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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독립
작가 : 대홍수2
작품등록일 : 2018.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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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하루, 작은 변화(1)
작성일 : 18-11-06     조회 : 277     추천 : 0     분량 : 8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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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증인’이란 이전 세대에서는 법정에서, 혹은 길거리 왈패들의 말싸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이었으나, 현 세대부터는 초능력자를 일컫는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증인들은 모두 다양한 종류의 초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화염을 뿜거나,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거나, 텔레파시까지 사용하는 등 시간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면 발현되는 능력의 제한은 없으며, 능력과 무관하게 병에 대한 저항력이 뛰어나고 상처도 일반인 보다는 쉽게 치유되는 등 신인류라 부르기에 충분한 조건을 보이고 있다. 증인의 등장은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이며, 최초의 발견과 이를 명명할 기회가 아직 서툰 인류학자인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생에 다시 누릴 수 없는 최대의 행운이다. ‘증인’이라 명명한 이유는 그들이 인류가 진화한 새로운 형태라 믿기 때문이나 아직 가장 나이가 많은 증인조차 30대에 불과한 탓에 증인의 능력이 유전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증인은 형제, 자매가 함께 능력이 생겨나는 경우가 가장 많이 보고되고 있기에 나는 조금 섣불리, 그러나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이들을 증인이라 명명했다. 훗날 증인들이 성장하여 2대째의 증인들을 연구할 경우, 증인의 발생 패턴과 인류 진화의 기원까지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보며 떨리는 마음으로 증인들의 미래를 기대해 본다.>

 

 -그라인거 D 아시즈 <증인의 기원>

 

 인류학자 아시즈는 이 책을 낸 뒤 7일째 되는 날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경찰은 아시즈가 암 말기 판정을 받게 된 뒤 최후의 원고를 완성하고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

 

 2015년

 

 서진은 사막 한 가운데에 서서 갈증에 신음했다. 작열한다는 단어의 의미를 온 몸으로 체감하며 바닥에 주저앉은 서진이 손으로 땅을 짚었다. 모래 속에 파묻힌 서진의 손이 서진의 기억보다 작았다. 10살 때의 작은 손을 발견한 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꿈이구나.”

 

 서진은 오랜 경험으로 자신이 꿈속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한숨이 안도의 의미는 아니었다. 실제로 사막에 가본 적이 없는 서진은 사막과 악몽 중 어떤 것이 더 끔찍한지 말할 수 없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서진은 이것이 자신의 악몽보다 끔찍하다고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없었다. 악몽은 서진에게 그저 별 것 아닌 환상이 아니었다. 서진이 이를 갈았다. 벌써 5년간 겪은 일임에도 여전히 서진은 꿈인 걸 알게 되자마자 공포에 다리가 굳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서진이 용기를 내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조차 마음대로 나오지 않았다.

 

 “서진아, 어디에 있니?”

 

 사막이 외쳤다. 외쳤다는 설명은 적당치 않을 수도 있었다. 사막은 평범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즐거운 비밀을 공유하는 어린아이처럼 나지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거대한 사막의 크기 탓에 서진에게는 사방에서 어마어마한 소리가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진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진아?”

 

 또다시 들리는 속삭이는 고함에 서진이 눈물을 흘렸다. 서진의 눈에서 떨어진 것들이 땅에 떨어져 검붉은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서진의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서진은 바닥에 떨어진 피가 스며든 모래를 뭉쳐 작은 언덕을 완성시켰다. 언덕은 피를 먹을수록 커지더니 나중에는 서진이 고개를 끝까지 들어도 다 볼 수 없는 거대한 성으로 변했다. 서진이 성문을 열었다.

 

 “서진아, 여기 있었구나.”

 

 서진은 공포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몸은 언제나처럼 의지와 무관하게 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에서는 여왕이 두 팔 벌려 서진을 환영했다. 서진이 고개 숙여 여왕에게 절했다. 서진이 걸어간 자리에 두 줄로 흐른 피의 길이 넓어져 레드카펫을 그려냈다.

