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린이날의 악연(1)
<".......기억을 읽는걸로 지식을 전부 네걸로 할 수 있으면 왜 이제는 안 하는데? 단순 접촉만으로 거의 인터넷 급 지식이 쌓이는 거 아냐? 도덕적인 거야? 물론 상대방이 알게 되면 불쾌하겠지만......"
"어떤 기억을 볼지 선택 하는게 힘드니까요. 가장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의 가장 더러운 기억을 보고 나면 평생 잊을 수가 없죠.>
<용오름과 서린의 대화 중.>
※※※※※
"아메리카노 셋이요."
서린이 주문했다. 서린의 사정을 아는 수영이 자신이 사겠다고 했지만 서린은 오랜만에 고집을 부렸다. 수영에게 빚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마침 여유도 있었다.
서린은 지훈에게 더 놀랄 것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지훈을 만난 다음날 아침 집 앞에 놓인 소주 10박스에는 한 번 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구석까지 문제의 술을 옮기는 것에 허리가 빠질 듯 했고, 지훈에게는 다시는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도움은 필요 없다 말했지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몰랐던 수영은 안절부절 못 하며 서진의 눈치를 살폈다. 서진이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젓고 자리에 앉았다.
"야, 어떻게 중학교 3학년 먹고 함수를 몰라?"
"목적어가 뭐냐고? 내가 여기 있는 목적이 뭔지 모르겠다."
"3.1절이 몇월이냐는 건 농담이지?"
서진을 통해 수영의 성적이 처참한 수준이라 들었기에 어느정도 각오는 했지만 수영의 실력은 서진의 생각보다도 엄청났기에 서린은 각오를 뛰어넘는 암담함을 느껴야 했다. 3.1절을 사밀절이라 쓰다가 서린의 지적에 새로운 공식을 발견한 듯 감탄하는 수영의 모습에 서린은 두통을 느꼈다. 잠시 뒤 음료가 나온 것을 알리는 알림벨이 울리자 수영이 급하게 알림벨을 들고 자리를 피했다. 서진이 서린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지?"
"이 정도는 좀 심하지 않니? 사밀절은 또 뭐야."
"사밀절 인정."
서진이 충격적인 기억을 또 떠올리고 킥킥댔다. 사실 어느 정도 어쩔 수 없기는 했다. 학교 자체가 공부와 거리가 먼 일진놀이에 취한 동네였고, 서진과 서린은 그곳 대신 제대로 된 학교에 입학하려 노력했지만 민태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수영이 못 하는 것이 아닌 서진과 서린이 특출난 셈이었다. 서진이 말했다.
"그래도, 잘 하면 사람 될 것 같지 않니?"
"사라밀절 정도 되겠지. 에휴, 그래. 해보자."
서린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등학생 시절 지식 습득을 위해 사람들의 기억을 흡수하던 중 서린의 담임의 영향으로 주로 교사의 기억을 흡수하다 보니 묘하게 교육열이 생기는 것 같았다. 수영이 음료에 더불어 몰래 주문한 허니브레드까지 가져왔지만 서진과 서린은 어떻게 수영의 성적을 올릴 지 고민하느라 감동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럼 38선은 전쟁이 3월8일에 끝나서 그런 거야?"
"전쟁이 왜 3월8일에 끝나! 38선은 6.25 이전의 경계선인데!"
서린이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이 비명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큰 소리로 한 적이 거의 없음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졌다. 수영이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지만 서진은 이 꿈도 희망도 없는 짝사랑에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서린이 다시 수업에 들어가는 동안 서진은 창가를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아무래도 수영은 서린이 맡는 것이 더 재미있어 보였다. 수영을 잘 아는 서진은 이런 재미있는 광경을 연출할 수가 없었다.
