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한바탕 소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한 작은 건물. 말에서 내리라는 나무 표지판을 발견하곤 말에서 내려 건물로 걸어간다.
“드디어 검문소에 왔구나. 간단한 짐 검사만 받고 통과하는 곳이니 겁먹을 필요 없다.”
어릴 적, 딱 한 번 가족 여행으로 검문소를 통과 해 본 후로 처음. 남에게 검사를 받는다는 사실에 괜히 긴장된다. 건물에 다다르자 진초록색의 코트와 와인색 챙 없는 베레모가 멋지게 어우러진 제복의 체르니 아나키 방위군들과, 전신을 짙은 회색의 말끔한 제복을 입은 게를락 아나키 방위군들이 무장을 한 채로 나란히 서있다. 왼쪽에 있는 건물은 체르니 방위군, 오른쪽은 게를락 방위군 검문소. 우리는 체르니 방위군에게 눈인사를 건네면서 오른쪽의 게를락 검문소로 걸어 들어간다.
“안녕하십니까. 게를락 아나키에 무슨 용무로 가십니까?”
아버지는 여행 중이라고 말했고, 그들은 간단한 짐 검사와 몸수색을 한다. 내 몸수색을 하려던 게를락 방위군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괘.. 괜찮니? 혹시 오는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 어린 친구 옷이 찢겨지고 피로 얼룩져있군요. 어이! 가서 빨리 치유사를 불러와!”
피에 흠뻑 젖어 갈기갈기 찢어져있는 내 옷을 보고 많이 놀란 듯.
‘하긴 꽤 안전한 여행길에서 이정도 부상이면 심각한 편이긴 하지.. 게다가 딱 봐도 단순 무식한 검사로 보이는 아버지와 어린 나밖에 없으니 치유사도 없다고 생각하겠군..’
방위군이 진짜 치유사를 부르기 전에 나는 찢어진 팔다리의 옷을 힘차게 걷어 올린다.
“치유사 필요 없어요! 전 괜찮아요. 이것 보세요. 제 상처는 이미 다 아물었죠? 헤헤. 아까 굶주린 늑대 무리가 공격을 해 와서 조금 다친 거예요. 근데 이제 멀쩡해요.”
“아.. 아? 그.. 그래? 이 정도로 피를 흘렸는데 어떻게 상처가? 혹시 이 분이 치유사... 험.. 험.. 뭐 어쨌든 다행이구나. 그럼 다시 검사를 할게.”
방위군은 아버지와 나를 궁금한 눈빛으로 다시 한 번 쳐다본다. 분명 속으론 ‘어떻게 방금 입은 것 같은 상처가 치유사 없이 이렇게 말끔히 치료되었는지’ 꽤 궁금해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 서방 아나키 연합에선 남의 사소한 개인사나 능력을 묻는 것은 굉장한 실례. 그래서 방위군도 굳이 묻지는 않았다.
‘킥. 이건 헬릭도 못 쓰는 내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능력 때문이랍니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나온 검문소. 그 옆에는 큼지막한 나무 표지판에 ‘게를락 아나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다른 아나키로 여행 와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나는 괜스레 눈을 감고 크게 공기를 마셔본다.
“흠~하~~ 아버지 게를락의 공기가 더 상쾌한데요?”
“카렐... 혹시 늑대들한테서 머리를 다친 거 아니냐? 바로 몇 걸음 뒤가 체르니야.”
하여간 나의 실없는 농담을 쉽사리 받아주지 않는 아버지이다.
“늑대 때문에 시간이 좀 지체되었으니, 최대한 빨리 달리다가 해가 질 때 쯤 보이는 마을에 가서 잠만 자고 또 출발하자꾸나. 다행히 이곳부턴 완전한 안전지대니깐 걱정 말거라.”
그렇게 우린 검문소를 지나 한참을 정신없이 달렸고, 노을이 질 때 쯤 되어서 보이는 마을에서 여관을 찾아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에도 새로운 아나키에 도착했다는 설렘을 느낄 새도 없이 데겐하르트 시로 가는 마지막 여행을 준비한다.
“자 카렐. 오늘 오후까지 데겐하르트로 가는 마지막 여정이다. 지금 몸이 많이 힘들겠지만, 신나게 달려서 도시에 들어선 다음에 실컷 여독을 풀자꾸나. 거긴 우리 브로드 시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도시니깐 볼 것도 많단다. 자! 이제 출발해 볼까? 이럇!”
