돌의 여파가 뇌까지 닿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폐인이 되는.. 설령 해독약을 먹는다 해도 완벽히 해독이 되지 않는.. 해독약이 없는 독...입니다. 그리고..”
“그만. 그 정도면 됐어.”
세이나는 충분하다며 그의 말을 자르고 정면에서 초점을 잡지도 못하는 눈동자로 자신을 향해서 버둥거리는 바이안의 모습을 눈에 담아가면서 차가운 표정으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바이안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며 독이 얼마나 진행되었는가를 판단했다.
“하~ 저 돌은년을 느긋하고 완벽하게 입으로 조져줄려고 했는데, 조금 행동을 빨리 해야겠다.”
주변은 친절하게도 세이나와 론의 대화가 끝나서도 얌전히 기다렸다.
플로아가 못마땅한 것도 있고, 론이 플로아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부복하는 모습에 혼란이 가중되었기 때문이다.
세이나는 큰 동작으로 플로아를 가리키고 소리쳤다.
“야이 돌은년아! 저거 내거거든? 남의 것을 탐하면 아주 잣 되는 거야.”
“뭐...뭐뭐..”
신랄한 세이나의 외침에 플로아의 혈압이 순간적으로 상승했다.
주변의 모두에게 혼란을 준 장본인인 세이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옆에 있던 론은 세이나가 마력을 모으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마력이 집중적으로 세이나의 목으로 모였고 이 후에 세이나는 바로 소리쳤다.
“바안!”
세이나의 마력이 깃든 목소리가 바이안의 귀에서 뇌로 꽂혀 그의 정신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에 바이안의 움직임이 멈췄고, 미세하지만 바이안의 초점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하며 아직 의식이 무사함을 파악한 후 작게 안도한 세이나는 그의 정신을 고정시키기 위해 다시 마력을 끌어올려 바이안을 향해서 내뱉었다.
“난 과거가 없어. 너도 없어. 네가 이야기 해주는 것들도 나는 몰라. 하지만, 네 이야기속의 나를 상상해서 보면 그때 이렇게 말했었을 거야.”
“세...나....”
“오빠가 나를 지켜주는 기사님이 된다면.. 오빠는 내가 지켜줄게.”
‘그럼~ 그럼~ 오빠는 내가 지켜줄래.’
세이나의 마력을 담은 목소리는 바이안의 뇌를 다시 한 번 강타했다.
세이나의 마지막 말이 크리티컬 히트였는지, 바이안의 눈의 초점이 완벽히 돌아왔고, 정신이 온건히 제 자리를 찾았다.
“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