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것은 운명에서 비롯된다. 이 모든 스토리는, 만물의 주최하에 이루어지며 운명을 거스르는 자에게는 그에따른 벌을 받게 된다.]
"이게 뭐야? 운명이니 뭐라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어두운 흑발에 반짝이는 벽안을 지닌 소년-펠릭시아스-는 형이 던져주고 간 책의 한 구절을 읽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너가 이 책을 펼친 것도 운명이다.]
"무슨 호랑이가 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고 앉아있어. '운명', '운명'이라니. 그 놈의 운멸 타령 좀 작작하면 안될까?"
책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자, 책은 다시 스르륵-소리를 내며 빛을 뿜었다. 화사한 빛이 쏟아지자, 펠릭시아스는 밝은 빛 탓에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다. 어느새 책의 페이지는 다음 쪽으로 넘어가 있었고, 그걸 읽은 펠릭시아스는 '이 책은 불량품이야. 거짓말 투성이.'하며 불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에 대충 던져넣었다.
[넌 곧 운명을 거스를 수 밖에 없는 일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펠릭시아스가 다음 페이지를 읽어보지 못했단 것이다. 펠릭시아스가 보지 못했던 다음 페이지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넌 용사다. 싸워라. 운명으로 시작하여 운명으로 끝날지어니.]
그 책은 용사를 찾아내는 책, 운명의 책인 '데스티넬'아었다. 그 책은 세계의 모든 운명을 책임지고 있다.
잘 짜여진 스토리, 멋진 대본, 그리고 배역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중에서 주인공.
이 모든 것을 담은 책이 데스티넬. 그리고 이 책의 그 주인공이, 아니 남 주인공이 데스티넬의 대본과는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용사라니. 개소리를 해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나 참, 세상 살기 힘들다. 이젠 책까지 나를 고생시키네…"
남 주인공은 끝까지 투덜거렸다. 펠릭시아스는 불만이 많았다. 아주 많았다.
***
"아가씨~ 일어나세요! 기침 시간이에요. 어서, 일어나세요! 오늘은 아가씨의 사교계 데뷔 첫날이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대공작가인데….13살에 데뷔하시는 건 늦는 거라구요!"
유모가 커튼을 젖히자, 창문 틈 사이로 밝은 햇살이 쏟아져나왔다. 그 햇살은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라에르니셸에게 다가가 그녀를 방해하고 결국엔 두 눈을 뜨게 만들었다.
"유모 이모, 나 귀찮은데 안 하면 안 돼요? 그냥 집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조용히 살고…."
"그러면 절대로 안 되는 거 아시죠? 얼른 일어나세요. 꾸미기 하려면 시간이 별로 없어요. 음…화장은 연하게 해야 겠네요. 피부 색이 창백해서 파우더나 크림은 진하게 바르지 않은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입술도 색깔이 붉어서 이쁘네요. 이러다가 전세계 남성 분들에게 다 약혼 신청 들어오시는 거 아니에요?"
"유모…서론이 너무 길었어. 미안, 귀찮아서 못 들었어. 다시 말해줄래? 물론 본론만."
라에르니셸이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바로 흘려보내자, 유모는 살짝 삐친 기색의 표정을 보였지만, 금방 풀고 시녀들을 데려와 라에르니셸을 거울 앞에 세웠다.
"이제 꾸밀 시간이에요. 이번 황궁 대연회장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 공녀님이셔야 해요, 아셨죠?"
그 말을 들을 리가 없는 라에르니셸은 대충 '응'이라고 대답하고 시녀의 손길을 따라 이리 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아침부터 이게 뭐야, 귀찮게.'
너희 둘이 만나는 것도 운명일 거야.
거스르는 소년과 숨기는 소녀, 그 둘을 둘러싼 판타지 세계의 신기한 이야기.
[운명을 정하는 건 누구일까?]
그 책의 이름은, 데스티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