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네?”
사람들이 많아 목소리가 묻히자 남자의 음성이 커졌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초면에, 다시 만날 기약도 없는 사람에게 헤어지면서 묻기에는 다소 적당하지 않은 질문이었으나, 미희는 왜인지 기뻤다.
그래서 하차 행렬에 밀려 가면서도 남자의 물음에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미희요! 제 이름 우미희예요!”
미희의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신승은 왠지 아쉬운 마음에, 창문으로 그녀의 모습을 찾았다.
놀랍게도 그녀 역시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는 말없이 계속 바라보았다. 열차가 출발하여 보이지 않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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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가진 영혼의 향을 맡는 다는 것은 생각보다 골치 아픈 능력이다.
처음 이 능력을 얻게 된 무렵에는 대중 교통이나 공공 장소에 마스크 없이는 다니지도 못했다.
수 많은 영혼들의 독특한 향기가 원하지 않아도 코 속으로 빨려 들어와 그녀를 자극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들을 만나도 그들이 가진 영혼의 향기를 맡게 되는 데, 자신도 원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그들의 치부를 엿본 것 같아 난감하기도 했다.
미희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바로 그날의 꿈을 바로 어제 꾼 것처럼 생생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건 꿈이라기 보다 차라리 꿈의 형태를 빌린 현실이자 예언이었다.
작년 어느 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갑자기 꿈에 나왔다.
돌아가신 지 3년 만이었다.
유난히 할아버지를 잘 따르던 미희는 그저 오랜만에 만난 할아버지가 반갑기만 했다.
잘 생각해보면,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갑자기 꿈에 나타난 이 상황을 이상하게 느꼈어야 했는데 말이다.
“할아버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잘 지내셨어요? 그런데 이렇게 오실 수 있는 거였어요?”
한걸음에 달려가 안기며, 미희가 할아버지를 밉지 않게 흘겼다. 왜 진작에 오지 않으셨나, 하는 섭섭함과 그에 비례한 반가움이 동시에 들었다.
“미희야, 나도 네가 가장 보고 싶었단다.
진즉 오고 싶긴 했는데, 쉽지 않았지. 이것도 사정 사정해서 잠깐 올 수 있었단다.”
할아버지는 다정하게 웃으시며 미희의 손을 쓸었다.
“우리 미희는 여전히 예쁘고, 착하고, 사회생활도 제법 똑 부러지게 잘 하더구나.
그 꼬물거리던 아이가 이제 사회에서 돈 받고 일도 하고, 기특한 녀석 같으니.”
할아버지는 정말 기특하다는 듯 미희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신다.
“그런데 너 왜 연애는 안 하는 게냐.
내가 계속 지켜봤지만 도무지 네가 여지를 두지 않더구나.”
“아 그게 저.. 할아버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지금은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그래요.”
꿈에서까지 혼나다니.
갑작스러운 할아버지의 태클에 미희는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아니 그 고운 얼굴 물려줬으면 써먹어야 할 것이 아니냐.이 할비는 정말 걱정이로구나.
나 때는 이제 네 나이면 결혼해서 애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단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고모 때문에 속썩이던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미희에게 때가 되면 네 짝을 만나야 한다고 강조하시긴 했다.
그렇지만, 그건 아직 자신에겐 먼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 충분히 이상해요. 저 아직 스물 다섯이라구요.”
이때는 아직 스물다섯이 맞았다. 남녀불문하고 대학생이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그래, 그렇긴 하다만 나는 어서 우리 미희가 사랑 받고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단 말이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반칙이잖아요..
“할아버지 마음은 잘 알겠어요. 그렇지만 제가 요새 일이 많이 바빠서 연애할 시간이 진짜 없어요..”
“이런... 너는 연애를 무슨 부담스러운 숙제처럼 생각하는 것 같구나."
할아버지는 얼굴 가득 안타까운 표정이셨다.
"미희야, 사랑하는 것과 바쁜 것은 아무 연관이 없단다.
자기 짝만 제대로 만나면, 사랑하는 것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지지.
하지만 이 할비랑 네 할머니처럼 서로의 인연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란다.
하늘의 도우심이라도 있기 전에는 말이다.”
아하. 미희는 이제야 깨달았다.
이건 대화가 아니었구나. 정답은 정해져 있고 그냥 자신은 듣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나저나 할아버지 답다.
늘 먼저 간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사셨는데.
내 꿈이지만 참 일관성 있으시네.’
미희가 아직 꿈이라고 믿으며, 속으로 딴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할아버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하늘의 도우심을 선물해 주려고 왔단다.
미리 말하는 데, 가져오도록 설득하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
네가 그 모습을 봤다면 이 할비에게 고마운 마음이 샘솟았을 텐데, 아쉽구나.”
미희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따라가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하늘이 도우심? 무슨 선물이요? 누구를 설득하신 건데요?
궁금한 포인트가 너무 많으니 오히려 할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할아버지의 한없이 진지한 얼굴을 마주하자니, 꿈인 걸 알면서도 불안감이 슬금슬금 밀려온다.
하늘의 도우심이라니, 뭔가 말도 안 되는 게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경험상 찝찝한 건 처음부터 거절하는 게 정답이다.
“전 괜찮아요, 할아버지. 이렇게 할아버지를 만난 것만으로도 선물 같은걸요.”
됐어, 자연스러웠어!
그러나 할아버지는 검지 손가락을 흔들며 짐짓 단호한 표정을 지으신다.
