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린이날의 악연(2)
수영은 서진과 서린이 생각하는 만큼 바보는 아니었고, 서진과 서린의 뒤를 밟은 것은 그저 서린이 없으니 공부하기가 싫다는 이유만으로 저지른 짓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수영은 서진과 서린을 따라가는 지훈을 끝까지 지켜봤고, 지훈이 위험한 남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서린은 지훈과 함께 있는 내내 불안해 보였고, 그렇지 않다 해도 지훈은 그다지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지훈이 서진과 서린이 집에 들어간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아파트 주위를 맴도는 것을 본 이상 수영은 결심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수영은 친구의 위험을 보고만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
지훈은 자신을 바라보는 수영을 발견했지만 굳이 신경쓰지는 않았다. 수영은 서진의 친구다. 서진에게 이미 들은 적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 10분이 넘어가자 지훈은 불안함을 느꼈다.
"무슨 문제가 있나?"
지훈이 수영 방향으로 몸을 돌리자 수영이 급하게 몸을 숨겼다. 지훈이 수영에게 다가갔다. 도움이 필요하면 돕고, 오해를 하고 있으면 풀 생각이었다. 수영은 지훈이 다가가는 소리가 들리자 반대 방향으로 죽어라 달리며 외치기 시작했다.
"사람살려! 경찰아저씨 여기에요!"
"이런 씨......!"
경찰 둘이 지훈을 바라보며 달려오고 있었다. 지훈이 몸을 돌려 달아났다. 지훈이 있던 자리에는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대신 샌달 하나가 떨어져 주인 잃은 서러움에 빠졌다. 그 서러움이 너무 커 30분 뒤 아파트에 들어가는 십여명의 중학생을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서진과 서린은 병헌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서린이 긴장한 듯 몸을 떨자 서진이 서린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서린의 강렬한 생각이 서진의 머리를 강타했다.
'손을 잡지 말고 날 가려야지! 갑자기 손을 잡으면 수상해 보이니깐 몸으로 가리는 척 접촉할 수 있게 떠는 척 하는데 그걸 눈치 못 채니?'
서진은 재빨리 서린의 손을 놓고 서린을 자신의 등 뒤로 오도록 했다. 서린이 서진의 어깨를 짚는 척 목에 손가락 하나를 붙였다. 서린은 냉정한 듯 생각하고 있었지만 신경질적인 정신적 고함 안에 숨기고 싶어하는 두려움이 삐져나와 있었다. 하지만 서진은 두려움을 숨길 신경질적인 정신적 고함조차 제대로 내뿜지 못하고 있었기에 큰 도움은 되지 않고 있었다. 서진은 떨리는 손을 움켜쥐고 병헌을 바라보았다. 병헌은 서진을 쳐다보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야, 서진이, 서린이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아, 아버님이랑은 초면이었네. 집에서 들은 거랑 다르게 친절하시더라?"
서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민태가 병헌에게라고 갑자기 친절을 발휘할 리가 없었다. 물론 민태가 병헌을 본 적도 없고, 봤더라도 그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얼굴을 기억할 리가 없었지만 그렇다 해도 서진이 아는 민태라면 욕설과 함께 꺼지라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쌍둥이에게 화풀이를 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서진은 맞는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 새로운 상처를 얻는 것이 서진의 예상된 앞일이었다.
그리고 서진의 예상은 그야말로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틀렸다. 민태는 물건을 던지지도 않았고, 욕도 하지 않고,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민태는 그저 병헌과 패거리들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것이 전부였다. 결국 서진과 서린은 끌려가다시피 하며 아파트 밖으로 나와야 했다.
병헌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인 서진의 시선이 병헌의 다리를 향했다. 병헌 역시 적잖이 긴장하고 있는지 잔인한 미소와는 다르게 다리를 심하게 떨고 있었다. 서린 역시 같은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용기가 생긴 서진이 병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그래, 반갑네. 그런데 오늘은 좀 늦어서. 놀러 나가기엔 좀 늦지 않아?"
"걱정 마. 저 앞 놀이터에서 놀 거니깐."
