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빈은 정말로 평범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대학만 가면...하고 생각 했던 것도 이제 옛 말.
대학교 2학년 1학기를 얼마 전에 마친 지금 시점에선, 그의 머릿속엔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뿐, 청춘의 즐거움도, 밝은 미래도 머릿속에 없었다.
180이라는 크다면 큰 키, 그다지 못난 것은 아닌 얼굴. 그러나, 조금 음침한 분위기 탓에 그렇게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다.
또한,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서울 소재의 좋은 대학에 들어가긴 했으나, 그의 학구열은 입학과 동시에 소멸, 매 학기 학점을 유지하는 것에도 벅차하는 캠퍼스라이프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른 무언가에 열중하며 청춘을 즐기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축구 동아리에서 축구, 가끔 술, 높은 빈도의 PC방 방문이 전부.
성격 역시, 긍정적인 방향이건 부정적인 방향이건 전혀 튀지 않았다.
파렴치한 범죄 기사를 보며 분노할 때도 있지만, 싸움이라도 나면 휘말리지 않고 조용히 피해가는 것이 그의 철칙.
친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은 하지만, 일부러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은, 귀찮다는 이유로 눌러버렸다.
그렇다면, 재빈에겐 어떤 밝은 미래라도 펼쳐져있는가?
나름대로는 철저한 취업계획과 미래 계획을 세우긴 했으나 아직 군대도 가지 않은 상태에선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고, 뉴스와 선배들의 푸념에서 들려오는 대한민국의 취업상황은 재빈의 앞날에 짙은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
말이 길어졌지만, 요컨대, 재빈은 정말로 정말로 평범하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도 ‘아주 작은 변화’가 지금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래도 되냐...”
일요일 주말 아침. 재빈은 쏟아지는 여름 햇살을 받으며 걷던 도중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 그는 주말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귀가 중이었다.
아침임에도 뜨거운 여름의 햇살과, 철야의 피곤함이 겹쳐 지금 그의 머릿속은 혼탁하기 그지 없었다.
여기에,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심란함이 더해져 지금 재빈의 기분은 최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 나온 성적은 참으로 처참했다. 등록금을 쓰레기통에 처넣는 것과 별 다를 것 없을 정도로.
“...”
엎친데 덮친격으로 지금 그의 통장 잔고까지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 진짜 아침인데 X같이 덥네...”
재빈은 아무도 듣지 않는 욕설을 내뱉으며 계속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횡단보도 앞에 선 재빈은 핸드폰을 꺼내 카카X톡을 확인 했다.
‘쏘리 ㅠㅠ 나 그날 집내려감’
흠모하는 여자사람 친구에게 보낸 영화관람 제안에 대한 답변이었다. 밤새 일하며 거기에 무슨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가 분석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거절의 메시지다.
“...XX.”
재빈은 지금 이 순간 혹시 자신은 이 일대에서 가장 불행한 것이 아닐까, 하는 철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이나 자자...”
스트레스를 잠시 잊기 위해 재빈은 지금 빨리 자신의 침대에서 꿈나라로 떠나는 일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그때,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고 재빈은 지친 발걸음을 일부러 서둘렀다.
그것이 실수였다.
부우웅!
“...?!”
쏟아지는 졸음과 머릿속을 가득 채운 암울한 생각은 달려오는 트럭을 포착하는 것을 느리게 했다.
끼이이익!
콰아앙!
그리고 떠오르는 재빈의 몸.
그는 공중에 흩뿌려지는 자신의 핏방울들을 보며 생각한다.
자신은 정말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일 것이 분명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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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약 2개월이 지났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서울의 한 대형 병원. 그곳의 원무과에서 퇴원의 절차를 마무리한 재빈이 애써 활기찬 목소리로 직원을 향해 인사했다.
직원은 서비스용이라곤 해도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질 미소와 함께 마주 인사를 하고 축하의 한마디로 응대하였다.
2개월 전,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오던 길, 재빈은 졸음운전을 하던 트럭에 치이고 이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오늘, 의료진들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회복한 재빈은 기분좋게 퇴원하고 있었다.
‘...확실히 회복이 빠르시긴 합니다. 젊어서 그러신가? 하하...’