얼마나 달렸을까? 지루한 여행의 끝을 알리는 그 것. 바로 ‘데겐하르트 시’ 라고 고급스러운 나무와 금속 장식으로 멋들어지게 만든 표지판! 우리의 목적지인 데겐하르트 시에 드디어 진입한 것이다! 아직 외곽 지역임에도 대도시답게 사람 한 명 보기 힘들었던 이번 여정에서 가장 많은 인파를 만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데겐하르트의 중심지로 이동하는 중. 여행객, 모험가, 방위군, 물건들을 마차에 한가득 실은 상인들까지. 우리 마을에선 보기 힘든 다양한 사람들이 데겐하르트 시를 오가고 있다. 저 먼발치에 거대한 성곽과 그 안에 솟아있는 수많은 건물들이 눈에 또렷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20여분정도 더 걸어가서야 결국 다다른 성문 앞. 고개를 치켜 올려야 겨우 그 끝이 보일 정도로 성곽이 드높다. 아버지 말로는 서방 아나키 연합을 지켜주는 장벽은 이보다 훨씬 높다고 하니 나로썬 도저히 그 크기가 가늠이 되질 않는다. 활짝 열린 성문 양옆에는 짙은 회색의 망토를 두른 방위군들이 굳건하게 성문을 지키고 서있다. 그들의 흐트러짐 없는 절제된 움직임이 대도시 방위군의 위용을 보여준다. 성문부터 시작되는 이 거대한 대로는 여태껏 보지 못한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다.
“와!!! 아버지!! 데겐하르트가 이렇게나 큰 도시였어요???”
“야야! 거 촌놈같이 너무 두리번거리지 마라. 쪽팔린다.”
데겐하르트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생각보다 화려하진 않다.’이다. 작지만 붉은 지붕과 알록달록한 색이 어우러져 소박하면서도 앙증맞은 우리 마을 풍경과는 달리, 건물들의 색이 대체로 어둡고 장식이 간소화 되어있어 칙칙해 보였기 때문. 그럼에도 절제와 통일감이 주는 정돈된 풍경이 꽤나 멋스럽게 느껴진다. 아마도 겉치레보단 실용성을 추구하는 게를락 아나키 사람들의 특성이 그들의 미적 감각에도 반영이 된 듯.
“하여간 여긴 올 때마다 칙칙하다니깐. 내가 돌아본 아나키나 국가 중 게를락이 제일 밋밋해.”
아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인가보다. 그래도 나는 체르니 아나키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에 이국적인 풍취를 한껏 음미하고 있다. 큰 대로를 따라 죽 걷다보니 엄청나게 많은 무기 방어구 상점들이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있다. 역시 서부 아나키 연합 최강의 기술력을 가진 게를락 아나키답다. 우리 마을의 얀 아저씨 상점 같이 뭔가 정감 가는 공방의 느낌이 아닌, 잘 정돈된 상점 같은 모양새이다. 붐비는 대로변 끝에는 넓은 강이 우리를 반긴다. 갖가지 꽃으로 알록달록한 체르니의 강변과는 달리, 정박해 있는 거대한 배와 그 위에서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만 보여서 다소 삭막해 보이긴 한다. 역시 산업 도시다운 실용적인 풍경. 우리는 형이 우릴 위해 예약해 놓은, 이름부터 밋밋한 ‘강이 보이는 여관’을 찾아간다. 꽤 큰 규모의 여관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넓은 로비와 식당이 눈앞에 펼쳐진다. 나와 아버지는 깨끗하게 이불에 각이 잡혀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곧바로 씻고는 침대 위에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린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몽롱한 상태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온다.
‘꿈인가? 근데 왜 목소리가 낯이 익지?’
나는 눈은 감고 있지만 낯익은 목소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본다.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며 잠이 완전히 달아난다.
“형!!!”
나는 눈을 뜨자마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의자에 앉아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형 알로이스에게 뛰어가 안긴다.
“오랜만이네 카렐. 늑대한테 물린 곳은 괜찮니?”
아무리 차분하고 재미없는 형이어도 오랜만에 보니 너무 반가워 가슴이 울컥하다.
“응. 알잖아 난 상처가 금방 아무는 거. 이거 봐봐. 말끔하지?”
“그래 참 부러운 능력이구나. 배고프지? 내가 데겐하르트에서 제일 맛있는 레스토랑으로 데려갈게. 준비하고 나가자.”
오랜만에 뭉친 세 가족이 모처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여관 밖으로 나온다. ‘꽤나 늦은 시간인데 아직도 영업하는 식당이 있을까?’라는 나의 의문은, 도로들을 따라 죽 늘어선 가로등을 보고는 말끔히 사라져 버린다.
“와!! 데겐하르트는 밤에도 이렇게 밝아? 정말 아름답다!”
