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평범한 하루, 작은 변화(2)
서진은 지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편지를 빼앗았다. 지훈은 서진의 반응에 조금 놀란 것 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쌍둥이에게 줄 물건이었기에 서진과 서린이 거칠게 편지를 뜯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편지에는 컴퓨터로 쓴 반듯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서진과 서린은 눈으로 빠르게 글을 읽었다.
<사랑하는 두 아이 서진과 서린에게.>
<서진아, 서린아. 그동안 잘 지냈니? 나야. 오늘은 오랜만에 카페에 갔다. 그자는 남편으로는 최악이었지만 연인으로서는 달콤했고, 이 동네 카페들은 전부 돌며 밤새 수다 떠는 것 만으로도 행복했지. 마음의 동요 없이 카페에 갈 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소소하지만 행복하더구나. 얼마 전에 너희들이 너무 그리워서 몰래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내가 없어 쉽지 않게 산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더구나. 당장에라도 너희를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쉽게도 나 역시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구나. 얼마 전에는 나를 쫓던 사람들이 내가 사는 곳에서 머무는 것을 봤단다.
그래, 내가 너희에게 내가 도망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 최소한의 양심으로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단다. 물론 너희 아버지도 좋은 사람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 때문에 도망친 것은 아니었다. 혹시나 편지가 잘못된 곳에 전달되면 너희도 위험할 것 같아 자세한 설명은 피하지만 문제가 좀 있단다.
일단은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같이 보내 줄게. 어딘가 이상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어려운 일이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이 최대한 도와줄 거야. 그 사람도 기쁜 마음으로 도와줄 테니 부담갖지 말고 엄마에게 부탁한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다 말하렴.
시간이 부족하니 이쯤 하고 마무리하마. 사랑해 얘들아. 내가 문제가 해결되면 최대한 빨리 찾아가서 너희를 데려가도록 할게. 힘든 순간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 나랑 셋이서 살면서 그동안 웃지 못한 거 한꺼번에 웃자. 사랑한다. 얼마나 더 사랑한다 말해야 충분할지 모를 만큼 사랑해.>
서진과 서린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움켜쥐었다. 서진과 서린의 머릿속에 편지의 기억이 떠올랐다. 쌍둥이의 손에 들린 편지는 지훈의 손으로, 주머니로, 더 들어가서 마침내 한 여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서진과 서린은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기억이 눈에 힘을 준다고 딱히 더 잘 보일 리는 없었다. 휴대용 게임기로 레이싱을 할때 몸을 같이 기울이는 것 만큼 무의미한 노력 끝에 결국 둘은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에 실패했다. 사물의 기억으로 볼 수 있는 시야는 그렇게 넓지 않았고, 고작 거칠지만 여성스러운 손과 옷만이 확인 가능했다. 서진이 편지를 내밀고 지훈에게 물었다.
"근데 아저씨가 준 이 편지가 엄마 것인지 어떻게 알죠? 컴퓨터로 쓴 거라 누가 썼는지 어떻게 압니까?"
"컴퓨터로 썼다고요? 어, 그러네. 편지를 받고 까보지 않아서 몰랐네요."
지훈이 서진이 내민 편지를 잡으며 말했다. 서진이 편지째로 지훈의 손을 움켜쥐었다. 지훈은 그 동작이 자신을 의심해 편지를 뺏기지 않으려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지훈의 생각을 읽기 위한 것이었다. 서진과 서린은 지훈을 아직 믿을 수 없었고, 당연히 능력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오랫동안 손을 잡고 있는 것도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동작이었기에 서진은 시간을 최대한 빠르게 돌려 지훈이 엄마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편지를 받는 장면으로 도달했다. 지훈의 시야를 따라 여자의 얼굴을 본 서진은 감정의 동요를 막기 위해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깨물어야 했다.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민태가 1년에 걸쳐 집에 있는 모든 엄마의 흔적을 전부 삭제한 탓이었다. 하지만 서진은 한 번도 그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서진의 기억보다 많이 상하고 피로와 불안에 찬 얼굴이었지만 서진은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서진이 손을 떼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서린이 서진 대신 앞으로 나와 말했다.
"그럼 아저씨는 우리 엄마랑은 무슨 관계인데요?"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냥 돈을 많이 줄 테니 두분께 편지를 전달하고 무슨 일이든 도와주라고 하더군요. 내가 조금이라도 이기심이 정직함을 넘는 사람이었다면 돈을 받은 채 도망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보통 과감한 일이 아니죠."
