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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년 컴플렉스
작가 : 가로수
작품등록일 : 2018.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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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호, 안 줄 겁니까?
작성일 : 18-09-12     조회 : 280     추천 : 0     분량 : 8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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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쁜 년이다.

 

 ᨜᨜대학교 대나무숲

 #44283번째 제보

 정말 살다 살다 제가 이런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24살 여자입니다. 저에겐 6년을 사귄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고2 9월에 남자친구가 고백한 것을 제가 받아주면서 사귀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남자친구가 더 좋아해서 사귀기 시작했지만 만날수록 사람이 괜찮더라고요.

 어느 순간 저도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하게 됐습니다.

 서로 다른 대학교를 붙어서 서로 거리가 조금 멀어지긴 했지만, 저흰 계속 알콩달콩하게 사귀었습니다.

 다들 장거리 연애는 힘들다고 말했지만 한 번은 제가 가고, 또 한 번은 남자친구가 오고 하면서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이 장거리 연애도 잘 극복했습니다.

 심지어 남자친구가 군대에 가야 했을 때도 기다렸습니다.

 매일 편지 써서 보내고 필요한 물건과 간식도 챙겨 보내고. 남자친구에게 정말 잘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남자친구에게 잘하는 만큼 남자친구도 제게 참 잘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알바비를 모아서 제게 선물을 해주질 않나, 휴가 때마다 멀리 둘이서 놀러 가고 그랬어요.

 그 신기 어렵다는 꽃신. 저는 신었습니다.^^

 저희를 아는 주변 사람들 모두가 너흰 꼭 결혼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아주 어이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졸업해서 취직한 상태라 남자친구랑 어제 정말 오랜만에 데이트했어요.

 그런데 왠지 남자친구 얼굴이 수척해 보이더라고요.

 무슨 일 있냐고 물으니 바보같이 착한 제 남자친구가 괜찮다고 말하다가 겨우 제게 토로했습니다.

 과 내에 제 남자친구에게 들이댄 여자 후배가 있었답니다.

 여기까지야 뭐 그럴 수 있죠.

 남자친구가 객관적으로도 잘생기고 괜찮은 사람이니 반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남자친구가 정중하게 그 후배의 고백을 거절했고, 오래 사귄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말했답니다.

 그런데 이 XXXX는 자기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양다리 걸치라고 그랬답니다. ㅋㅋㅋㅋㅋ

 미쳤냐는 말에도 억지로 키스했다네요.

 그 이후로도 사귀는 사이인 것처럼 친구에 카톡을 보내고 있고요.

 이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말이고 행동인가요? ㅋㅋㅋㅋㅋ

 심지어는 자기 자취한다고 자기 방에 놀러 오라고도 했다네요? 그것도 한 번도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어딘가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닐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애인이 떡하니 있는 사람한테 그럴 수는 없겠죠.

 정말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날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그 여자애 신상이 모두 까발려져서 호되게 한 번 당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2학년이시죠?

 작년에 ○○학과 수석이라고 들었어요.

 이야~ 임자 있는 남자 꾀고 다니면서 공부도 열심히 했나 봐요? ㅋㅋㅋ

 이 정도만 말해도 다들 누군지 찾아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이 글을 보시면 저희 커플의 행복을 방해하는 이 X에게 욕 좀 한 번 해주세요.

 

 ***

 

 “대나무숲?”

 학생들이 가장 많은 점심시간.

 겨우 자리를 잡아 학식을 먹으며 내가 물었다.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진희는 답답하다는 듯 먹던 것도 멈추고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 너 어떻게 대나무숲도 안 봐? 이번에 또 역대급 글이 하나 올라왔다니깐.”

 “미안. SNS를 안 해서. 무슨 내용이었는데?”

 진희에게 건성으로 물었다.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 내 메뉴는 돈가스였다.

 아무래도 메뉴를 잘못 선택한 것 같다.

 다른 메뉴가 더 별로인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돈가스를 선택했는데, 이것도 정말 맛이 없었다.

 학식이 갈수록 맛이 없어져 갔다.

 가격은 높아지면서 대체 왜지.

 다른 생각을 하는 날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학과 자타공인 정보통, 모든 소문의 근원지인 진희는 신 나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에 어떤 여자애가 오래 사귄 여자친구도 있는 선배한테 양다리 걸치자고 했대. 막 싫다는 사람 붙잡고 키스하고. 게다가 더 대박인 게 자기 자취방으로 오라고 그 선배를 꼬드겼대.”

 시큰둥하게 듣고 있던 나도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일이 진짜 실제로 있구나. 놀랍다.”

 깜짝 놀란 내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그녀가 몸을 내 쪽으로 더 기울이며 말했다.

