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큐는 오리엔테이션 동안 벌써 많은 친구를 사귀었나보다. 모두가 건물을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세 명 정도의 친구들을 불러 나에게 소개시켜준다. 알로이스의 동생이란 말과 함께. 그 친구들도 갑자기 나를 존경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벵큐의 이런 행동들이 이제는 조금씩 부담스러워진다. 어쨌든 벵큐 덕분?에 우리는 오리엔테이션부터 이미 한 무리의 그룹이 되어 북적이는 인파속에서도 다른 학생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뭔가 낯간지러운데..’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아 분수대 앞으로 거의 뛰다시피 걸어간다. 다행히도 형이 이미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하인츠가 형에게 인사를 하자, 우리 뒤를 바짝 쫓아 왔던 벵큐 그룹?이 모두 입을 크게 벌리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카렐. 뒤에는 네 친구들이니?”
“응. 뭐... 얘들아 인사해. 우리 형 알로이스야.”
그 그룹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뭔가 엄청 영광스럽다는 목소리로 형에게 인사를 한다.
“아...아.. 안녕하세요. 저는 카렐과 같은 기숙사 방을 쓰게 되는 벵큐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아.. 알로이스 선배님..”
“네. 반가워요. 우리 카렐 잘 부탁해요.”
“네네넷!! 걱정 마십쇼. 제가 잘 모시겠... 아니.. 보필하겠.. 아니 친하게 지내겠습니다.”
내가 무슨 조직의 우두머리라도 된 느낌이다. 그래도 벵큐 덕분에 친구 사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빨리 이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한시 빨리 벗어나고 싶다.
“벵큐. 우리는 이제 형이랑 어딜 가야해서 먼저 갈게. 입학식 때 보자.”
하지만 눈치라곤 밥 말아먹은 답답한 우리 형은 ‘우리가 어딜 가기로 약속했니?’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한다. 나는 이 답답한 곰탱이 형의 팔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간다.
“그... 그래. 입학식 때 보자. 카렐! 안녕히 가십쇼. 알로이스 선배님!”
벵큐와 그 그룹은 마치 조직의 부하들이 두목에게 인사하듯 우렁차게 외쳤다. 그리고선 그 자세로 우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후- 이제야 살겠네. 벵큐는 좋은 친구인 것 같긴 한데, 너~무 부담스러워...”
“후- 나도 그랬어. 근데 벵큐는 나한테는 하나도 관심 없고 오직 너하고만 이야기 하던 걸?”
하인츠는 벵큐에게 조금 섭섭했던 모양이다.
“망할.. 형 인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부담스러웠는지 알아? 미안해 하인츠..”
형은 또 말없이 빙긋 미소만 짓는다.
“아냐 괜찮아. 난 원래 초중학교 때부터 친구가 거의 없었어. 뭐 네 덕분에 입학 전부터 벌써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어서 좋아 난.”
형 때문에 몇몇 친구들을 쉽게 만나게 되었지만, 나는 오히려 형을 전혀 몰랐던 하인츠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갑자기 형이 불쑥 말을 꺼낸다.
“그런데 카렐. 우리가 어디를 가기로 약속했었니?”
“으이그!! 이 둔탱아!!”
장담컨대 형은 친구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니 없어야만 한다. 분위기를 읽는 눈치가 심각한 질병 수준으로 없는, 이 답답이.
***
입학식 전까지 이틀 동안 형과 하인츠와 계속 함께 지냈다. 우리는 동아리 소개 책자를 읽으며 어떤 곳에 가입할지 토론해왔다. 학교생활의 절반을 차지할 동아리를 고르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했기 때문.
형은 ‘각종 무기술과 헬릭 전투’, ‘독서 토론회’, 그리고 ‘그대는 모험가가 될 준비가 되어있는가?’에 가입되어 활동하고 있단다. 하인츠는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리스트를 뽑았다. ‘고대 기술 학회’, ‘역사 토론’, 그리고 ‘그대는 모험가가 될 준비가 되어있는가?’. 참 관심 분야가 명확한 친구이다.