 

 “고개를 들어라.”

 

 서진이 고개를 들어 여왕을 바라봤다. 그리고

 

 서진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

 

 “그게 뭔 무서운 꿈이야? 아니, 피 흘리는 건 무서울 수도 있겠지만 넌 그 여자 얼굴도 모르겠다며? 그냥 박보영이 거기 서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

 

 서진의 꿈 이야기를 들은 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핀잔을 줬다. 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평소 잠도 거의 못 자고, 학교에서 가끔 쪽잠을 자더라도 악몽에 비명 지르며 깨어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수영은 서진을 졸라 서진의 악몽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무래도 수영을 납득시키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인생의 굴곡이 지나치게 많아 웃는 것을 포함해 어떤 감정 표현도 보기 드믄 서진에 비해 수영은 언제나 밝고, 말도, 장난기도 넘쳐 둘의 우정은 잘 어울리지 않는 듯 했지만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해준다는 깨달음을 얻은 수영이 먼저 서진에게 접근했고, 서진도 내심 그것이 싫지 않아 굳이 밀어내지는 않았다. 서진이 말했다.

 

 “얼굴도, 몸매도, 나이도 어느 것 하나 모르겠어. 목소리도 엄청 쩌렁거려서 고통스럽다는 것 정도를 빼면 특징은 기억나지 않아. 다만 무서워. 그 여자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평범한 인간은 아니야.”

 

 “박보영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거든? 얼마나 귀여운데!”

 

 “.......아, 그래.”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왜 네가 매일 피로에 찌들어 학교에서 자고, 거기에 매번 비명 지르면서 깨어나는 알게 됐네. 이해는 안 가지만.”

 

 수영이 연필로 간단하게 서진이 요약한 꿈의 내용을 그리며 말했다. 서진은 수영이 가볍게 그린 성과 그 안에 들어있는 검은 실루엣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서진은 6년 전 장래가 기대되는 멋진 모습과는 다르게 2천 번 가량의 악몽과 지속적인 학대로 몸도 마음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조각이 났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만신창이인 손과 등, 그리고 움푹 들어간 눈은 서진이 정말 과거의 그 잘생긴 아이라고 생각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통찰력이 필요하게 만들었다.

 

 서진은 수영이 그린 그림을 뒤집었다. 수영은 서진이 그림에 손이 닿는 것조차 두려워 손가락 끝으로 종이 끝을 잡는 것을 보고 장난기가 발동했으나 서진의 진지한 공포에 장난기를 억눌렀다.

 

 “아무튼 숙제나 좀 도와줘라. 수학은 어쩌려고 하루치 과제로 한 단원을 다 쑤셔넣냐.”

 

 불평하는 수영과 다르게 서진은 무덤덤했다. 사실 서진은 과제가 많든 적든 별 상관없었다. 서진과 서린은 서로의 신체 일부가 닿고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각각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가 접촉하고 있는 대상의 기억을 읽어내는 능력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당시 서린의 담임은 서진과 서린이 상상조차 못한 방식으로 그 능력의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서진과 서린은 수많은 선생님, 그리고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접촉했다. 기억을 읽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경험을 읽는다는 것이기도 했다. 서린의 담임의 인맥으로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한계가 있었지만 중학교 수준의 수학에 쩔쩔맬 사람은 없었다. 능력의 활용만큼 지식의 활용 역시 서진과 서린이 스스로의 경험으로 익숙해져야 했고, 범재 수준의 중학생 수준이 기억할 수 있는 용량도 한계가 있었기에 한계는 있었지만 학교 과제 정도는 양이 아무리 많다 한들 문제가 될 수가 없었다. 서진이 그 비밀은 말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너도 죽어라 공부하면 나처럼 풀 수 있을 거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저 서진의 비법이 아니었을 뿐.