서진도 그 말에 동의했다. 지훈이 뒤늦게 깨달은 듯 허둥대며 주머니에서 음료수 두 개를 꺼냈다.
"자, 한 잔씩 하세요. 저기 편의점에서 사왔습니다. 탄산으로 사갈까 했다가 뛰어다니다 보면 터질까봐 캔커피로 한 잔씩 챙겨왔습니다. 아, 혹시 커피 싫어하시는 분은 없죠? 없으면 바로 다른 걸로 챙겨드리겠습니다."
쌍둥이 중 하나라도 고개를 저으면 당장에라도 편의점에 뛰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지훈의 모습에 서린이 황급히 음료를 받았다. 또다시 손이 닿으며 읽어낸 지훈의 생각은 그야말로 티없이 순수한 호의였고, 음료수 역시 근처 편의점에서 구매한 수상할 것이 없는 음료였다. 의심을 마친 서진과 서린은 의심을 버리고 음료를 마셨고, 의심을 품었다 버리는 모습을 알지 못한 지훈은 쌍둥이가 아무런 의심 없이 음료수를 들이키는 모습에 수정의 행동은 사실 급한 사정 보다는 쉽게 사람을 믿는 성격이라 그런 것이라 생각했고, 서진과 서린은 빈 캔을 내밀며 그 생각까지 읽었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서진과 서린은 지훈이 말이 많고 빠르며 심성은 착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사람 정도로 결론 내렸다. 심성이 착한 사람이 이상한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의미 아닌가 생각한 서진은 곧 그 고민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앞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 어떻게 연락을 하면 될까요?"
서진의 질문에 지훈이 당황했다. 서진과 서린은 휴대전화가 없었다. 지훈도 휴대폰이 있게 생기지는 않았다. 지훈이 잠시 고민한 뒤 말했다.
"제가 여기서 자면 어때요?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큰 소리로 '이지훈!' 하면 바로......."
"아니, 그건 좀......."
서린이 말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무감각한 서린이라도 그 행동은 상상만으로 얼굴이 붉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훈은 몇 가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서진의 방에 숨어들어 지낸다는 것 부터, 문 앞에서 자면서 소리를 엿듣는다는 것 까지 무엇 하나 창의성이 가득하지 않은 의견이 없었다.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과연 이 사람이 어디에 도움이 될까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봐도 믿음직한 말동무 정도가 한계 같았다. 물론 서진과 서린 입장에서는 말동무 역시 나쁘지 않은 선물이었지만. 결국 서린이 양 손을 펴 지훈의 말을 끊고 말했다.
"일단 아저씨는 아저씨 사는 곳에서 살아요. 그리고 지금 시간에 학교 끝나고, 잠깐 만나서 아저씨는 엄마 이야기를 해주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도와주거나 하는 거예요. 어때요?"
"하지만 갑자기 당장 도움이 필요해지면......"
"지금까지 15년간 그랬던 적이 없는데 갑자기요? 그럴 일 없으니 걱정마요."
단호한 서린의 모습에 서진은 문득 수정이 지훈을 선택한 것은 급한 마음에 아무나 붙잡은 것이 아닌 부담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인물이기에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훈의 지나치게 허술한 모습은 서진과 서린으로 하여금 '초면의 사람에게 어떻게 무리한 것을 부탁할까' 대신 '대체 어떻게 써먹어야 잘 썼다고 할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지훈은 잠시 고민한 뒤 서린의 의견을 수용했다.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하죠. 아, 남은 이야기는 어디 앉아서 할까요? 어머님에 대해 궁금한 건 없어요?"
"엄마에 대해 아는 게 있어요?"
"아뇨."
서진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에 자신이 이토록 폭력적인 인간이었나 놀랐다. 하지만 곧 서린 역시 비슷한 감정임을 깨닫고 안심했다. 그러나 지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대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줄 수는 있어요. 아직 세 분을 만나게 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를 전해줄 수는 있죠."
"대체 왜요?"
서진은 지훈의 기억을 읽고 싶은 욕망에 마음 속으로 몸부림치며 말했다.
"왜 안 만나주는 거죠?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 건지 모르는 건가요?"
"어머님께서는 아직까지는 자신이 이 편지를 썼다는 것 조차 알려지면 안 된다고, 때가 되기 전에 이 편지를 쓴 사람이 알려지면 여러분에게도 곤란한 일이 일어날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허?"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다. 대체 누구에게 알려지면 안 된다는 것인가? 서진은 그저 가장폭력에 시달려 도망쳤다가 뒤늦게 자식 생각에 돌아온 엄마보다 더 큰 무언가가 이 관계에 들어있다는 것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훈은 그렇게 말했고, 서진과 서린이 원한다면 어디가 접선 장소이며, 언제 어떻게 찾아가야 엄마를 만날 수 있는지도 다 알아낼 수 있었지만 일단은 보류하기로 했다. 돕겠다는 사람의 신뢰를 굳이 부수고 싶지는 않았다.