정작 문제는 나. 나는 흥미가 가는 몇 개를 추려보았다. ‘위험 동물 및 몬스터 연구회’, ‘실전 변신술’, ‘치유술사를 꿈꾸는 사람들: 영혼술 취급 자격증 스터디’, ‘테이머 지망생 모임’, 그리고 형과 하인츠와 같은 ‘그대는 모험가가 될 준비가 되어있는가?’. 평균적으로 학생들은 두 개의 동아리에 가입한단다. 세 개부터는 공부에 지장이 갈 수 있을 수 있기 때문. 하지만 난 포켓을 만들기 전까지는 어차피 실기수업을 할 수도 없고 시험을 볼 수도 없다. 즉, 이론 시험만 공부하면 되니까 남들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것 같다.
‘이 중 세 개를 선택해야 하는데.. 나도 모험을 하고 싶으니깐 모험가 동아리는 들고.. 흠... 골 아프네.. 나처럼 취미나 관심분야가 없는 게 더 골치가 아프군.’
어차피 입학 후에 천천히 가입해도 상관없으니, 일단 나머지 두 개는 보류시켜 놓았다. 우선 이 머리 아픈 동아리 선택은 접어두고, 입학 전 마지막 주말을 실컷 즐긴다.
‘자 이젠 진짜 그룬돌프 생활 시작!’
***
입학식 당일, 주변이 시끌벅적 시장 통이다. 학교의 입구부터 선배들이 주욱 늘어서서 동아리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기 때문. 어째 시장의 상인들보다 훨씬 더 신경전이 강하다.
“강인한 체력이 곧 헬릭의 힘! 우리 헬릭 축구 부에 가입해서 재미있게 기초 체력을 다집시다!! 여자 신입생 대 환영! 다이어트에도 좋은 헬릭 축구부!!”
“신 장벽 건설로 방위군의 수요와 대우가 높아졌습니다! 방위군을 꿈꾸는 분들은 우리 동아리로 와서 함께 준비합시다! 우리 동아리 출신 방위군 선배들에게 받는 일대일 멘토링!!”
“음악과 헬릭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모두 아시죠? 취미로 해도 좋은 음악! 모험에 강하면서도 운치를 더해주는 음유시인을 꿈꾸는 자! 모두 환영해요!”
나와 하인츠는 이곳저곳에서 선배들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하지만 우리는 꽤나 심지 굳은 아이들. 절대로 분위기에 휩쓸려서, 무섭게 생긴 선배에게 쫄아서, 혹은 예쁜 선배에게 홀려서 아무 곳에나 가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신입생들은 이미 그들의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가입해 버린 듯. 우리는 서둘러 그 곳을 벗어난다.
혼을 쏙 빼놓는 동아리 시장?을 벗어나, 가져온 짐들을 기숙사에 대강 풀어 놓는다. 곧바로 입학식이 있는 대강당으로 서둘러 간다. 이번엔 대강강에 신입생뿐만 아니라 2학년 3학년 선배들까지 모두 집결해있다. 온 천지가 회색으로 물들어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거기에 학년별로 다른 색 스카프가 포인트가 되어 멋을 더해준다. 대강당 입구에서 나눠준 얇은 책자에는 학교의 상세 지도와 반배치 결과 종이가 있었다. 나와 하인츠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확인한다.
“흠.. 카렐, 카렐, 카렐.. 여깄다!! 난 3반이야! 넌?”
“어.. 어.. 어.. 우왓!! 나도 3반이야!!!”
“진짜? 오 예!!! 운 좋게도 너랑 같은 반이네? 키킥. 잘 됐다! 우리 둘을 그냥 세트로 묶어 놓는 건가? 기숙사부터 반까지 계속 붙어있네?”
“그러네. 흠.. 아무렴 어때? 우리야 땡큐지. 헤헷.”
한껏 좋아진 기분으로 우리는 6반까지 있는 1학년 좌석에서 3반을 찾아간다. 같은 반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빈자리에 앉는다. 앉자마자 뒤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카렐!! 우린 역시 인연인가 봐!! 같은 반이네!”