 

 “그래, 그게 내게 되겠니? 너는 아무리 봐도 이런 꼴통학교가 아니라 인서울 노려야 될 놈이란 말이지. 나 같은 놈과 친구가 되어 주어 크나큰 영광이옵니다. 서진 폐하. 나중에 뭐든 성공해도 날 잊지는 말아 주소서.”

 

 수영이 과장된 몸짓으로 서진에게 경례했다.

 

 ※※※※※

 

 수업이 끝나고 나자 서린은 서랍 속의 교과서들을 모두 챙겨 책가방에 집어넣었다. 수업이 끝날 때 까지 서린에게 접근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서랍 속에는 쓰레기들이 책에 끼어서 끌려 나왔다. 서린이 무릎에 떨어진 쓰레기들을 전부 주워 책상 위에 올려놓자 등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린이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서린의 나이 대에는 친구보다 중요한 것이 없을 때였고, 따돌림에 상처받기도 더 쉬웠지만 서린은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순간 상처받은 기억까지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함께 버릴 수 있었다.

 

 서린은 자신이 여전히 몸이 상한 곳 없이 어린 시절의 모습을 거의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서진이 몸으로 민태의 모든 구타를 받아 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린은 서진의 상처에 책임감을 느꼈다. 서린은 많은 남학생들이 자신의 묘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크서클과, 검은 단발, 마른 몸과 작은 키에 매력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린은 다크서클은 집안일에 과도한 무리를 해 생겼다는 것을, 샴푸를 최소화하기 위해 짧은 머리를, 언제나 영양이 부족해 마른 몸과 작은 키를 지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린은 자신의 고통에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동급생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린의 반에서 서린은 그저 이성에게 인기는 많은데 싸가지 없고, 친구도 없는 아이였다. 따돌림은 붙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린은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섣부르게 사람을 판단하는지를 두고 벌어진 경쟁에서 굳이 심사위원을 맡고 싶지 않았고, 상처받아 주저앉기에는 그보다 더 무섭고 걱정되는 일이 너무 많았다. 가방 정리를 모두 마친 서린이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교문 앞에서 수영과 서진이 서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린이 숨을 고르며 서진에게 의문을 담은 표정을 보내자 서진이 한숨을 쉬며 서린의 머리에 손을 댔다. 서진의 생각이 서린에게 전해졌다.

 

 ‘이놈이 공부 좀 알려달란다.’

 

 별 생각 없이 생각을 보내던 서진은 서린의 기억을 읽고 움찔했다. 어차피 서진과 서린 사이에는 비밀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둘의 몸이 닿으면 몸이 닿는 존재의 기억을 읽어내니 서로의 기억은 둘의 공공재나 다름없었다. 서진이 교실로 돌아가서 전부 다 태우거나 지져 버릴까 의견을 제시했고, 서린은 매우 매력적이지만 이제 우리 할 일을 해야 하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고 대답했다. 서린이 서진의 손을 치우고 수영에게 말했다.

 

 “수영아, 우린 좀 바쁜데. 다음에 볼래? 다음 주에 어린이날이니깐 그때 보자.”

 

 “어린이날에 공부를 하라고?”

 

 수영이 질색했지만 서린은 호의적이면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싫으면 말고.”

 

 “아냐, 아냐! 그럼. 어린이날에 공부 해야지. 그럼 그때 보면 되겠다.”

 

 “고마워. 그럼 우리 먼저 갈게. 다음에 보자.”

 

 서린이 정중하고 반듯하게 선을 긋는 인사를 마치고 서린과 함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서진이 수영이 미련이 남는 표정으로 손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매정하네. 쟤 너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그래서 쟤 생각은 안 읽잖아. 남자애들이 내 벗은 모습 상상하면서 화장실에 있는 건 이제 그만 좀 읽고 싶거든.”

 

 서린이 말했다. 서진은 불을 다루는 소녀가 이토록 차갑게 말할 수 있다는 것에 항상 이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서진 역시 전혀 짜릿하지 않은 전기를 다루는 소년인 만큼 별로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서진이 화제를 돌렸다.

 

 “오늘 살 건?”