서진이 자신의 깨진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더 오래 시간을 내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이제 아빠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서린도 시간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궁금한 게 너무 많지만 내일 정리해서 줄 테니 오늘은 이만 할까요?"
"이만 하게요? 혹시 뭐 필요한 거 없어요? 혹시 식량이 부족하다거나......."
"아니, 됐고....... 아, 혹시 술이나 좀 사다줄 수 있나요? 우리가 마실 건 아닌데 아무튼 좀 필요해서요."
"술? 막걸리? 테킬라? 와인? 위스키? 칵테일? 샴페인? 동동주? 사케? 청주? 럼? 맥주? 보드카? 브랜디? 고량주?......."
"....... 놀랍게도 그 많은 종류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중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소주요."
"아, 맨 처음 말한 술이 소주였습니다. 술 하면 소주 아니겠습니까? 소주야 말로 모든 술을 대표하는 술의 왕이자, 친구이자, 국민......."
지훈은 중학생 두 명 앞에서 술에 대해 확고한 철학을 드러냈고, 두 명의 중학생은 이를 무시했다. 이를 모르는 지훈은 신이 나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지훈의 말이 마무리되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내일 만날 때 사서 보내드리죠. 더 하실 말씀은? 없죠? 없으면 이만 가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서진은 다음날 지훈이 양 손에 술 한 박스를 지고 온다 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훈은 왔을 때 만큼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서진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올라가자."
"그래."
※※※※※
집에 들어간 쌍둥이는 현실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불을 켜자 바퀴벌레 십수마리가 뽈뽈대며 구멍을 찾아 들어갔다. 서진이 서린의 손을 잡은 뒤 가벼운 전기를 벽에 흘려보냈다. 서린이 빗자루를 들어 감전사한 바퀴벌레들을 한 곳에 모았다. 한 자리에 모인 바퀴벌레들의 몸에 불이 붙더니 한 더미의 잿가루로 변했다. 바닥에는 작은 그을음조차 남지 않은 것은 오랜 시간동안의 시행착오의 결과였다. 서진이 잿가루를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으로 청소를 마무리했다. 냄비에 물을 받은 서린은 물 한가운데에 작은 불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물이 끓어오르자 서진이 라면을 끓였다. 이른 저녁을 먹던 서진은 문득 지훈에게 김치라도 좀 사달라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치라도 사달라 할걸."
서린의 말에 서진이 작게 기침하듯 웃었다. 생각을 공유하지 않은 순간에도 서로는 역시 서로였다. 그래도 천원어치 미역에 물만 섞고 끓인 미역국으로 3일간 버티던 시절에 비하면 라면은 특식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서진이 설거지를 했다. 쌍둥이의 집에서는 불을 다루는 서린의 능력 덕에 많은 돈을 아낄 수 있었다. 가스비는 거의 없는 수준에 전기세도 많은 부분에서 절약이 가능했고, 서진 역시 실생활에서 무궁무진하게 쓰이는 전기의 힘을 가사에 사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다. 사실 많은 노력을 하지는 않았지만 텔레비전 하나, 전화기 하나를 완전히 망가뜨린 뒤로 서진과 서린은 서진이 최선을 다했다 치기로 합의했다. 물론 언젠가 서진과 서린이 전자기기들을 부담없이 살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생긴다면 다시 시도하겠다 벼르는 서진의 마음 역시 서린은 신경쓰지 않는 것으로 무언의 합의를 봤다.
쌍둥이가 언제나 이른 저녁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명백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쌍둥이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서진은 상을 펴고 찬장에서 마른오징어를 꺼냈다. 포장을 뜯자 퀴퀴한 육향이 서진의 코를 유혹했다. 오징어 다리 하나에 다리뼈 하나를 지불한 기억이 아니었다면 이겨내기 힘들었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유혹을 이겨낸 서진이 오징어와 마요네즈, 케찹, 소주 세병을 세팅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식단이었지만 서린은 군침이 도는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유혹은 오래가지 않았다. 현관문이 열리고 민태가 들어오자 서진과 서린은 텅 비어 굶주린 장기가 쪼그라들어 오히려 배가 아픈 느낌을 받았다.
