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09년
기분이 좋은 사람에게는 맑다고, 기분이 나쁜 사람에게는 덥다고 느낄 구름 한 점 없는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이제 겨우 10살인 쌍둥이 남매, 서진과 서린에게 오늘은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더운 날이었다.
교무실에 불려간 서진과 서린은 서로의 손을 쥐고 몸을 움츠렸다. 서린의 단발머리는 이미 한 차례 폭풍을 마주친 듯 엉망이 되어 있었고, 서진의 얼굴 역시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서진이 자신의 얼굴에 난 손자국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자국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얼한 느낌과 손 끝에 느껴지는 열기로 자국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비켜! 안 비켜? 저 망할 애새끼들이 내 아들을 기절할 때까지 때렸다는 거 아냐!"
째지는 고함소리에 겁먹은 서린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서린에게는 시대를 앞서간 머리를 서진에게는 과감한 볼터치를 안겨준 붉은 머리의 여자가 서진과 서린을 바라보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서린의 담임이 붉은머리 여자가 서린과 서진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몸으로 막으며 말했다.
"어머님, 병원에서도 애가 맞아서 기절한 게 아니라잖아요. 화나신 건 알겠지만 일단 조금만 고정하시고......."
짝 소리와 함께 대사가 끊겼다. 서진은 서린의 담임에게도 자신의 것과 똑같은 손자국이 생기자 이 상황이 어딘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사람을 때리는 게 나쁜 거라고 외치며 사람을 때리는 사람을 보는 것은 마치 요즘 유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서진이 볼을 세게 눌렀다. 가벼운 통증이 커지며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았다. 서진은 붉은머리 여자와 담임의 실랑이에서 시선을 돌렸다. 옆 반의 나이 든 담임이 손찌검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혀를 차며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머리 여자는 이전에도 몇 차례 다양한 이유로 교무실을 휩쓴 것으로 유명하기에 다른 선생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린의 담임과 붉은머리 여자를 번갈아 볼 뿐, 직접 나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컴퓨터에는 커다랗게 '블루로즈 실종. 어쩌면 사망?' 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흥미를 느낀 서진이 컴퓨터를 향해 고개를 뻗었지만 시력의 한계로 연관 기사로 있는 '마이클 잭슨 사망' 이상의 내용은 읽을 수가 없었다.
서린이 서진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서린은 긴장하고 있었다. 서린의 긴장한 얼굴을 보자 서진 역시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서진의 표정에 긴장감이 생겨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타칭 가해자인 서진이나 서린 역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붉은머리 여자의 아들이자 서린과 같은 반인 병헌은 서린을 꽤 오랜 시간 동안 집요하게 괴롭혀 왔다. 서진은 그것이 서린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서진 역시 나이에 비해 뚜렷한 이목구비로 잘생겼다 할 수 있었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못생겼고, 자신이 잘생겼다는 엄마의 말은 사랑이 담긴 거짓말이라 생각했었다. 그 정도로 서린은 특별했다.
서린 역시 서진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도를 넘지 않는 장난은 적당히 넘어가 주었다. 아니, 어쩌면 싸우고 싶지 않아 그렇게 자위하며 참는 것을 선택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의도로든 저질러서는 안 되는 장난이나 말이 있기 마련이었다. 병헌은 도를 넘었고, 서린은 화를 냈다. 병헌도, 서린도 어렸기에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토대로 주먹다짐을 시작했고, 서진이 그 모습을 보고 서린을 감싸고 병헌을 밀었다. 병헌은 교실의 맨 뒤에서 칠판까지 날아가 부딪친 다음 바닥에 떨어져 거품을 물었다. 서진의 잘못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정황이었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로 서진은 병헌을 그저 서린에게 떼어놓으려 했을 뿐, 교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날려 보낼 마음으로 세게 민 적이 없었고, 그랬다 치더라도 의도를 실현시킬 만 한 힘이 없었다.
두 번째 문제이자 이번 사건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병헌의 기절 원인이었다. 병헌은 감전당했다.