 

 “술. 나머지는 안사도 돼.”

 

 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얼마 전에 한 박스를 사서 들였는데 민태는 가족의 불안한 예산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채 술을 퍼마시고, 술이 없으면 그 술을 다 마신 것이 서진인 것처럼 서진을 갈아 피를 술 대신 마시려는 것처럼 굴었다. 서진이 고개를 숙인 채 몸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욕설을 내질렀다. 학교에서는 누구도 볼 수 없다는 희귀한 격한 감정을 드러낸 서진의 모습이었지만 서린은 그 드문 광경에 감명 깊어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얼굴을 가볍게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말 이쁘게 하자. 어차피 듣는 건 나밖에 없는데 내 기분을 나쁘게 하려는 건 아니잖아?"

  

 “그 돼지새끼는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는 건가?”

 

 “모르겠지. 그렇게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니니깐. 아무튼 예산이 딸려서 저번처럼 한 박스 사고 그런 건 힘들 것 같아. 인당 두 개씩 사서 가자.”

 

 “그러면 이번 주말에 한 번 더 가야겠네.”

 

 "돈이 없어. 알바라도 다시 구해야 할 것 같은데.”

 

 서린의 말에 서진이 두통을 느꼈다. 민태가 서진과 서린을 키우는 유일한 이유인 정부보조금은 민태의 음주욕을 충족시키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서진은 불과 한 달 전에 있었던 제봉공장 아르바이트가 떠올랐다. 아니, 한 달도 안 되었나?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미성년자라고 돈도 많이 떼먹혔다. 그나마 증인이라 폐병 걱정이 적은 것이 다행이었다. 한 달간 밤새 벌었던 돈은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민태의 위장 속으로 들어가며 마무리되었다. 그 경험 속에서 서진이 얻은 것은 오며 가며 서린과 나눠먹은 붕어빵 다섯 마리가 전부였다.

 

 서진의 화를 읽어낸 서린이 생각을 보냈다.

 

 ‘이번엔 내가 일거리를 찾아볼게. 넌 쉬고 있어.’

 

 ‘너 혼자는 위험해서 안 돼. 정 하고 싶으면 같이 하거나.’

 

 ‘그게 안 되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우리 둘 다 없으면 술 취한 아빠를 누가 커버하냐.’

 

 ‘그러니까 내가 할게. 넌 저번처럼 집에서 할 일 해.’

 

 ‘.......미안하다. 돈을 더 아낄 방법을 찾아볼게.’

 

 ‘아냐.’

 

 서진은 고개를 저었지만 역시 서린이 조금만 더 잘 했으면 하는 잡념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서린의 얼굴을 아는 주인아주머니의 안쓰러운 표정과 함께 소주 4병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도 아마 별 차이 없는 하루일 것이었다. 민태는 취하고 나면 반반 정도의 확률로 폭행을 가했고, 술에 취하지 않으면 100퍼센트 확률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렇기에 술병이 무거우면서도 별로 무겁지 않았다. 서진은 오늘은 맞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희망을 가져 보았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 더 특별한 희망이 찾아오는 날이었다.

 

 서진이 자신의 전쟁터이자 집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매일 보는 건물이었지만 언제나처럼 전쟁터를 향한 경외로서는 절대 아닌 이유로 발걸음이 멈추곤 했다. 하지만 발걸음이 멈춘다 한들 전쟁이 피해가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굳은 결심과 함께 집에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누군가가 급하게 아파트에서 뛰쳐나오다가 서진과 부딪치고 바닥에 함께 뒹굴었다. 서진과 손을 잡고 생각을 공유하던 서린은 아슬아슬하게 손을 놔 함께 땅을 구르는 참사는 막을 수 있었지만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서진과 함께 뒹군 남자가 당황하며 서진을 일으키려다가 자신의 다리에 걸려 다시 바닥을 굴렀다. 결국 서진이 먼저 일어나 남자를 일으켜줘야 했다. 남자가 외쳤다.