세 명이 앉아있는 카페 2층은 통유리로 되어있어 바깥 전체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창밖의 풍경이 그렇게 예쁜 것은 아니었다. 건너편에는 당장이라도 문을 닫을 듯 한 건물이 있었다. 특정 매장이 아닌 건물인 이유는 1층의 분식집, 2층의 피시방, 3층의 당구장 모두 낡고 망가지고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구장은 당구보다 패싸움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소문으로 유명했다.
'뭐, 그건 좀 과장이겠지만.'
서진이 분식집 앞에서 구걸하는 척 하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훈을 외면하려고 노력하며 생각했다. 서진과 서린은 누군가에게 제발 옷 좀 사 입으라는 말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의 사람이 그 부탁을 거절할 것이라고는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다. 지훈은 카페에 들어오지도 못 하고 서진을 올려다보면서도 별로 불쾌하지 않은 듯 밝은 얼굴로 서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 수영아 잘 봐. 직각삼각형의 짧은 변 두 개를 각각 제곱하고 더하면...... 너 직각이 뭔지는 알지?"
"응. 그건 당연하지. 근데 제곱이 뭐야?"
서린은 처음에야 당황에 소리를 질렀지만 천성이 화가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서린은 이제 화도 내지 않고 체념한 얼굴로 열심히 가르치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자 이젠 수영이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폭탄을 보는 눈길로 서린의 눈치를 살피며 열심히 따라가고 있었다. 서진이 곁눈질로 수영의 문제집을 보며 감탄했다.
"사밀절이 그래도 금방 사람 되네."
서린이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수영은 꽤나 지쳐 보였지만 그래도 집에 돌아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마도 수영을 붙잡은 의지의 8할은 서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지식은 공평하여 무엇 때문에 외우든 외운 것들은 기억에 남는 법이었다. 서린의 얼굴은 체념에서 즐거움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사실 체력이나 지식이나 밑바닥 일수록 성장이 빠르니 가르치는 맛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서린에게 드문 친구를 가질 기회이기도 했다. 수영은 머리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 순수했다.
서진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책을 꺼냈다. 엑토르 말로의 '집 없는 아이'는 이미 서른 번도 넘게 읽었지만 여전히 서진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다. 평론가들은 이 비극적인 삶을 산 아이에게 동정을 보내겠지만 서진은 부러움을 보냈다. 집에서 나와 다양한 동물과 사람들을 만나며 떠도는 모습은 아무리 비참할지라도 서진에게는 꿈이었다. 희망은 불확실한 곳에서 절망은 확실한 곳에서 온다. 같은 고통이라면 내일이 오늘과 다를 거라는 믿음이 있는 곳에서 고통받고 싶었다.
잠깐의 시간 후 독서를 마친 서진이 3교시까지 마친 뒤 하얗게 불태우고 쓰러진 수영과 서린을 바라보았다. 수영과 서린은 주먹인사라도 나누는 듯 주먹을 맞대고 있었다. 문득 서진은 여기서 서린을 만져 수영의 생각을 읽으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서진도 함부로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이 꺼려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읽고 정신질환에 걸릴 뻔 한 뒤로 지훈처럼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서진과 서린은 실수로라도 남의 생각을 읽지 않기 위해 항상 조심했다. 서진은 서린과 수영을 두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변기에 앉아 큰 변고를 해결하던 서진은 화장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정신이 흐트러졌다.
"어, 병헌아."
병헌이라? 서진에게 별로 반갑지 않은 이름이었지만 서진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희귀한 이름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말에 서진의 정신이 다시 모으기 힘들 정도로 흐트러졌다.
"네가 전에 말해준 쌍둥이. 여기 있는 것 같은데? 사진 보낼 테니까 잠깐 봐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서진이 문에 귀를 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얼굴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병헌이 서진이 생각하는 그 병헌이라면 저 병헌의 통화하는 인물 역시 서진과 친구라 보기는 힘들었다. 서진은 병헌과의 악연을 떠올렸다. 분명 그 때 기절한 뒤로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했다. 하지만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서진이나 서린이나 친구가 별로 없었으니 전학 갔다 이상의 정보는 전혀 듣지 못하긴 했었다. 서진은 불안에 몸을 떨었다. 병헌은 시간이 지나면 정신차릴 철 없는 초등학생이었을까, 아니면......