붉은머리 여자 역시 병원에서 그 말을 듣고 혼란에 빠졌지만 의사의 말에 굴복하지 않았다. 자신이 틀렸거나, 틀렸다고 생각할 때 욕설과 고함으로 자신과 타인의 생각을 뭉게고 책임을 넘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붉은머리 여자는 그 어려운 일을 하기에 적합한 강인한 피부를 지녔고, 망설임 없이 서진의 따귀를 때렸다. 서진은 붉은머리 여자에 비해 충분히 강인한 피부를 지니지 않았기에 쓰라렸다. 서린이 서진과 붉은머리 여자 사이를 가로막았고, 서린의 머리도 엉망이 되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벙쪄 있던 서린의 담임이 뒤늦게 서진과 서린을 보호하기 위해 끼어들었고, 거기까지가 서진과 서린이 지난 4시간 동안 겪은 일이었다.
한참 입술을 깨물고 있던 서린이 입을 열었다. 혼잣말 하듯 작게 말하는 서린의 손과 목소리가 떨렸다.
"서진아, 아빠 오려면 얼마나 남았지?"
서진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야 제대로 상황에 맞는 공포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5분 가량이 지난 뒤, 서진과 서린에게 가장 두렵고, 익숙한 얼굴이 교무실에 들어왔다.
서진과 서린의 아빠, 민태는 서진과 서린과 전혀 닮지 않았다. 그렇기에 서진은 민태의 머리에 커다란 원형 탈모가 있더라도 장래의 자신의 머리를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서진과 서린은 엄마의 유전자가 압도적으로 뛰어나거나 아니면 아예 친부가 다른 것이 분명하다고 믿었다. 서진은 후자를, 서린은 전자의 가설을 선호했다. 민태의 신체 중에서 나이보다 젊다고 할 만한 것은 주름 하나 없이 매끄러울 것이 분명한 뇌 뿐이었고 민태는 교무실에 들어오기 전 부터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털며 자신의 젊음을 뽐냈다. 민태의 모습에 붉은머리 여자 조차 입을 다무는 것도 잊어버린 채 민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민태가 문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의자에 앉은 뒤 유리로 된 책상에 담배를 비벼 불을 껐다. 서진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민태에게 학교, 특히 초등학교에서는 흡연이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 사람이 없었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뭡니까?"
민태의 말에 최면에서 벗어난 붉은머리 여자가 다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당신 아들이 우리 아들을 때려서......."
"미안합니다."
다시 대화가 멈췄다. 너무 빠른 사과에 붉은머리 여자는 할 말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민태가 다시 말했다.
"어릴 땐 싸울 수도 있고, 다치고 그러면서 크는 거 아니요? 하여간 우리 애가 이겼으니 미안합니다."
서진은 아빠의 말이 꽤 웃기다고 생각했다. 서진이 기억하는 민태는 술에 취해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벽에 머리를 들이받아 다른 가족들을 두렵게 하는 가장이었지 이런 장난같은 말을 하는 아빠가 아니었다. 하지만 붉은머리 여자 역시 민태와 비슷하게 젊은 뇌를 가졌는지 민태의 말을 진심어린 사과로 받아들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애들 간수 좀 잘 하세요. 엄마 없는 티 내게 키우지 말고. 나 참. 내가 웬만해서는 이런 편견 없이 키우려고 노력을 하는데 이런 일 겪을 때 마다 정말 역시 엄마 없는 자식들은......."
아니면 나름대로 역으로 도발하려고 넘어가는 척 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붉은머리 여자는 말 끝을 흐리며 민태의 눈치를 살폈다. 서진과 서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병헌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기는 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서린 뿐이었기에 주먹다짐으로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민태는 달랐다. 민태는 붉은머리 여자가 말을 마칠 때 까지 초인적인 인내심을 보여 주었다. 마침내 붉은머리 여자의 말이 끝난 것처럼 보이자 민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이 서린을 감싸고 안았다.
"이, 미친년이!"
민태가 의자를 들어 붉은머리 여자에게 휘둘렀다. 서진은 눈을 감았다. 무시무시한 소리가 서진의 귀를 자극했다. 단단한 것이 단단한 것을 들이받는 소리, 귀를 찌르는 비명소리가 교무실을 가득 채웠다. 복도까지 소리가 울려 퍼졌는지 누군가가 교무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서진이 서린의 손을 잡은 뒤, 문을 연 사람을 밀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문을 닫은 서진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린이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엄마 보고 싶다."