벵큐였다. 그 옆에는 ‘알로이스 바라기’ 그룹에 있었던 다른 두 명의 얼굴도 보인다. 내 관심사는 시커먼 사내놈들이 아니었다. 벵큐가 흥분하여 뭐라 뭐라 떠드는 말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주변을 빠르게 스캔한다. 같은 반이된 여학생들을. 확실히 최상위 학교답게 공부를 잘 하게 생긴 친구들이 많다. 여학생들도 공부만 하게 생긴 모범생 스타일, 찔러도 피도 안 나올 것 같이 차가워 보이는 스타일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걔 중엔 몇몇 예쁘거나 귀여운 친구도 보인다.
‘오! 그래도 학교생활 할 맛나겠는 걸?’
나는 여학생들을 티 나게 두리번거리며 관찰하는 다른 남학생들과는 달라 보이기 위해, 괜히 점잖은 척 낮은 목소리로 하인츠와 담소를 나눈다. 웃을 때도 평소의 천박한 소리를 내지 않고선 최대한 미소만 지으며 가볍게 웃는다. 하인츠는 ‘너 지금 뭐하냐?’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지만 나는 무시해 버린다. 뒤쪽에서는 벵큐가 주변의 친구들을 벌써 휘어잡고 있다.
‘참 대단한 친화력이야.’
그는 내가 알로이스의 동생이란 것을 여러 친구들에게 떠들고 있는 중이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에 머리 뒤가 따갑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아야지..’
“아! 아! 잘 들리시죠? 그룬돌프 고등대학교 고등부 신입생 여러분! 곧 입학식을 시작할게요~ 모두 정숙해 주세요~ 홍홍홍.”
역시나 이번에도 진행을 맡은 델라 선생님. 오리엔테이션 때와는 달리, 단상위에 모든 교사들이 올라와 앉아있다. 그중에는 면접동안 계속 나를 공격했던 깐깐해 보이는 오딜리아 선생님도 돌덩이를 씹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저게 그녀의 평상시 표정인가보다.
“지금부터 324회 그룬돌프 고등대학교 고등부 입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고등부 ‘헬무트 (Helmutt)’ 교장 선생님의 환영 인사가 있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뜨거운 박수로 맞아주세요!”
짝짝짝!
전교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친다. 단상위에 앉아 있던 굉장히 강한 인상의 백발이 만연한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짧은 흰머리 사이로 거뭇거뭇한 머리카락이 섞여있어서, 그룬돌프의 교복과 같은 잿빛을 띄고 있다. 많아 보이는 나이에도 활활 타오르는 눈빛과 흐트러짐 하나 없는 절도 있는 움직임이다. 마치 산전수전 다 겪어본 엘리트 방위군 같은 이미지. 헬무트 교장 선생님이 절제 된 동작으로 양팔을 들어 올린다.
“....”
신기하게도 무슨 마법을 쓴 것 마냥, 일순간 박수소리가 멈추고 쥐죽은 듯 고요해진다. 외모부터 움직임 하나하나 대단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사람이다.
“안녕하십니까. 그룬돌프 신입생 및 재학생 여러분. 저는 고등부 교장 헬무트입니다.
124기 그룬돌프 신입생들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번 신입생들도 자랑스러운 그룬돌프의 전통을 잇는 훌륭한 인재들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모두들 의아한 듯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 마지막으로 그룬돌프의 구호를 외치고 입학식을 마치겠습니다. 모두 따라해 주십시오!”
‘엥? 벌써 마지막이라고? 입학식이 원래 이렇게 짧은 건가? 저 교장선생이 멋있는 건가?’
헬무트 교장은 소리 촉진을 강하게 불어넣으며 우렁차게 외친다.
“조화로운 그룬돌프를 위하여!!!“
“조화로운 그룬돌프를 위하여!!! 와!!!”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교장선생님의 짧고 굵은 훈화였다. 마치 몬스터를 토벌하러 가기 전에 방위군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방위군 대장이 강렬하게 구호를 외치는 것 같다. 그가 강렬하게 그룬돌프의 구호를 외치자, 강당 내 모든 이들이 가슴위에 주먹을 말아 쥐고서 재창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진다. 다른 이들도 나와 비슷한 뜨거움을 느꼈는지, 구호후에 뜨거운 박수와 우레와 같은 함성을 계속해서 내지른다.