“괜찮기는! 혹시 거절할 생각이거든 내가 거절이다.
이건 정말 누구나 가질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이란다.
아마 이 능력이 널 하늘이 내려준 짝에게 데려다 줄 거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요.
미희가 뭐라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 뭔가 눈 앞에 작은 완두콩만한 빛이 팟! 하고 생기더니,
순식간에 자신의 심장 속으로 쑤욱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뭐야?'
뭔가 몸 안에서 새싹이 움트는 그런 느낌?
심장 부근이 조금 간질거리나 싶더니, 그로부터 사방으로 뭔가 따스한 기운이 몸 안을 가득 채우는 기분이 들었다.
신기한 마음에 두 팔을 벌리고 몸을 이리저리 둘러 보았지만, 그 뿐. 그 밖의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다만, 갑자기 어디선가 맡아 본 것 같은 그리운 향기가 코 끝을 찡하게 울려왔다.
‘이 향기, 아주 그리운 느낌인데.. 분명 언젠가 맡아 본 냄새야.. 어디서?’
기억이 날락 말락 해서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음, 좋아, 확실히 전해준 것 같구나.
이 능력만 있으면 네 인연이 나타났을 때 바로 알 수 있을 게다.
그 사람에겐 다른 사람에겐 없는 아주 특별한 향기가 있거든.
자, 이제 약속한 시간도 얼추 되었고. 그럼 난 가보마, 미희야. 잘 있거라.”
3년만에 만난 할아버지는 더이상 미련 없다는 듯 휙 돌아서셨다.
이제 다급해진 건 미희 쪽이었다.
“할아버지, 잠시만요! 대체 뭘 주신 건데요! 설명이 너무 빈약하잖아요!”
“나도 가져본 적이 없어 잘 몰라. 그건 네가 차차 알아가거라.
가만! 내 정신머리 하고는.. 전언이 있었는데 잊어버릴 뻔 했구나.
그 능력 잘하면 키울 수도 있는가 보더라.”
“네? 대체 키우긴 뭘 키워요? 설마 제 몸 속에서 자라는 식물 같은 건 아니죠?”
“상상력은 좋지만, 식물은 아니지. 말 그대로 능력이 성장한다는 말이다.
그럼 시간이 다 되서 정말 가봐야 겠구나, 할애비 간다.”
그러니까 제가 알아듣게 설명 좀 해주시라구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제 정말 본인 할 말 다 하셨다는 듯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셨다.
그와 함께 미희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침대 위의 자신을 확인했다.
“뭐야, 역시 꿈 맞지? 하아.. 다행이다.."
말은 그렇게 뱉었지만, 뭔가 불안하다.
"꿈이면 가짜일텐데 너무 진짜 같이 생생했어. 아..왜 이렇게 찝찝하지..”
미희는 졸음에 감긴 눈을 꿈뻑거렸다.
꿈은 찝찝했으나, 몇 시간 후에 또 출근을 해야 했고,
무엇보다 미희는 지금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가 없어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아침부터였다.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향을 맡을 수 있게 된 것은.
진짜 후각적으로 맡아지는 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이 내뿜는 향이다.
대체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 영혼에도 향기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이 영혼의 향기라는 것은 사람마다 지문이 다른 것처럼, 미묘하게도 사람마다 모두 향이 달랐다.
그 사람만이 가진 또 하나의 아이덴티티랄까.
뭐, 그걸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 사람 뿐이어서 문제지만.
능력을 받은 다음날에는 아무런 경험치가 없어서, 사실 미희는 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잘 알지 못했다.
‘응? 오늘 향수를 뿌리고 온 사람들이 많네?’
이러다가,
‘요새는 별 희한한 향을 다 만드는 구나’
라는 멍청한 생각도 하다가, 세상 둔한 미희도 드디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으아, 냄새.. 오늘 지하철에 몇 일 안 씻은 사람이 있었나? 이 역한 냄새는 진짜 설명이 안 되는데..
근데 다들 왜 이렇게 평온하지? 이 냄새가 일반적일 리가 없는데?”
미희는 퇴근하고 나서 집에 들어와 밥 먹는 것도 잊고 곰곰이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나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사실은 혹시나, 싶었으나 이성이 계속 받아들이길 거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고.
그리고 그 사실을 결국 이성이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
미희는 저도 모르게 뭉크의 작품 ‘절규’에 등장하는 스크리머(Screamer) 처럼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더랬다.
“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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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입니다."
미희는 회사에 도착하여 저가 왔다는 인사를 날린 뒤, 외투를 벗으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지하철에서 그 악취 풍기는 영혼을 마주친 후로 몸이 절로 긴장되고 계속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연히 마주친 감미로운 남자의 향기가 그 악취를 조금이나마 정화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 그 남자. 그 남자 대체 누구일까? 그런 향기를 가진 사람은 여태껏 한번도 못 봤는데.
나도 이름이라도 물어 봤음 좋았을 걸’
미희는 오늘 아침 만났던 기묘한 인연을 떠올렸다.
미희가 마음 속으로 이미 ‘천상의 향기를 가진 남자’로 지명한 그는, 얼굴도 잘생겨서 길에서 만나면 다시 뒤돌아볼 정도의 미남자였다.
시간 상 불가능 했음을 알지만, 그래도 그의 이름을 물어 봤더라면, 아니 혹시 다른 장소에서 만났더라면, 하고 아쉬운 상상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