퇴원해도 좋다는 것을 알리며 의사가 그렇게 농담을 던졌었지만 재빈이 입었던 부상은 ‘젊음의 근성’ 따위로 이겨낼 만한 그런 부상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고, ‘사고 후 정신을 차리니 이세계’같은 어린 시절의 꿈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심각한 부상은 피할 수 없었다.
재빈은 복잡한 의학용어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즉사하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는 주위의 말과, 한번쯤은 들어봤을 뼈들이 모조리 박살이 난 것을 보여주는 부상 목록은 자신이 거의 으스러지다시피 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엔 충분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그가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의사의 말에 의하면 굉장히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방학을 모조리 날려먹고 퇴원 예상 시기를 잘못 계산해서 휴학해버렸고, 아르바이트는 잘렸다는 사실이 재빈의 마음 한켠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미 휴학생이라 퇴원해도 할 일이 없다는 것, 그리고 2학년 끝난 후 군 입대를 하려 했던 계획이 어그러진 것에 대해 남몰래 한탄하는 재빈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면제가 될 정도로 다쳤다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생각하던 재빈은 한숨을 쉬곤 고개를 저었다.
이미 꼬여버린 자신의 캠퍼스 라이프라던가 군 입대 일정이 재빈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긴 했지만, 그는 오늘 만큼은 그것을 잊기로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 드디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것만으로도 재빈은 기분이 좋았다.
집까지 걸어서 최단 거리로 가기 위해 병원의 뒷문으로 빠져 나온 그는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노래를 콧노래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남이 보면 굉장히 부끄러운 짓일지도 모르나 공교롭게도,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주위에 사람이 없었기에 그걸 보고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날씨 좋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런 말을 중얼거리던 재빈은 어느새 주위의 민가가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두 달 넘게 자리를 비웠던 자신의 자취방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기대감 탓일까?
재빈은 눈치채지 못했다.
이곳은 서울 신촌 인근, 아무리 번화가에서 벗어난 평일 낮 시간의 주택가라고 해도, 평소라면 학교 가는 학생들이나 아이를 학교에 보낸 주부들 한 둘쯤은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병원을 나와 지금까지 약 15분의 시간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껏 들떠 주변이 보이지 않던 재빈이 드디어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챈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
그리고 그는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을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
저 앞, 재빈으로부터 약 15m 정도 떨어진 거리.
빌라들이 늘어선 골목 길 한가운데엔 마치 재빈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서서 그를 빤히 바라보는 두 명의 서양인이 있었다.
비교적 거구인 한명은 붉은 색 아디다x 트레이닝복을 걸친 채 재빈 쪽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붉은 반삭발머리, 부리부리한 눈매... 정말 삥 뜯으려는 깡패가 아닐까 싶은 인상이었다.
그런 생각에 잠시 주춤한 재빈이었지만 곧 자신의 망상을 부정했다.
생각해보면 외국인이 굳이 삥을 뜯으려고 한국까지 올 리가 없다. 한국은 이탈리아산 마피아가 들끓던 20세기 초의 미국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한명은, 추리닝 차림의 남자와 철저히 대조되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말끔한 회색 슈트를 걸친 그는 옆의 남자와 키는 비슷하되 좀 더 말쑥하고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지고, 우아한 디자인의 안경을 쓰고 있던 그는 옆의 남자와의 대조 탓에 그리 보이는 건지, 너무나도 온화하고 부드러운 눈매로 재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비춰지는 부드럽고 차분한 눈빛과 마치 조각한 듯한 선명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청년.
그것이 재빈이 생각한 그 남자의 첫 인상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생각해보면, 서울 신촌 일대에 돌아다니는 외국인은 한 둘이 아니고 그 중에 인상 좀 나쁜 외국인이 없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지금 그런 사람들이 앞에 얼쩡거려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재빈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발걸음 속도를 올려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
그렇게,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던 두 외국인을 재빈이 지나치는 그 순간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재빈씨.”
동성의 목소리건만, 재빈은 소름끼칠 정도로 그 목소리가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하며, 달콤함마저 느껴지는 미성.
토종 한국인인 재빈보다 또박또박한 발음의 한국어.
재빈은 그것이 방금 지나친 남자들 쪽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정재빈씨, 맞죠?”
안경을 쓴 금발의 미청년 쪽이 조금 전 재빈에게 말을 걸었던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건네고 있었다.