 “그치. 그래서 댓글이 엄청 핫했어. 사람들이 누굴까 추측하고 있어. 근데 이 여자애가 수석이라고 글에 쓰여 있어서 폭이 엄청 확 줄었지. 곧 찾아내지 않을까 싶어.”

 진희의 말에 내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도 누군지 굳이 찾아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그 사람도 그 글 보고 반성하지 않을까?”

 진희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허공에서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순진하다. 순진해. 네가 뭘 모르는구나. 그런 사람들은 절대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할걸. 오히려 남자 탓을 할 인성이라고.”

 그런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돈까스를 한 조각 집어 들었을 때였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년 맞아?”

 “맞아. 맞아. 사진이랑 똑같이 생겼네.”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뒤늦게 고개를 들어 무슨 일인지 보려고 했을 땐 이미 낯선 여자에게 머리카락을 잡혀있었다.

 “악!”

 “너구나. 우리 주현이 피눈물 흘리게 한 년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억센 팔힘에 내 머리는 속절없이 휘둘렸다.

 식판은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지 오래였고 진희는 맞은편에서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서 상황을 보고 있었다.

 “어디 오늘 남의 남자친구한테 집적댄 벌 좀 받아라!”

 “이거 놔요!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내가 소리쳤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다른 여자들이 소리쳤다.

 “너 경영학과 류세영 맞잖아. 대나무숲 글 보고 찔리지도 않던? 어디서 발뺌이야?”

 “네가 호진이한테 찝쩍거렸잖아! 어딜 떡하니 여자친구가 있는 애한테!”

 분명 내 이름이 맞았다.

 하지만 찝쩍거렸다니?

 호진 선배는 내 남자친구였다.

 비밀 연애라 아무도, 심지어는 가장 친한 친구인 진희도 몰랐지만.

 그런데 다른 여자친구가 있다니? 뭔가 이상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여자친군데!”

 흔들던 것을 멈추고 여자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얘가 진짜 정신병이라도 걸렸나. 네가 어떻게 여자친구야! 호진이랑 6년이나 알콩달콩하게 사귄 주현이가 있는데!”

 “그럴 리가 없어요! 선배가 나한테 고백했다고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뺨에 얼얼한 충격이 가해졌다.

 “이거 진짜 미친년이네. 어디서 거짓말이야.”

 그녀는 있는 힘껏 내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아픈 와중에도 억울해서 나는 소리쳤다.

 “정말이에요! 난 거짓말한 거 없어요!”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녀의 말을 신호로 다른 여자들도 다 같이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수라 나는 속절없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몸을 둥그렇게 말아 그들의 공격에 최대한 방어하는 것이었다.

 식당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수군대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무도 나서서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진희조차 말리지 않고 경악한 채로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경비 아저씨가 오고 나서야 상황은 정리되었다.

 나는 여기저기 멍들고 부러져 며칠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묻고 싶어 선배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그는 나를 차단이라도 했는지 받지를 않았다.

 그제야 그가 정말 나를 속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상황을 믿기지 않았다. 모든 일을 받아들이기까지, 다친 몸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커서 그렇게 며칠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모두가 나를 피했다.

 피하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직접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었고, 내가 지나가면 야유를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나를 보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내게서 쉽게 등을 돌렸다.

 심지어 진희는 앞장서서 나를 욕하고 다녔다. 친구였던 만큼 적어도 내 이야기는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억울했다.

 나는 정말 몰랐는데. 나야말로 피해자인데.

 그 글에서 내가 수석이란 것 외로는 전부 거짓말이었다.

 내게 고백을 했던 것도 선배고, 사귀는 것처럼 생각한 게 아니라 정말 사귀었고, 여자 친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애초에 여자 친구가 있는 걸 알았다면 사귀지 않았겠지. 보통 자신에게 고백하는 사람이 여자 친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냐고.

 그리고 자취를 하는 건 맞지만 한 번도 선배를 내 방 안에 들인 적도 없는데.

 해명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해명해도 사람들은 비웃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미 사람들에게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욕하고 돌팔매질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간절히 바랐다.

 네 잘못이 아니야.

 누군가 그런 말을 해주길 바랐다, 간절히…….

 사람을 보기가 힘들었지만, 꾸역꾸역 학교를 나갔다.

 등록금이 얼만데 성적을 망칠 수는 없다는 일념이었다.

 그런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저년 억척스럽다, 뻔뻔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지쳐갔다.

 사랑하던 사람에게는 속았고, 사람들은 나에게 주홍글씨를 새겼다.