보통 작은 마을들은 저녁 늦게까지 여는 술집이나 여관 앞, 혹은 중심가에만 가로등이 있다. 그래서 밤에는 외출을 잘 하질 않고, 혹여나 밖으로 나오더라도 라이트를 생성하거나 횃불을 들고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데겐하르트는 이 시간에 작은 골목까지도 가로등이 환하게 빛을 비추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 사람들도 이런 늦은 밤에도 많이 나와 데이트를 하거나 야경을 즐기고 있다. 나는 촌놈인 것을 최대한 티내고 싶진 않았지만 이미 내 몸은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가로등을 만져보면서 야경의 아름다움에 젖어들어 있다. 형은 좁은 골목에 위치한 식당으로 우릴 안내한다. 작은 식당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있다. 우리는 옆 사람의 목소리가 전부 들릴 정도로 좁은 테이블에 겨우 끼여 앉는다. 주변의 소음 때문에 아버지와 형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늦은 저녁에 시끌시끌한 생동감이 느껴지는 식당에 와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인지, 북적북적한 밤 문화의 흥취가 느껴진다. 몸집이 큰 여자 종업원이 북적이는 테이블사이를 꽤나 날렵하게 요리조리 피해 와서 주문을 받는다. 생소한 메뉴들에 쩔쩔매는 나를 대신해서 형이 ‘슈바인학센’이란 걸 주문한다. 형이 주문한 음식은 게를락 아나키의 대표 음식. 형은 부연설명 없이 그저 돼지 앞발요리라고만 답한다.
‘뭐? 슈바인... 뭐? 그게 돼지의 발이라고? 그게 먹을 수 있는 부위였던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던 나는 괜한 걱정을 했단 것을 곧 깨닫는다. 겉의 껍질은 바삭하고 그 속의 살코기는 부드러워 씹는 재미를 준다. 게다가 얇게 썬 부드러운 감자와 시큼하게 발효된 양배추가 입 속에서 어우러지면서, 나의 미각, 후각, 통각, 심지어 청각까지 모든 감각의 하모니를 느끼게 해 준다. 아버지와 형은 주변이 시끄러운 상황임에도 맥주의 취기를 빌어 큰 소리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는 전혀 무관심. 그저 온 신경을 집중하여 눈앞의 돼지 앞발 요리를 뇌 속에 각인시킬 뿐. 한참을 형과 떠들던 아버지는 너무 큰소리로 대화해서 목이 아팠는지 나가자는 수신호를 했고, 우리는 그곳을 빠져나온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한 야외로 나와서인지, 나의 청각이 일순간 멍멍해진다. 조금의 적응 시간을 가진 후에야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다. 나는 앞으로 돼지를 보면 앞발만 쳐다보면서 침을 꿀꺽 삼킬 것이라는 실없는 상상을 한다. 우리는 강변 근처에 2차 장소인 조용한 선술집에 들어간다. 성인인 아버지와 형은 맥주로 목을 축이지만 나는 아쉽게도? 달달한 크림 생강 에일을 홀짝인다. 아버지가 맥주잔을 테이블에 놓으며 말을 꺼낸다.
“카렐. 면접이 내일 모레 오전이지? 그럼 내일은 형이랑 데겐하르트 시 좀 구경하고 모레 같이 학교로 가라. 나는 이곳에 숨어있는 어떤 스파이에 대해서 조사 좀 할 게 있다. 그러니깐 나중에 집에 갈 때 온다.”
“엥?? 귀여운 막내아들이 난생 처음 면접 보는데 기다려주지는 못할망정 일하러 간다고요? 아버지 혹시 내 면접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데겐하르트에 볼일이 있어서 온 거였어요?”
“아니... 뭐... 겸사겸사.. 흥! 그깟 면접 따위가 뭔 대수냐? 그리고 어차피 그 학교 스타인 알로이스가 네 옆에 있는데 뭐 어때?”
“아버지...”
잠시 잊고 있던 면접의 공포가 다시 나를 뒤덮는다.
“형. 형은 나 면접 볼 때 기다려줄 거지?”
“그래. 스케줄은 비워놨어. 같이 있어줄게. 하지만 면접에 관한 도움은 별로 줄 게 없단다.”
그래도 다행이다. 애초에 면접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바랄수도 없는 오직 나만의 싸움. 하지만 면접장에 들어갈 때와 끝날 때 나를 기다려 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 지독한 공포로부터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것 같다. 우리는 저녁이 더 깊어지기 전에 여관으로 돌아온다. 오늘밤은 모처럼 온가족이 모여 함께 잠을 잘 수 있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집에 없는 날이 더 많고, 형도 올해 마지막 대학교과정을 마치면 본격적인 모험을 떠날 텐데. 어쩌면 오늘밤이 마지막이 될 삼부자의 동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서글픈 기분으로 잠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