“...맞는데, 누구세요? 절 아세요?”
“물론, 알고 말고요.”
한국말이 유창하며, 헐리우드 배우 뺨치게 생긴 외국인이 자신을 알고, 그런 자신이 퇴원하는 길을 어찌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재빈은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재빈의 목소리, 표정에선 한줄기 의구심이 스쳐지나갔다.
게다가 예전에 한번 외국인이 말을 걸어오며 종교를 권유했던 경험도 있던 그였던지라 그 마음속에선 조금씩 경계심이 생겨나고 있었다.
한편, 그런 재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금발의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엡실론. 기억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리고 자신을 엡실론이라 밝힌 남자는 한마디를 더 덧붙인다.
“물론, 지금 잠깐 대화를 나눌 기회를 주신다면 더욱 더 감사하겠지요.”
“무슨 대화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 재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니, 금발의 남자, ‘엡실론’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저만 소개를 했군요. 이쪽은...”
그때, 엡실론이 가르킨 붉은 까까머리 남자가 마치 으르렁거리는 듯한 거친 목소리로 그 말을 잘랐다.
“슈트라페.”
“...라고 합니다.”
말이 끊긴 것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것인지 엡실론은 생글생글 웃으며 그렇게 말을 마쳤다.
“아 네... 그런데, 저한테 무슨 볼일 있으신가요? 대화라니...”
당황하며 미심쩍어하는 기색을 전혀 숨기지 못하고 있는 재빈의 말이었지만 엡실론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더욱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네. 볼일이 있긴 있습니다. 바로 당신의 미래에 관한 것입니다만...”
“...”
그러자 재빈은 이제 대놓고 ‘당신을 못믿겠다.’라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는 언젠가 길거리에서 ‘인상이 좋아보이세요’ ‘얼굴에 불안이 느껴지시네요.’라고 들었던 경험을 떠올렸다. 심지어 재빈의 얼굴에 두 가지 모순된 평가를 한 포교꾼은 동일인물이었고.
안그래도 평소부터 ‘넌 만만해 보이는 얼굴이야’라고 듣기도 하고 이상할 정도로 거리에서 이상한 포교꾼들에게 자주 걸리던 그였기에 그의 예민함은 한층 더 강해지고 있었다.
한편, 점점 커지는 재빈의 의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엡실론은 여전히 웃으며 말을 잇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하긴 좀 그렇군요. 잠시 자리를 옮겨...”
“아 네. 필요 없습니다. 죄송한데 제가 지금 바빠서요. 그리고 저희 집은 제사 안 지냅니다. 수고요.”
그렇게 재빈 안에서 판단이 섰다. 이젠 ‘인상이 좋아보이세요’ 패거리가 외국인까지 고용하는 모양이다.
어쨌든, 더 이상 말을 섞지 않는게 좋다는 판단을 한 재빈이 다시 등을 돌려 발걸음을 서두르려 하던 그 순간이었다.
탁.
그때, 재빈의 뒤에서 솥뚜껑 같은 손이 재빈의 왼쪽 어깨에 얹혀졌다.
“?”
재빈이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것도 잠시, 그 손은 강렬한 힘으로 재빈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아아아악!”
마치 공업용 압축기에 짓눌리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악력이 재빈의 어깨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슈트라페는 재빈의 어깨를 붙잡고 그대로 움켜쥐어 버린 것만으로 재빈을 제압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엡실론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슈트라페님, 이분은 우리가 모셔가야 하는 손님이라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엡실론은 딱히 슈트라페를 말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리고 재빈의 어깨를 격렬히 쥐어짜면서도 태연한 표정인 슈트라페가 그 말을 받았다.
“그냥 데려가지. 뭐하러 이런 ‘새끼 뱀파이어’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나.”
“크으윽...!”
고통에 무릎까지 꿇은 채 신음하는 정재빈은 고통 속에서도 그 말에서 이상한 단어 하나가 섞여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는 지금, ‘척 봐도 외국인인 이들이 어째서 재빈을 앞에 두고 친절히 한국어로 말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은 신경쓰지 못하고 있다.
“크윽... 배, 뱀파이어?”
“아하, 역시 모르고 계셨군요.”
고통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재빈과 대조적으로 엡실론은 즐거운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당신은, 뱀파이어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