병헌은 신이 나 못 견디겠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린이 다른 패거리들을 바라보았다. 담배 냄새가 지독했다. 13명의 아이들은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워 서진과 서린에게 하여금 폐소공포증을 유발했다. 1층에 도달한 서진이 지훈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지훈이 있던 자리에 떨어진 지훈의 샌달을 발견한 서진은 샌달의 신데렐라가 무슨 일을 겪고 있을지 상상했지만 무엇 하나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
지훈은 경찰과 함께 다이나믹한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기에 도저히 쌍둥이를 도울 수가 없었다.
"나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러면 걸음을 멈춰요!"
"근데 경찰에 잡히면 안 돼요!!!"
지훈과 경찰은 온 동네가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며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지훈의 목소리가 쌍둥이나, 병헌네 패거리에게 들리지 않은 것은 지훈이 동네 밖으로까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찰들은 지원을 받아 다섯으로 늘어났고, 마침내 지훈을 포위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지훈은 나무를 밟고 올라가 담을 넘어가 경찰들로 하여금 원숭이의 능력을 지닌 증인을 상대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경찰들을 따돌린 지훈이 담에 등을 기대고 잠시 숨을 골랐다.
"후, 허허...... 이젠 어쩌지?"
경찰들이 욕지거리와 함께 다시 담을 넘어가려는 소리가 들리자 지훈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
쌍둥이네 집 앞 놀이터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지만 특이하게도 아파트가 모두 놀이터를 등지고 있었기에 상당히 외진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그러한 특징은 부모들로 하여금 아이들이 놀지 못하게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자연스럽게 불량배 소굴 정도로 변형되었다. 그렇기에 병헌이 놀이터에 가자고 말했을 때 서진은 그곳에서 어린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고, 그 부모가 아이들을 돌보느라 놀이터 옆 정자에 앉아있어 병헌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그런 이상적인 상황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병헌이 서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요즘 뭐 하고 지내냐?"
병헌이 먹잇감을 완전히 붙잡아 놓고 식사를 준비하는 포식자의 여유를 부리는 것을 보며 서진은 만약 이대로 화기애애하게 일상 이야기를 한다면 과연 언제쯤부터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렇기에 서진과 서린은 최대한 병헌이 연관될 여지가 있는 옛날 이야기는 피하리라 결정했다. 서진이 말했다.
"그냥, 학교 다니고 자고. 밥 먹고. 특별한 건 없네. 사실 이 시간에 밖에 나와있는 것도 오랜만이야. 통금이 엄하거든. 넌 어때? 잘 지냈어?"
자연스럽지 않다고 느낀 것인지, 자연스럽다고 느낀 것인지 패거리들 중 몇몇이 낄낄대기 시작했다. 한 명은 담배를 문 채 숨 넘어갈 듯 웃다가 숨을 너무 깊게 들이쉬고 진짜로 숨이 넘어가려 했다. 서린이 정자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
"아, 그래. 넌 앉아. 난 서 있어도 돼."
"야, 그런게 어딨냐? 앉을거면 다 앉아야지. 너도 다리 아파 보이는데?"
서진이 여전히 가볍게 떨리는 병헌의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웃음이 멎었다.
서진은 당황했다.
결국 병헌이 진짜로 옛날 이야기나 하려고 찾아온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일이 시작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병헌의 주먹에 뺨을 맞은 서진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병헌을 올려다보았다. 병헌의 눈에 분노와 살기가 가득했다.
"아프지. 몇 년 전인가 어떤 미친 연놈들이 무슨 짓을 해서 아직까지 다리가 이 모양이거든."
뜨겁던 볼이 싸늘해졌다. 서진은 이제 병헌이 쌍둥이를 쫓아온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오늘의 만남이 결코 쉽게 마무리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린이 뒷걸음질치자 서린의 등 뒤에 있던 패거리 둘이 서린의 양 팔을 붙잡았다. 병헌이 서진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 오늘 너희 둘 다 다리병신으로 만들어야 보내줄 테니깐."