 누군가 말을 하고 있으면 나에 대한 얘기일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닿기만 해도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점점 내가 망가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나마 학기 말이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기말시험을 마치자마자 나는 짐을 챙겼다.

 대학을 위해 올라온 서울. 이곳에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나는 서울을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햇살에 눈이 부셔 잠에서 깼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켜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오전 8시였다.

 시간을 확인한 나는 다시 몸을 뉘었다.

 다시 자기 위해서였다.

 예전의 나였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겠지만, 요즘은 무기력함과 피곤함이 항상 나를 뒤덮고 있는 듯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점심때였다. 이제는 싫어도 일어나야 했다.

 비몽사몽 세수를 하고 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정리했다.

 대충 아무거나 집히는 거로 배를 채운 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이곳은 교통수단이라곤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번 오는 게 끝일 정도로 외진 그런 시골 마을이었다.

 서울과 달리 한적한 이곳은, 나에겐 편안하게 느껴졌다.

 날이 추워져 볼에 닿는 바람이 차가웠다.

 잠시 목도리를 들고 나올까 고민했지만, 거리도 짧고 다시 돌아가기가 귀찮아 그냥 걸어갔다.

 그때 반대편에서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 둘이 걸어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쩐지 껄렁한 느낌의 남자들이었다.

 뒤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들도 나를 봤는지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어이. 아가씨가 그 서울에서 왔다는 그 아가씬가?”

 남자는 내 앞에 바짝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

 나는 대답하지 하지 않았다.

 “피부가 희고 곱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다른 남자가 멋대로 내 뺨에 손을 댔다.

 그의 손이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 손을 단호하게 쳐냈다.

 “치워요.”

 “이야, 새침한데?”

 손을 맞아도 뭐가 그렇게 신 나는지 남자들은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른 남자가 내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랑 놀자. 아주 화끈하게 놀아줄게.”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힘이 너무 강했다.

 “이거 놔요.”

 “에이 섭섭하게 왜 그래. 이럴 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서울 여자 손목을 잡아보겠어.”

 그렇게 말하며 그들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마주 보고 킬킬거렸다. 그러더니 나를 끌고 가려 했다.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자자, 이러지 말고. 좋게 가자고. 좋게.”

 나는 계속 남자들에게 저항하고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쳤다.

 “싫어! 이거 놔!”

 어떡하지. 발로 남자 다리 사이를 차버릴까.

 누구라도 듣게 고래고래 놓으라고 소리를 치고 있을 때였다.

 남자들의 등 뒤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 보자 내 앞에 있는 남자들보다 월등하게 키가 큰 남자가 길을 막고 서있었다.

 그는 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씨발, 뭐야! 저리 안 비켜?”

 방해가 짜증 났는지 한 남자가 말했다.

 모자를 쓴 남자는 아무 대답 없이 그의 멱살을 잡아 그을 들어 올렸다.

 살집이 있어 꽤 무거울 텐데 그는 남자를 솜인형 들 듯 가볍게 들어 올렸다.

 숨이 막혔는지 남자는 캑캑거렸다.

 “여자가 싫다잖아.”

 “캑, 살, 살려…….”

 “이, 이런. 씨!”

 그 장면에 내 팔목을 잡고 있던 남자도 당황했는지 내 팔목을 놓고선 모자를 쓴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주먹을 힘차게 뻗었지만 남자는 그것을 쉽게 피하고 오히려 그를 발로 차버렸다.

 그는 바닥을 뒹굴었다.

 들고 있던 다른 남자도 내팽개친 뒤 모자 쓴 남자가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다신 눈에 띄지 마.”

 “히익!”

 순식간에 두 사람을 쫓아내 버리고 나와 그 남자만이 남았다.

 “너…….”

 “정,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가 무언갈 말하려 한 것 같았지만 나는 너무 놀라서 감사 인사만 하고 후다닥 도망쳤다.

 이모의 학원에 도착할 때까지 뛰는 걸 멈출 수 없었다.

 

 * * *

 

 전통음식 전문가인 이모는 이곳에서 요리 학원을 하고 계셨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로 시작했지만, 이곳 여자들 사이에서 좋은 입소문이 나면서 이번에 규모를 확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이모의 보조를 하고 있었다.

 나는 헐떡이면서 학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수업하는 교실은 한 면이 유리 벽으로 되어있어 복도에서도 안을 볼 수 있었다.

 이모는 벌써 수업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리고 수업을 들으러 온 여자들도 벌써 안에 많이 있었다.

 나는 교실을 지나쳐 더 안쪽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조금 앉아있다가 교실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며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가끔 시비를 거는 사람은 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재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너무 당황해서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고 도망쳐왔다는 것을.

 “얼굴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나중에 만나면 사례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바깥이 시끄러워졌다.

