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숭실대입구, 숭실대입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출근길답게 여러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와중에도 미희는 귓속에 울리는 댄스곡에 정신을 맡긴 채 그저 멍했다.
‘내가 미쳤지..어제 그 드라마를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어.. ‘
어제 주말이라고 밀린 드라마를 보던 게 문제였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나서, 절친인 지수가 요새 자신이 빠져 있는 드라마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난리 치던 게 생각 나 다시보기로 1화를 눌렀을 뿐인데..
어느 새 가장 최근 업데이트 회차까지 클리어하고, 문득 밖을 내다보니 깜깜한 하늘 아래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애초에 미희에게 주말이라고 특별한 약속이 없었고, 드라마의 중독성은 너무 강했다.
하루종일 TV 앞에 있어서인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뻑뻑 소리가 나고, 이제 겨우 출근길인데 피로함에 자꾸 눈을 감고만 싶었다.
‘어째 쉬고 왔는데도 더 피곤하냐..월요일 아침부터 출근하자마자 격렬하게 퇴근하고 싶다아…’
본인의 처참한 심정과는 반대로 평소와 달리 초췌한 미희의 모습은 긴 생머리와 조화를 이뤄 아련한 미를 뽐내는 중이었다.
주위에 있던 남자들은 그런 미희를 흘끔거리기 바빴다.
그 때였다.
“읍!”
지하철이 숭실대입구역을 출발하자, 멍하니 있던 미희는 순간적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지독한 악취에 한 손으로 급하게 코를 막았다.
“하아..또야?”
벌써 한 두번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고운 얼굴이 일그러지고, 코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희는 황급히 몸을 돌려 기둥에 기대 섰다. 길게 심호흡을 하니 조금씩 안정되는 게 느껴졌다.
‘하아..하아..그나저나 이거 큰일이네’
요 근래 이 역을 지날 때마다 미희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가끔 엄청난 악취가 풍겨와 그녀를 괴롭게 했다.
고작 냄새라고 무시할 것만은 아니었다.
이 냄새 한번에 몸이 휘청거릴 정도이니, 미희 본인에겐 심각한 문제였다.
대체 이 악취의 시작이 언제였을까.
미희는 커다란 눈동자를 또르륵 굴리며 기억을 더듬어 내려고 애썼다.
‘분명 지난 주 목요일부터였어’
지난 주 목요일 출근길에 숭실대입구역을 지날 때였다.
그 날은 인터넷으로 주문한 새 구두를 신고 처음 나온 날이었다.
모니터로 볼 때는 예쁘기만 했는데,
막상 신으니 발 뒤축이 구두에 바짝 닿아 빨갛게 변하는 것이,
곧 피를 보겠구나 싶어 온 신경이 온통 발에 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똑 같은 악취가 풍겨왔고, 순식간에 미희의 신경을 빼앗아 갔다.
어딘가에 누가 먼저 관심을 차지하는가 게임이 있다면 금메달 감이었다.
미희가 더 미치겠는 건, 다른 사람들은 이 악취를 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실제로 나는 냄새가 아니라, 바로 영혼의 냄새였기 때문이다.
미희는 아마도 사람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영혼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물론 본인이 원한 것은 아니다.
이게 다 어쩌다 얻게 된 해괴한 능력 때문이다.
‘저 건너 칸에서 풍겨 나오는 것 같은데.. 아냐, 아니야.신경쓰지 말자, 신경쓰지 말자.
이럴 때면 갑자기 이런 쓸데 없는 능력을 주고 간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워 진다.
'이왕 주실거면, 다른 걸 주시면 좋았을 텐데. 로또 번호라든지, 또 로또 번호같은..'
아마 누군가에겐 신기하고 특별해 보이는 능력이겠지만,
미희에게는 매우 귀찮고, 가끔은 제발 썩 꺼져 줬으면 하는 능력이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더욱.
미희는 참을 수 없는 악취에 널을 뛰는 정신을 다잡으며 다시 현 상황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이 정도 악취라면, 영혼이 거의 쓰레기 수준이겠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와 연관이 있지 않는 한, 한번 맡고 지나가면 잊어버릴 아주 적당하고 평범한 향을 가졌다.
그러나 가끔 특이한 향기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특정한 분야에서 노력 끝에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영혼의 향기는 향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뭔가 깊고 진득한 느낌이 있으며,
연예인이나 일반인들 중에서도 주위에 늘 관심이 따르는 사람들의 향기는 아주 매력적이라 자꾸 맡으면 중독될 것만 같다.
또한 유아들이 가진 영혼의 향기는 비누 내음이 나고 사랑스러웠으며,
실연이나 실직과 같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의 향기에서는 비릿한 물기가 느껴졌다.
이와 반대로 영혼의 향기가 아주 독하고, 악취가 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영혼이 병들고 황폐해지다 못해 물이 고여 썩고 있는 사람들. 주로 범죄자들의 영혼이 그런 향기를 지녔다.
갑자기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른다. 사악한 혼을 보는 일은 아무리 해도 적응이 안 된다.
‘그래.. 분명 아주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이거나 그게 아니면 적어도 그 정도의 범죄를 조만간 실행하려는 사람이겠지, 아마도.’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나니 이 사람을 방관하면 큰 범죄를 방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아 진짜! 오지랖이라도 넓지 말던가!’
마음 속으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차오르는 욕설을 누르며 미희는 발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얼굴이라도 확인해 둘 생각이었다.
그래, 거기까지만. 만약, 만약을 위해서.