병헌이 다시 한 번 서진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볼을 맞은 서진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놀라서 그렇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맞고만 있으면 끝날 것 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서진이 주먹을 맞고도 오히려 눈이 반짝이자 화가 난 병헌이 서진의 코를 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서진이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얼얼했지만 예상치 못한 반격에 병헌의 당황이 더 컸다. 서진은 서린과 다르게 붙잡는 것도, 때리는 것도 병헌 혼자 전담하고 있었던지라 자연스럽게 손도 풀렸다. 서진이 서린에게 뛰어들었다. 서린과 몸이 닿자 서진의 몸에 가벼운 전기가 흘러 깜짝 놀란 패거리들이 서린의 몸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좀 강한 정전기 정도로 생각한 것인지 당황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와, 정전기 오졌다."
"운이 좋네."
패거리들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서진과 서린을 둘러쌌다. 서진이 뒤를 잡히지 않게 미끄럼틀을 등지고 패거리들을 노려보았다. 서린이 다시 서진의 뒤에 숨어서 생각했다.
'빠져나온 것 까지는 좋은데...... 능력을 쓰지 않고는 어떻게 안 되겠지?'
'쓰면 누가 죽을지도 모르고.'
서진이 병헌을 바라보며 생각으로 동의했다. 병헌이 착각한 것 처럼 신체적인 능력과 관련된 증인이라면 엄청 센 일반인 정도로라도 위장할 수 있겠지만 서진과 서린이 할 수 있는 가장 일반인적인 것은 해봐야 몸이 닿을 때마다 진저리 쳐지는 정전기가 반드시 나와버리거나 손대기도 힘들 만큼의 고열이 나오는, 역시 의심할 수 밖에 없는방법 뿐이었다. 서진과 서린이 미끄럼틀 위로 올라갔다.
"죽여!"
손을 부여잡고 있던 병헌의 외침에 패거리 중 하나가 미끄럼틀을 뛰어올라갔다. 서진이 몸을 크게 앞으로 뺐다가 서린이 잡아당겨 뒤로 밀려났다. 서진이 공격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미끄럼틀을 다 올라가기도 전에 주먹을 휘두른 뒤 균형을 잃고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에 다른 패거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서진은 웃을 수가 없었다. 날아오는 돌에 몸을 숙여야 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맞으면 자칫 응급실을 건너뛰고 영안실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 규모의 크기와 속도의 돌에 서린이 외쳤다.
"그만 해! 진짜 죽는다고!"
서린의 고함에 서린을 돌아보던 서진이 뒷통수에 돌을 맞고 신음했다.
"서진아!"
서린이 서진의 뒷통수를 손으로 가렸다. 서린의 손등에 돌이 몇 차례 더 날아갔다. 서린이 입술을 깨물고 비명을 참았지만 서진은 서린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서진은 빠져나올 방법을 찾아 주위를 둘러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를 않았다.
밤이 더 늦어지자 가로등이 켜졌다.
서진의 그림자가 뚜렷해졌다.
서진의 그림자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갔다.
패거리도, 서진도, 서린도 서진의 그림자에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한 것을 깨달은 것은 고함소리와 타격음이 끊이지 않으면서도 날아오는 돌이 멈췄을 때였다. 서진이 천천히 미끄럼틀 사이로 고개를 들었다.
병헌과 패거리들이 서로 패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뭐야?'
장난 치는 것이 아니었다. 서진을 내려오게 하기 위해 연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병헌이 다리를 절면서도 뛰어가 주먹만한 돌로 다른 패거리의 이마를 찍었고, 상처에서 피가 쏟아졌다. 피를 본 서린의 얼굴이 파래졌다. 상대방이 쓰러졌음에도 병헌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죽어! 죽어! 죽어!"
'그만해!'
소리를 지르려던 서린은 자신이 마음 속으로 외쳤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소리쳤다.
"그만해!"
서진이 팔을 뻗었다. 서진의 손에서 전기가 뿜어져 나와 병헌의 손을 때렸다. 병헌이 전기에 감전되어 돌을 떨어뜨리고 무릎을 꿇었다. 서린의 외침과 서진의 공격에 병헌을 포함해 쓰러지지 않은 패거리들이 싸움을 멈추고 쌍둥이를 바라보았다.
"왜"
"멈"
"추"
"라"
"하"
"는"
"거"
"지?"
서진은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왼쪽부터 한 명당 한 글자씩 말해 문장을 완성시켰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 시간 간격이 없어 한 사람이 말하는 듯 했지만 각각의 목소리가 달라 상당히 소름돋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서진이 말했다.