"맞아? 와,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저 존만한 애들이 그렇게 쎄다는거지? 어쩔거야?"
화장실 밖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병헌이 그 병헌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서진을 무슨 무협지 속 전설의 협객처럼 묘사한 모양이었다. 서진은 속으로 안도했다. 그렇다면 한 대 맞았다고 6년의 원한을 넘어 다시 복수전을 벌인다는 식의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 한 우스꽝스러운 광경은 벌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화장실 밖에서 들리는 다음 대사는 그 우스꽝스러운 가능성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 굳이? 알겠어 그럼 적당히 잡아서 시간 끌고 있는다?"
'젠장!'
서진이 화장실 문에 머리를 대고 생각에 빠졌다. 혼자 오겠다는데 굳이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병헌은 중학생이 된 뒤에 더 큰 규모의 일진놀이를 시작했으며, 아마 그 패거리 일부, 혹은 전부를 끌고 온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초등학생 때의 의아한 기억 하나와 자기 주위의 패거리들 중 어느 쪽을 더 믿음직하게 생각할지는 자명했다.
서진은 화장실 밖의 남자가 전화를 끊고 화장실을 나가는 것을 들은 뒤 곧바로 칸막이를 빠져나왔다. 화장실 손잡이를 움켜쥐려던 서진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손잡이가 서진과 술래잡기를 하듯 뒤로 물러나더니 서진 또래의 남학생이 화장실에 들어왔다. 서진은 움찔했다. 서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까 전 전화를 하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면 아마 화장실을 나왔다가 서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들어온 것이리라.
서진이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나고 몸을 숙였다. 겁에 질려 움츠러든 것이었지만 상대방은 그것이 전투 준비 정도로 생각한 것인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서진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재미있는 도박이었다.
서진이 몸을 꼿꼿하게 펴고 화장실을 나갔다. 상대방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평범하게 걸어나가는 모습에 상대방은 뒷걸음질 쳐 자리를 비켰다. 덕분에 서진은 아무하고도 부딪치지 않고 서린과 수영이 있는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서린과 수영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4교시에 돌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영에게 아쉽게도 4교시는 자습이었다. 서진이 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팔을 얹으며 서린과 팔꿈치가 닿게 했다. 서린이 서진의 기억을 읽고 놀라 서진을 바라보았다. 서린이 생각했다.
'어쩌려고?'
'그냥 정색하고 걸어가자. 어차피 쟤네들 우리를 초인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물론 다른 쪽으로 초인은 맞지만. 그냥 가소롭다는 듯 걸으면 문제 없을 것 같아.'
'그리고 애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뒤를 미행해서 집을 알게 되겠지. 그 뒤에 우리가 따로 다닐 때 마주치면 아무것도 못 하고 당하기만 할 테고.'
'글쎄, 솔직히 병헌이가 우리랑 그렇게 원한이 깊다 보긴 힘들지 않아?'
'원한이 깊지 않아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말에 무작정 찾아온다는 거지?'
서린의 생각에 서진이 생각을 멈췄다. 서진의 생각대로 병헌은 서진, 혹은 서린과 원한이 클 여지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싸우다가 기절한 정도인데 기절시킨 것이 심하기는 해도 6년동안 잊을 수 없는 원한으로는 조금 많이 부족함이 있었다. 그렇지만 서린의 생각대로 병헌은 서진과 서린을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서린이 생각했다.
'일단 여기 있으면 안된다는 것에는 동의. 수영이도 위험하고 괜히 기다려서 싸울 필요는 없지. 일어나자.'
서린이 먼저 일어났다.
