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하아...
달이 구름에 가려진 어두운 밤의 숲속, 오늘따라 새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적막 속에서 거칠고 불규칙한 숨소리만이 어둠에 녹아들 듯 퍼져나간다.
“우욱... 우웨엑!”
거기에 끼어드는 것처럼, 위 속의 내용물을 발작적으로 게워내는 소리가 뒤따랐다.
소리의 주인공은 아직 소년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20대 초반의 청년. 그는 지금 울창한 숲 한 가운데에서 무릎을 꿇고는 역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위를 비우고 있었다.
“크으...”
그리고 그는 문득 자신의 주위를 바라보았다.
나무와 흙바닥에 거칠게 흩뿌려져 바닥을 질척질척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히 피.
그리고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져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는 고깃덩어리들.
낮은 곳에서 자라던 나뭇가지에 치렁치렁 매달려 피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길다란 것들은 무엇인지, ‘그’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두운 밤이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아니면 내용물을 다 토해내서 조금이나마 정신이 맑아졌던 것일까. 그는 이 처참한 광경에도 졸도하지 않고 떨리는 눈동자로 이 참극을 직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 현실에서 도저히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마치 붉은 페인트에 담근 것처럼 붉게 물든 그의 손, 그리고 그 손가락 끝에 자라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금속질의 칼날 같은 긴 손톱.
그 것들이 끊임없이 현실을 일깨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처참한 광경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그리고 이 손에 묻은 피, 그리고 여기저기 널려있는 고깃조각들은 다름아닌 나와 같은...
그렇게 생각하자, 더 이상 토할 것도 없음에도 다시 격렬한 욕지기가 뱃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 청년.
그때, 그의 주의를 돌린 것은 어둠너머에서 들려온 한마디였다.
“괴로운 건가? 정재빈...”
“...”
약간 허스키한 감이 있지만 부드러운 미성의 남자 목소리는 피를 뒤집어 쓴 채 다시 구토하려던 청년, 정재빈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재빈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괴롭...냐고요?”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 그 것은 단순히 구토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신이 할 소리 입니까! 당신이... 나를 이런 곳에 밀어넣지만 않았으면...! 당신이 날... 이용하지만 않았으면!”
재빈의 목소리는 명백하게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이를 악문 채 어둠너머를 노려보는 재빈의 눈은 분노의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비유가 아니었다.
그 눈동자, 조금 전까지 짙은 갈색이었던 재빈의 눈동자가 붉게 빛나고 있던 것이다.
“감정을 가라앉혀라. 눈동자 색을 숨기는 법은 가르쳐 줬을텐데.”
“...”
그러나 어둠 속의 상대는 그 분노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심히 대답할 뿐이었다.
그 태도에 재빈의 속은 뒤집힐 것 같았지만 그는 말 없이 어둠 속에 묻혀 있을 상대를 가만히 노려볼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몸을 일으킬 힘이 없었던 것도 있다.
그러나, 저 자는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몸을 여기 널려 있는 고깃덩어리 중 하나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재빈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날 원망하시는 것 같은데... 원망의 상대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건가? 혹시 내가 만만하게 느껴진건가? 그렇다면 나도 꽤 유해진 모양이군.”
어둠속의 남자의 목소리에서 한줄기 냉기가 느껴진 재빈은 몸을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담담히, 하지만 냉혹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첫째, 여기 널려 있는 것들을 찢어발긴 것은 네놈이다.”
“...”
재빈이 흠칫 몸을 떨지만 남자는 끊임없이 그에게 현실을 들이민다.
“둘째, 여기 이놈들은 딱히 내가 보낸 것도 아니며, 오히려 나에게도 ‘적’인 놈들이다.”
“...”
바스락, 하고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셋째, 널 ‘뱀파이어’로 만든 것은 내가 아니다.”
“...”
재빈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널 ‘관리국’에 넣은 것, 네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 준 것, 네 적을 알려 준 것... 그건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너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일이었다.”
“...”
재빈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선 다시 한 번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이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재빈에겐 그 역시, 자신을 둘러싼 불합리한 세계의 일부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재빈에게 하루하루, ‘적’과 싸워야 하는 삶을 제시하고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저 남자였으니까.
“그럼에도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다시 한 번 친절을 베풀어 네가 처한 현실을 일깨워주는 수밖에.”
그 말과 함께 남자가 드디어 재빈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구라 하기엔 애매하지만 큰 키에 균형 잡힌 체격의 몸엔 코트, 셔츠, 바지까지 모조리 검은 색으로 통일한 옷차림.
말끔하게 빗어 넘긴, 달빛에 빛나는 흑발.
약간 창백한 피부의 얼굴엔 조각한 것 같은 선명한 이목구비.
날카로운 눈매 탓에 다소 차가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누구나 그가 상당한 미남이라는 것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지금 그 잘생긴 얼굴이 무색하게도 모든 표정을 지워버린 채, 엄숙한 목소리로 말한다.
“인간 시절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다시 평안한 삶을 찾고 싶다면...”
언젠가 재빈이 들었던 대사를, 그 남자는 다시 한 번 입에 담는다.
“그 삶에 끼어드는 것들, 네 목숨을 노리는 것들을 분쇄하면 된다.”
“...”
구태여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부정하고 싶어도, 재빈 역시 마음속에서 확실하게 느끼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너를 노리는 이, 네게 원한을 가진 놈, 이 세계의 균형을 부수려는 것들... 모두가 네 미래를 빼앗는 적이니...”
“...”
그리고 남자는, 드디어 그 무표정한 얼굴에 한조각의 미소를 띄운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히려 보는 이를 불안하고 두렵게 만들 만큼 뒤틀려 있는, 그런 미소였다.”
“...”
“그 마지막, 가장 깊은 곳에 처박혀 있는 자... 너를 이 세계로 끌어들인 자.”
어느새 그 남자의 눈동자 역시, 재빈의 것과 같은 붉은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밤의 왕을 죽여라.”
재빈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그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그 남자는, 웃고 있었다.
“죽여서 너의 미래를 지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