"너, 너희들 뭐야?"
"왜"
"멈"
"추"
"라"
"는"
"거"
"냐"
"니"
"깐?"
"내"
"가"
"먼"
"저"
"물"
"었"
"다."
서진이 귀를 막았다. 정말 다시는 듣고싶지 않은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말을 거는 것 조차 두려웠다. 서진이 귀를 막고 말했다.
"이유를 뭘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당연히 돌로 사람 머리를 깨면 안 되는 거잖아. 갑자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얘"
"도"
"네"
"머"
"리"
"에"
"돌"
"을"
"던"
"졌"
"어."
병헌이 손가락을 들어 방금 전까지 깨고 있던 머리를 가리켰다. 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공포감에 눈물이 나왔다.
"한 명씩 말해! 무서워!"
"그래."
병헌이 앞으로 나왔다. 서진은 망설였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하는 거지? 아니,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무슨 질문을 해야 이 의문이 해소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질문의 제한시간이 끝났다. 그림자가 다시 모여들어 서진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서진도 그림자의 움직임을 발견했다. 꿈틀거리고 질척거리는 기이한 그림자는 꿈 속의 여인이 나오기 전 나타나는 웅덩이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서진은 뒷걸음질 쳤지만 그림자가 먼저 빠른 속도로 서진을 덮쳤다. 서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린은 눈을 떴다. 그림자는 서진의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서진이 온 몸으로 물을 흡수하려는 것 같았다. 서린이 서진을 붙잡았다. 서진이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의 긴장, 두려움.
서진은 그림자에 손을 댔다.
강렬한 감정의 폭발에 서진은 시끄러움을 느꼈다. 서진이 귀를 막았다.
어린 아이의 등 뒤로 장난감을 숨기고 아이가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는 마음, 공을 던지는 시늉만 하고 숨긴 뒤 어리둥절해 하는 것을 보는 마음, 자는 아이의 등에 포스트잇으로 낯 뜨거운 낙서를 붙인 뒤 알 수 없는 주변의 반응에 당황하는 동급생을 보는 마음. 서진이 멍하니 말했다.
"그림자가...... 웃고 있어. 장난치고 있어."
서진의 팔이 크게 떨렸다. 병헌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뭐야!"
병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감전당해서일까, 놀라서일까? 서진은 후자이길 간절히 바랐다. 병헌이 바닥에 쓰러진 채 3분 전만 해도 눈에 불을 켜고 부수려 했던 머리를 잡고 비명을 질렀다. 머리가 깨진 인형이나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물체는 생명이 사라진 듯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살려줘요! 살려줘!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
병헌의 외침에 서린이 서진을 잡아당겼다.
'우리도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자. 소란에 끼어들어봐야 좋을 것 없지.'
'뭐? 여기서 도망쳐 봐야 쟤가.......'
서진이 병헌을 가리키고 생각했지만 서린의 생각은 달랐다.
'쟨 우리 신고 못해. 쟤가 먼저 우릴 때렸고, 여기 벌어진 일도 자기들끼리 싸운 거잖아. 그리고 두 번이나 이런 일을 겪었으면 무서워서라도 신고 못 해. 그리고 우리가 쟤를 도와야 할 이유는? 우리는 피해자야. 우린 방금 전 일어난 그 그림자부터 생각하는게 중요하지 않겠어?'
서진은 서린의 생각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서진과 서린은 조용히 미끄럼틀에서 내려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병헌과 패거리들을 두고 도망쳤다.
*****
수영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무사히 집으로 도착했다.
"자, 많이 무서웠겠구나. 걱정 마렴, 아저씨 동료들이 꼭 그 무서운 사람을 잡을게."
강해 보이면서도 선한, 전형적인 좋은 경찰의 얼굴에 수영의 마음이 놓였다.
"고마워요. 혹시 엄마가 알면 혼날 테니 엘리베이터는 혼자 올라가면 안 될까요?"
"그건 안 돼. 집에 무사히 들어가는 걸 보는 것 까지가 내 의무야."