"4교시는 자습하자. 일이 좀 생겼네. 우리 먼저 돌아갈게."
"응? 어, 응......"
수영의 표정이 빠르게 당황과 실망을 오갔다. 하지만 그 얼굴을 오래 볼 여유는 없었다. 서진은 화장실에서 쌍둥이에 대해 보고했던 보고자를 찾았다. 화장실로 돌아가 서진과 눈이 마주친 것을 보고하기 위해서인지 보고자는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인다. 빨리 내려가자.'
서진이 서린의 손을 잡고 뛰듯이 내려갔다. 서진과 서린이 카페를 나오자 내내 카페 건너편에 앉아있던 지훈이 몸을 일으켰다.
"표정이 왜 그래요? 혹시 누가 괴롭혀요? 아니면......."
"비슷해요. 일단 여기서 빨리 나가요."
지훈이 깜짝 놀라 서린을 따라갔다. 카페골목을 나온 뒤에도 서진과 서린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쌍둥이의 뒤를 계속 밟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집에 도착할 때 까지 쌍둥이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집 앞에 도착한 서린이 걸음을 멈췄다. 혼란스러웠다. 서진에게 병헌이 집주소를 알기 위해 따라올 수도 있다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있을 추적자를 따돌리겠다고 아파트 단지 전체를 빙글빙글 돌았기에 곧 민태가 들어올 시간이었다. 자칫하면 저녁도 못 먹을 가능성도 있었다. 서린은 전화 내용을 들었다는 서진을 의심했다.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서린은 서진의 말이 아닌 서진의 생각을 통째로 읽었다.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린이 이를 갈았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도 없어. 들어가야지 않아?'
서진이 생각했다. 서린은 불안했지만 어쨓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지훈에게 말했다.
"아저씨,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저희는 이만 들어갈게요."
"네? 누가 지금 둘을 괴롭히려고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괜찮겠어요?"
"네, 걱정 안 해도 돼요. 아저씨랑 같이 있는 거 알았으니까 아마 아무도 우리를 안 건드릴 거예요."
서린의 말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5월에 부츠+샌달+점퍼의 조합은 그야말로 두려움 그 자체였다. 지훈은 새 옷을 사는 것은 거부했지만 조합 자체의 힘은 인정하는지 미심쩍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래도 조심해요. 제가 여기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신원을 뒤질 수는 없어요."
지훈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린이 웃었다. 나흘만에 지훈에게 익숙해진 결과였다.
"네. 조심할게요."
※※※※※
조심할 것이 없었다. 방금 전의 다급함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일상적인 지옥이 다시 돌아왔다. 민태는 어린이날이라는 것을 챙기는 것인지, 멍한 얼굴로 서진과 서린을 건드리지 않고 넘어갔다.
"서린아."
방심하고 있던 서린은 갑작스러운 민태의 부름에 몸을 움츠렸다.
"네? 네!"
"너, 요즘 만나는 사람 있니?"
상당히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서린은 이런 식의 사적인 질문을 민태에게 받은 적이 없었다. 거기에 남자친구도 아니고 만나는 사람이라니....... 상당히 낡은 멘트 같다고 생각하며 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학생이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래? 알겠다."
민태가 고개를 대강 끄덕이고 다시 오징어를 뜯었다. 식사와 음주를 마친 민태가 상을 밀어냈다. 서진이 상을 정리했다. 초인종이 울렸다.
"어?"
마지막 문장은 이상했다. 올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선 초인종 소리에 서진이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낡고 흠집 가득한 현관문이 마치 억지로 받은 원치 않은 선물처럼 노래를 부르며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서진이 민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민태는 알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을때 도움을 요청하고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아빠와는 반의어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민태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서진을 바라보더니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전 서린이 친구인데, 혹시 데리고 놀다 와도 될까요?"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 병헌이 패거리들을 이끌고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야말로 어린이날의 최악의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