 

 “미안아요! 괜찮해요? 어디 없는 데는 다쳤어요?"

 

 이 정도면 의도된 연극인가 싶을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서린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남자의 원맨쇼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서린은 남자의 기억을 읽지 않고도 남자에 대해 많은 것을 추론할 수 있었다. 아무리 어리버리한 사람이라 해도 오른발에 샌달을, 왼발에 부츠를 신고, 이 따뜻한 날씨에 등이 찢어진 점퍼를 입을 리는 없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패션과, 극명히 대비되는 정중한 예의에 서진도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남자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임에도 자신의 절반 정도의 나이밖에 안 되는 서진에게 결코 말을 낮추지 않았다.

 

 사실 낮추지 않은 것은 목소리 톤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합니다. 급히 만날 사람이 있어 너무 정신없이 있다 보니 앞에 누가 있는지도 몰랐네요. 아니, 여기는 아파트 앞에 골목을 이런 식으로 집어넣는답니까. 분명 사고가 벌어졌어도 대여섯번은 더 벌어졌을겁니다. 아, 그렇다고 제 책임을 회피하는 건 아닙니다. 제 실수로 부딪친 건 분명한 사실이고 제 실수는 제 잘못이죠.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가 다시 고개 숙여 사과했다. 서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주 고개를 숙였다. 서진이나 서린이나 살면서 좋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남자가 계속 말을 이어나가려 하자 서린이 급히 남자의 말을 끊었다.

 

 "네, 그렇죠. 실수 할 만 해요. 근데 아저씨는 바쁘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아! 그러네요! 알겠어요. 정말 미안합니다!"

 

 남자가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인사 한 후 빠르게 서진과 서린이 온 방향으로 사라졌다. 서진은 폭풍을 만난 듯 멍하니 남자가 사라진 길을 바라보았다.

 

 "참, 세상은....... 별 인간이 다 있네."

 

 "그러게. 꽤 호감형에 매너도 좋은것 같은데 왜 저런 옷을 입고 있지."

 

 서린의 의문에 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집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기인과의 만남이 다 기연일 수는 없는 법이고, 서진은 다음 주 정도면 잊힐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폭풍은 두 번 친다는 농담처럼 두 번째 폭풍이 첫 번째 폭풍의 영향이 사라지기도 전에 휘몰아쳤다. 남자가 다시 뛰어 돌아와 서진과 서린의 명찰을 확인하며 외쳤다.

 

 "이서진! 이서린! 이민태와 최수정의 쌍둥이 남매! 정말 한참 찾았습니다! 주소는 알고 있었는데 30분간 노크를 해도 답이 없길래 혹시 기절했나 싶어서 창문을 깨고 들어가려 했는데 문득 중학생이면 학교에 있을 시간이 아닌가 싶어서 학교로 가고 있었습니다. 운이 좋으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면 안 되는데 그 속담 뭐였죠? 아무튼 부딪치지 않았으면 지금쯤 교무실 생활기록부를 뒤지다가 감옥에서 썩고 있을 뻔 한 것 아닙니까. 왜 아까 이름을 안 알려줬죠? 아니, 제가 안 물어봤죠. 잊어버려요. 제 실수니깐. 아무튼 만나서 반갑습니다."

 

 남자는 탁월한 말솜씨로 자신이 왜 성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야 했는지를 3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성공적으로 발표했고, 서린은 남자의 뛰어난 언변에 감탄하며 질의응답 시간을 시작했다.

 

 "아, 네. 반갑습니다. 근데 저희랑 가족 이름은 대체 어떻게 아는 거죠?"

 

 "아, 그건 아주아주 중요한 질문이네요.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습니다만 우선은 이걸 좀 보여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점퍼 주머니에서 편지봉투를 꺼냈다. 편지의 발신자를 확인한 서린의 눈이 커졌다.

 

 "저는 이지훈 이라고 합니다. 두 분의 어머님이 둘을 도와주라고 보냈습니다."

 

 발신자에는 서진과 서린의 모친, 수정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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