"제발요, 네? 공부하러 나간다 하고 왔단 말예요. 그리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중간에 수상한 사람을 봐서 쫓아간 거예요. 착한 일 하고 혼나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걱정 마. 아저씨가 네가 공부 열심히 하다가 중간에 정의롭게 나섰다고 말해줄게. 그러면 됐지?"
"아저씨, 아저씨가 우리 엄마라면 그 말을 믿겠어요?"
"그건 아니지."
"그럼 제가 아저씨랑 들어가면 칭찬받을까요, 욕만 바가지로 먹고 쫓겨날까요?"
"욕만 바가지로 먹고 쫓겨나겠지?"
"그럼 여기서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요? 욕만 바가지로 먹고 쫓겨나면 아저씨가 다시 데려다줘야 하잖아요. 아님...... 그냥 혼자 올라가면 안 될까요?"
단호한 경찰의 벽이 수영의 설득에 서서히 무너지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 대신 바로 들어가야된다. 꼭이야!"
"넵!"
수영은 경찰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리고 경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다시 서진의 집으로 뛰어갔다. 수영은 지훈이 문제의 스토커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맞을 수도 있지만 그냥 감이 그랬다. 그렇게 수영은 서진과 서린이 미끄럼틀 위에서 치열한 공성전을 벌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
"뭐야......"
수영은 서진과 서린을 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공격 측의 수가 너무 많고, 작정하고 돌을 던지고 있었다. 수영이 폰을 꺼내고 앞으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또다시 경찰에게 신고하고 소리라도 질러 서린을 구하려는 찰나 이번에는 공격대 내에서 내전이 벌어졌다. 수영은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주먹보다 큰 돌로 상대방을 죽일 기세로 머리를 깨트리는 것은 중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보는 것 만으로도 너무 끔찍한 폭력이었다.
휴대폰이 떨어지는 순간 우연이었는지 공격대 중 하나가 수영을 바라보았다. 수영은 몸을 숙였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저 수영과 자신 사이에 있는 상대를 열심히 때려부술 뿐이었다. 수영은 더 이상 그 자리를 참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반대 방향으로 쉼 없이 전력으로 달리던 수영은 결국 숨이 막혀 바닥에 쓰러졌다. 공포가 막은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들며 비명이 새어나오려 했다. 하지만 비명 대신 웃음이 먼저 나와 비명을 틀어막았다.
"하, 하하하하....... 이것도 친구라고."
허탈하게 웃으며 숨을 고르던 수영은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 수영의 눈 검은자에서 붉은 것이 흘러나와 흰자를 덮었다. 곧, 흰자 전부가 피처럼 붉은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
집에 돌아온 서진과 서린은 민태는 까맣게 잊고 있었기에 문을 세게 닫았다가 밥상 밑에 얼굴을 집어넣고 쓰러져 잠든 민태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민태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아마 꽤나 피곤했으려니 생각한 서진의 옷자락을 잡아당긴 서린이 민태가 마신 걸로 추정되는 십여 병의 술병을 가리켰다. 민태 치고도 어마어마한 음주량이었다. 서진이 조용히 상을 치우고 서린이 술병을 정리했다. 서진이 상을 치우자 민태가 조용히 신음했다.
"서린아......"
서진이 상을 들고 잠시 멈춰 민태를 내려다보았다.
저런 것도 자기 자식을 사랑할까?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에 고민하기를 오래 전에 포기한 서진이 깊게 고민하지 않고 상을 치웠다. 서진도, 서린도 민태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한 편으로는 민태가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을까 두려워 민태의 생각조차 읽지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아니다.
서진이 고개를 저어 잡념을 지우고 설거지를 마쳤다. 방에 들어가자 서린이 옷을 다 갈아입고 잘 준비를 마친 뒤였다. 서린이 말했다.
"준비됐어?"
주어가 빠진 질문이지만 주어야 아마 문제의 그림자일 것을 아는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잘 준비만 끝내고."
서린이 뒤돌아 앉고 서진이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두려움과 호기심 속에서 환복을 마친 서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서린이 바닥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서린아?"
서진이 서린에게 팔을 뻗다가 멈칫했다.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당황에서 팔을 흔든 서진은 팔 또한 중간에 멈춰 굳어버린 것을 알고 패닉에 빠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서진도 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그렇게 그들의 어린이날이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