 여자들의 탄식, 비명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공포라기보단 기대나 흥분이 섞여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살피려고 했을 때 이모가 웬 남자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키도 크고 굉장히 잘생긴 남자였다.

 엉겁결에 나는 그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사무실 문을 열어 주었다.

 이모의 뒤를 따라 남자와 눈빛이 스쳤다.

 마주한 남자의 눈빛이 묘했다.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나는 두 사람이 편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문을 닫고 나왔다.

 사무실은 교실과 마찬가지로 복도 쪽이 유리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다른 점은 그 벽에 불투명한 시트지가 군데군데 붙어있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사무실은 교실처럼 밖에서 훤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 무슨 일인지 그 벽에 여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까치발을 들고 사무실 안을 살피고 있었다.

 “어떡해. 너무 잘 생겼어.”

 “민도겸을 실물로 보게 되다니. 웬일이니.”

 “와, 원장님 민도겸이랑 사진 찍으신다. 진짜 부러워!”

 여자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다들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

 아무래도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이름을 들어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심드렁히 여자들과 살짝 떨어져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때 이모가 내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부터 새로 다니실 거야. 나는 수업 들어가야 하니 네가 등록이랑 안내 좀 해드려.”

 이모가 나에게 부탁하며 밖으로 나갔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대신 자리에 앉아 종이와 컴퓨터에 그의 인적사항을 적기 시작했다.

 이름, 민도겸. 직업, 배우. 나이, 24…….

 배우구나.

 여자들의 반응을 보고 연예인이라고 짐작만 했는데 역시나 맞았다.

 하지만 관심 없었다.

 나는 무덤덤하게 필요한 사항을 적어넣었다.

 먼저 지금 수업이 요일별로 어떻게 열려있는지를 설명해주고 그에게 물었다.

 “배우고 싶은 요리 있어요?”

 그가 내게 되물었다.

 “가르쳐 주고 싶은 건 뭔데요?”

 나는 종이에 인적 사항 적던 것을 그만두고 남자를 바라봤다.

 요리라곤 하지 않던 사람이 무슨 계기로 요리 학원에 찾아온 걸까 싶었는데 배우고 싶은 요리도 없다니.

 이 사람, 도대체 여기엔 왜 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요리 배우러 온 거 맞아요?”

 어느새 편하게 다리도 꼬고 앉은 그가 말했다.

 “뭐, 배우기도 하고, 갚기도 하고, 받기도 하려고 왔어요.”

 “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내 머릿속엔 물음표만 가득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 기억 안 나요?”

 “…….”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아무 변화 없는 나의 표정을 보고 그가 허탈한 듯 말했다.

 “정말 기억 안 나나 보네.”

 아마 나를 놀리려는 가벼운 장난일 거라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장난, 재미없어요.”

 내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와, 정말인가 보네.”

 “내가 쉽게 잊힐 얼굴은 아닌데.”

 “…….”

 “진짜 기억 안 나나 보네. 억울하다.”

 무시했다. 그리곤 쓰던 것을 계속해서 썼다.

 “난 자주 생각했는데.”

 민도겸은 뭐라 중얼거렸지만, 너무 작은 목소리라 나는 듣지 못했다.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요리 배우실 거 아니면 그만 가 주세요.”

 “좋아요.”

 흔쾌히 말한 민도겸은 내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이거 뭐예요?

 핸드폰을 내게 들이미는 의미를 알 수가 없어 물었지만, 그는 동문서답이었다.

 “우선은 배우는 것부터. 그다음은 차근차근하죠. 뭐.”

 “네?”

 대체 그다음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요리, 배운다고요.”

 그래서 그게 내 눈앞에 있는 핸드폰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그런데요?”

 “저분이 그러는데 지금은 선생님이 그쪽밖에 없다던데. 전화번호 줘요. 일정은 문자로 통보해주고요.”

 드디어 대답다운 대답이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게 많았다.

 나는 선생님이 아니라 단순한 보조일 뿐이란 말이다.

 “네? 뭔가 착오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설명하려고 했지만 내 말을 자르고 도겸이 말했다.

 “원장님이 그쪽이 가르쳐주는 조건으로 나랑 사진 찍었는데.”

 “…….”

 “그 사진으로 광고한다던데.”

 “……이모!”

 때마침 사무실 밖에서 안을 살피는 이모가 보여서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일을 저지르면 어떡하라고.

 이모가 눈을 찡긋거리며 입 모양으로 ‘미안해’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전혀 미안한 표정이 아니었다.

 이모의 대책 없음은 여전했다.

 어쩌지?

 고민하는 내게 민도겸은 다시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번호, 안 줄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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