‘참 멋있는 사람이야. 나도 나이 먹으면 저렇게 되고 싶군.’
델라는 학생들의 열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말을 이어나간다.
“짧지만 강렬했던 교장선생님 훈화였죠? 홍홍홍. 자! 이제 모두들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착석해 주세요~ 곧이어 새 학년 새 학기 담임 선생님 발표가 있겠습니다. 3학년 2학년 1학년 순서로 발표를 시작할게요~ 우선 3학년 1반을 1년 동안 맡아주실 ...... 선생님!“
”와!!!“
각 반의 담임선생이 한 명, 한 명 호명 될 때마다 그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다. 그 반에 속한 학생들은 환호를 지르거나 혹은 그저 박수만 친다. 내가 환호를 받지 못하고 박수만 받는 선생이라면 굉장히 무안할 것 같았다.
드디어 1학년 발표 시작.
“그러면 우리 신입생 1학년 담임 선생님을 발표할게요~ 1학년 1반을 맡을 선생님은.... 바로 저 델라예요. 홍홍홍. 우리 반 학생들 반가워요~”
“우와!!!!!”
1반 신입생들이 기쁨의 환호를 보낸다. 누가 봐도 사람 좋아 보이는 델라 선생님이 담임이 되었기 때문.
‘아.... 아쉽다.. 우리 반은 아니군. 그럼 남아있는 선생들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은 오딜리아 밖에 없는데. 설마 우리 반 담임은 아니겠지?’
“자! 그럼 2반 담임 선생님은.... ... 선생님!”
“와!”
신입생들은 선생님들을 잘 모르기에 모두들 열렬히 환호해준다.
드디어 3반 차례. 과연 3반 선생님은 누구일까? 심장이 두근거린다.
‘설마 오딜리아를 외치지는 않겠...’
“자! 다음 3반 담임 선생님은 바로... 오. 딜. 리. 아. 선생님!”
‘아아아아악!!’
역시 나의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우리 반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환호한다. 뭔가 짜증난 표정을 한 오딜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만 까딱이곤 제자리에 앉는다. 아! 왠지 앞으로의 학교생활에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기분이다.
담임 선생님 발표 후에는 아무것도 집중하지 못하고 입학식이 끝나버렸다. 어느새 2, 3학년 선배들은 수업을 위해 나갔고, 우리는 오딜리아 선생님의 인솔 하에 우리 반 교실로 간다. 같은 반 친구들은 담임의 화난 것 같은 표정을 보고는 겁을 먹고선 그저 따라갈 뿐이다.
“안녕하세요. 3반 담임을 맡은 오딜리아예요.
저는 공통과목으론 ‘3대 기본특성: 실기’를 가르치고, 선택과목으론 ‘치유학의 기본’을 가르쳐요. 그리고 동아리 ‘치유술사를 꿈꾸는 사람들’의 담당 교사입니다. 공통과목으로는 여기 모든 사람들과 수업시간에 만날 거예요. ‘치유학의 기본’을 선택한 학생들은 저와 더 많이 보겠네요. 아마 치유술사가 되길 희망하는 사람들은 선택과목 혹은 동아리에서 자주 보게 될 거예요.
우리 그룬돌프는 초중학교에서 최상위권 학생들이 모인 곳이니까 죽을 각오로 공부해야 할 거예요. 우리 반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여러분들 중에서 많은 치유술사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네요. 일단 자리는 앉고 싶은 곳에 앉고 추후에 제비뽑기로 배치할게요. 우선 출석을 부르겠습니다.”
‘일단 치유술사 동아리는 탈락...’
담임 선생님 때문에 나의 동아리는 물론, 막연하게 상상해봤던 치유사라는 꿈까지 바뀌어 버릴 것 같다.
‘뭐 어차피 제일 뛰어난 학생들이나 될까 말까한 직업이니깐 나랑은 맞지 않았어.’라고 나 스스로 자위해 본다. 훌륭한 치유사인 엄마에게는 괜스레 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