서진이 울먹이며 말했다. 서린 역시 지난주에 도망친 엄마를 떠올리며 울쌍을 지었다. 서린의 엄마는 어느 날 밤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서진과 서린 역시 아빠보다는 엄마가 더 좋았지만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자신을 버린 사람을 찾기 위해 집을 나가는 것은 서진과 서린에게는 너무 큰 도전이었다. 교무실 안에서의 난투는 피투성이가 된 붉은머리 여자가 눈물범벅으로 뛰쳐나가면서 마무리되었다. 붉은머리 여자는 거친 욕설과 함께 패배를 인정하며 복도를 따라 사라져 버렸다. 서린의 담임이 따라 나갔다가 서진과 서린을 발견하고 몸을 숙이고 손을 내밀었다.
"얘들아, 괜찮니? 미안하다. 선생님이 더 잘 지켜줘야 했는데......."
서린이 담임의 손을 잡았다. 다음 순간 서린의 담임이 당혹스러운 비명과 함께 서린을 밀었다. 바닥에 쓰러진 서린이 울음을 터뜨렸다. 서린의 담임의 손이 붉게 달아올랐다. 서진이 서린을 끌어안고 담임에게 소리쳤다.
"이게 지켜주는 거예요!"
"아, 아니 그건......."
서린의 담임이 손을 흔들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서린과 서진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서린의 몸에 손이 닿자 마치 불에 데인 듯 뜨거웠던 것이다. 서린의 담임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화상을 입어 화끈거리고 있었다. 분명 비정상적인 일일 뿐 아니라 이전에는 서린에게 없는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서린의 담임이 서진을 잡고 서린에게서 떨어뜨렸다. 서진이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쳤지만 성인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서린의 담임이 입을 벌렸다. 서린의 고열이 사라졌다.
"너희들, 이거 언제부터 이랬니?"
"뭐가요?"
어느새 다시 서린에게 붙은 서진이 서린의 담임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뭡니까 또."
서진의 비명을 들은 민태가 교무실을 나왔다. 서린의 담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버님. 애들이 좀 놀란 모양이네요. 오늘 여기까지 오게 돼서 유감입니다. 아직 수업이 다 끝나지 않았으니 이제 애들은 수업 보내야 하니 아버님은 먼저 돌아가 계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죠."
민태는 귀찮은 일을 겪었다는 듯 손을 흔들며 왔던 길을 돌아갔다. 서진과 서린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였다. 서린의 담임이 민태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민태가 계단 쪽으로 사라지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서진과 서린에게 말하는 담임의 목소리가 신중하고 낮았다.
"얘들아,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증인'인 것 같구나. 그것도 꽤 위험한 것 같아. 이렇게라면 병헌이가 기절한 것도 서진이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일단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말거라. 선생님이 너희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알아봐 주마."
"증인이요?"
서진이 깜짝 놀라 외치자 서린의 담임이 서진의 입을 막고 더 크게 외쳤다.
"그래, 증인 말이다. 네가 병헌이를 때리지 않았다는 증인으로 가족인 서린이 말고 다른 친구들도 불러야 할 것 같구나. 안 그래도 병헌이 어머님까지 다쳐서 상황이 너무 복잡해질 것 같으니 말이야. 일단 휴게실에서 우리끼리만 이야기 해 볼까? 얘들아, 구경하지 말고 저리 가라. 서진아, 가자."
서린의 담임은 자신의 임기응변에 감탄하며 서진과 서린의 팔을 잡아끌었다. 서진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서린이 서진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서린의 생각이 서진에게 들어왔다.
'아빠한테도 비밀로 해야 되나?'
서진이 깜짝 놀라 서린을 바라보았다. 서린 역시 서진의 생각을 읽고 같은 표정을 지었다. 휴게실로 가는 동안 서진과 서린은 결론을 내렸다. 아빠에게도, 아니 아빠이기에 더욱 이 일은 비밀로 해야 한다. 서진과 서린은 새롭게 얻은 기이한 능력에 정신이 팔려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서진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눈치 채지 못 했다.
그렇게 그날 서진과 서린의 인생에서 가장 큰 기회이자 저주인 사건 두 가지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