그러나 다음 칸에 가까워지고 악취가 강해질수록 미희의 발걸음은 느려지기만 했다.
‘으아..가기 싫다..냄새 진짜 독하다.’
미희는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몸을 세우며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 적색 경보를 울리며 위험을 경고 했다.
드디어 건너 칸에 도착하자 미희의 날카로운 후각이 자연히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회색 후드티를 머리까지 감싸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람.
‘저 사람이구나!’
직접 인물을 특정한 순간, 그의 영혼의 향이 구체화되어 순식간에 미희를 강타해 왔다.
‘으윽!’
쓰레기 냄새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좀 더 어둡고, 좀 더 묵직하다.
그저 냄새에 불과한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애써 진정시키려는 이성과는 달리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마치 이 악취가 거대한 포도넝쿨처럼 실체화되어 자신을 꽉 조일 것만 같았다.
‘괜..찮아. 저 사람은 나를 몰라. 자연스럽게, 티나지 않게...’
미희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보는 자신의 담대함에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발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움직이려 노력하며,
악취가 나는 영혼에서 50m 정도 떨어진 대각선 좌석의 기둥에 기대 섰다.
‘그래도 고개라도 숙이고 있으니 관찰하기는 좋네. 뭐 기억해 둘만한 게 없나?. 어?’
미희의 눈길을 끈 것은 그 후드티 남의 운동화였다.
새하얀 바탕에 마치 여러 가지 색의 물감을 튀긴 것 같은 그래피티 아트에, 빛의 각도에 따라 다양한 색깔로 빛나는 로고 무늬가 있는 디자인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아 빠른 속도로 굴러가던 미희의 머리가 마침내 정답을 찾아냈다.
친구인 지수가 얼마 전 카페에서 잡지 책에 나온 걸 보여주었다.
‘맞다! 저거 60개만 판다고 했던 그 한정판 같은데?’
그렇게까지 머릿속으로 생각한 순간 이었다.
후드티를 입은 사악한 영혼은 일순 고개를 들었고, 미희는 그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약간 각진 턱에 이마를 덮는 앞머리, 처진 눈.
그러나 잠깐 마주친 그 눈 속에는 끝도 없는 암흑이 존재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동공이 흔들린 미희는 암흑과 같은 눈에서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계속 길을 가던 것처럼 그를 지나 다음 칸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발걸음을 신경 쓰면서.
‘흐어억..마주쳤다.. 정통으로 마주쳤어! 우미희, 진짜 이 놈의 오지랖..오늘 사고 제대로 쳤다!’
비록 속으로는 절규를 내질렀지만.
그리고 그런 미희의 뒷모습을 그 후드티 남자가 줄곧 눈으로 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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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칸에 와서야 참던 숨이 터져 나왔다.
“휴우.. 무사히 지나왔다. 진짜 심장 멈추는 줄 알았네. 진짜 아침부터 뭐 하는 짓이니.. 하아..”
미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콩닥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원래도 하얀 피부는 긴장감으로 새하얗게 질리고, 손에는 아직까지도 감출 수 없는 떨림이 보였다.
생각보다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한 손의 떨림 때문에 다른 손으로 감싸고 있는데, 어디선가 한번도 맡아본 적 없는 향기가 흘러왔다.
“이게.. 대체 무슨 향기지?”
놀라울 만큼 감미로운 향기였다.
감미롭다. 그 외의 다른 표현을 미희는 골라내지 못했다.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부드럽기도 하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신비롭기도 하며, 시원한 청량감이 바람결에 살랑대는 듯한.
오늘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날인가.
조금 전 악취가 나는 영혼으로 인해 떨리던 미희의 심장이 순식간에 평온을 되찾고, 몸 전체가 따스한 기운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 끝 없이 이 향기를 맡고 싶었다.
미희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이 향기의 주인을 눈으로 쫓았다.
그녀가 잡고 서 있는 기둥에서 가까운 좌석에 앉은 한 남자가 역시 미희를 바라 보고 있었다.
짧은 순간 남자가 미희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보았기 때문에, 미희는 요요한 이 남자의 눈동자에 순간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의 향기가 너무나 좋아서 입도 뗄 수가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음 순간 남자가 미희의 눈동자에서 눈을 떼고, 지하철의 움직임마다 휘청거리는 미희의 창백해진 얼굴을 살펴보더니 엉덩이를 들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어디 안 좋으시면 여기 앉으실래요?”
미희는 잠시 현실감 없이 멍하니 자신에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자신을 걱정하는 말투에 어쩐지 아이처럼 눈물이 핑 돌았지만, 황급히 눈을 깜빡여 물기를 지워냈다.
“저 곧 내려요. 감사합니다. 이제 괜찮아요”
사실 당신 향기가 너무 좋아서 괜찮아 진 것 같아요.
자리를 바로 양보해줄 생각이었는지 일어나려던 남자는 일순 엉거주춤 당황했으나, 곧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미희가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는데, 지하철 정차역 알림 방송이 흘러 나왔다.
“이번 역은 총신대 입구, 이수 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오른쪽, 오른쪽입니다.”
미희는 남자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이번에 내리지 않으면 지각 확정이었다.
돌아서지 말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이성으로 누르고, 미희는 언제 다시 만날 지도 모르는 천상의 향기를 가진 그 남자에게 아쉬움의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인사를 끝으로 하차하려는 사람들의 흐름에 몸을 맡긴 미희에게 남자가 다급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저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