민태는 6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았다. 매일 아침이나 정오에 나가 저녁이면 들어오는데 돈을 버는지, 번다면 그 돈이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매달 서진과 서린에게 용돈을 챙겨주기는 하지만 그 돈으로 셋의 삼시세끼를 책임져야 했기에 사실상 생활비였다. 아니, 그걸로 민태의 술값도 부담하는만큼 민태의 유흥비이기도 했다. 런닝 차림으로 나가 그대로 들어온 민태는 서진과 서린은 쳐다보지도 않고 술상에 앉아 병부터 까기 시작했다. 서진이 서린의 손을 잡았다.
'들어가도 되려나?'
'글쎄, 조금만 더 기다릴까.'
서린이 자신의 방과 민태를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술 한 잔과 오징어 다리를 뜯던 민태가 서린을 바라보았다.
"아빠가 식사하는데 보고만 있을 거야? 앉아."
서진과 서린이 맞은편에 앉았다. 민태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방을 훑어보았다. 혹시나 트집잡아 스트레스를 풀 거리를 찾는 모양이었지만 서진과 서린은 이미 먼지 하나 없이 방을 정리한 상태였다. 오늘은 주먹을 휘두를 기분이었음에도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작게 신음한 민태는 결국 자신의 젊은 두뇌를 활용하기로 했다.
민태는 씹던 오징어를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의 몸이 움츠러들며 몸으로 서린을 가렸다. 민태는 술상을 옆으로 옮기고 서진의 배를 걷어찼다. 서진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졌다. 서린이 비명을 참기 위해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민태가 외쳤다.
"아빠가! 똑바로 하라고 했어! 안 했어!"
서진이 민태의 발길질에 급소를 가리며 이를 악물었다.
"아빠가 잘 하라고 했잖아! 왜 또! 이렇게 손을 대게 만들어!"
서진이 입을 열려다가 민태가 정수리를 발로 밟는 바람에 혀를 깨물고 신음했다. 순간 서진의 마음속에 살의가 떠올랐다. 서진이 서린의 손을 붙잡자 서진의 몸에 전기가 흘렀다. 민태는 아무런 사정도 모른채 전기 해충 퇴치기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발길질을 했다. 서진은 눈을 감았다.
'제발 이번에는!'
하지만 서진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서진의 살의를 읽은 서린이 서진의 손을 놓았다. 민태의 발은 어떤 저항도 없이 서진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서진은 신음하며 서린을 바라보았다. 서린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서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 서린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진은 체념한 채 술상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너, 지금 잘못했다는 말도 없이!"
민태가 서진의 발을 잡아당겼다. 서진은 손가락에 피가 날 정도로 바닥을 움켜쥐었지만 결국 민태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결국 서진은 무릎을 꿇고 민태의 바지를 움켜쥐었다. 민태가 서진의 얼굴을 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뺨을 맞은 서진은 바닥에 쓰러졌다. 피맛이 느껴졌지만 그것이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인지, 찢어진 입 안에서 나오는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바닥에 쓰러져서 신음하는 서진의 모습에 민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린을 바라보았다. 서린은 눈을 감았다. 드디어 내 차례다. 나도 서진과 고통을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민태는 기대와는 달리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가."
서린은 서진을 부축해 방으로 들어갔다. 쌍둥이의 방은 쓰레기 하나 없는 거실과는 달랐다. 바닥에 물든 피비린내는 무엇으로도 지우기 힘들었다. 아마 서진이 증인이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사망했을 것이었다. 서진은 그것이 슬펐다. 서진이 죽었으면 민태의 인생도 망가뜨릴 수 있었을 텐데 대신 증인의 회복력으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다양한 상처만이 서진의 몸을 괴롭혔다. 서린의 생각이 서진에게 느껴졌다. 서린은 미안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 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진다면 서린은 또 손을 놓았을 것이다. 서린은 서진이 살인범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맞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 쉽게 생각한다는 말은 서린에게 의미가 없었다. 서린은 서진의 생각을 완전히 읽고, 상처가 눈에 띄지만 않을 뿐 똑같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서진 역시 알고 있었다.
"용오름이 여기에도 하나 있으면 좋겠네."
서진이 말했다. 대전 출신 증인 슈퍼히어로의 닉네임을 들은 서린이 미소지었다. 그러나 대전과 용인은 너무 멀었고, 용오름이 가정 폭력범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린은 굳이 서진도 아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혹시나 밤에 다시 풀어낼 스트레스가 생긴 민태가 찾아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근 쌍둥이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조용히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