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파국으로의 첫걸음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달란트 비유.>
서진은 낡은 아파트에 앉아 있었다. 서진보다 먼저 머물러 있던 거미가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침략자를 원망하려는 듯 서진의 머리 위에 거미줄을 타고 내려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힘차게 꿈틀거렸다. 서진은 팔을 휘둘러 거미를 쫓아내려다가 그 팔이 원래 자신의 것보다 작음을 깨달았다.
"또 꿈이구나."
그런데 뭔가 잊고 있는 기분인데?
서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거미가 거미줄을 타고 서진의 주위를 크게 돌았다. 서진은 방을 둘러보았다. 창문 뿐 아니라 문 까지 없는 완벽히 폐쇄된 공간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가 아파트라고 생각했지?
"서진아?"
서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귀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현실 공간에서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한 도움으로 서진을 당황시키더니 여기서는 또 다시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한 데시벨의 목소리로 서진을 고통스럽게 했다.
그런데 왜 그 그림자와 이 꿈이 같은 원인으로 일어난다 생각하는 거지?
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은 거미의 원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서진아."
서진이 다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서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에서 피가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피가 거미의 원과 같은 크기의 원을 바닥에 그리며 흘러갔다. 피는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며 바닥을 깎아나갔다. 바닥이 깎이고 서진이 같힌 원이 아닌 모든 나머지가 무너져내렸다. 서진은 50미터가 넘는 원통 위에 올라서 있는 꼴이 되었다. 서진의 추측대로 이곳은 아파트가 맞았다.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사방이 어두운 핏빛 하늘이었고, 박쥐들이 서진의 주위를 거칠게 날아다녔다. 서진이 바람에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서진이 무릎을 꿇자 하늘에서 무언가가 내려왔다.
서진은 눈을 감았다. 박쥐들을 계단삼아 내려오는 두 매끄러운 다리는 서진의 악몽 속의 가장 두려운 두 기둥이었다. 다리는 마치 패션쇼의 런웨이를 하듯 소리 없이 우아하게 박쥐들을 밟고 내려왔다. 서진은 또다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면 꿈에서 깨어날 것임을 직감하고, 눈을 감은 채 외쳤다.
"당신 누구야! 왜 날 돕는거지? 그리고 꿈 속에서는 왜 나를 괴롭히는 거지?"
발걸음이 멈췄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꿈 속에서의 서진은 발걸음이 멈춤을 느꼈다. 서진이 외쳤다.
"왜? 당신 누구야! 날 도우려는 거야, 죽이려는 거야!"
"서진아."
서진이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서진은 여자의 목소리가 두려웠다. 여자가 한 마디라도 더 할까봐 무섭고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서진이 고개를 숙인 채 귀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시야가 붉은 것이 눈이 터진 것 같았다. 귀에서 역시 피가 흘러나왔다. 여자가 말했다.
"서진아, 살아남아라. 날 위해. 강해져라. 날 위해. 성공해라. 날 위해. 여기서 벗어나라. 날 위해. 내가 널 도와주겠다."
서진은 잠에서 깨어났다.
*****
서진의 비명은 언제나 서린의 알람이었다. 서진이 깨어나자 서린도 잠에서 깨어났다. 눈부신 빛이 서진의 눈을 비추며 마음을 달래 주었다.
서린은 "또 그 꿈이야?" 같은 진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서린은 멍하니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서진 대신 이불을 정리하려다가 자신들이 어제 어떻게 잠들었는지 깨닫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진아, 우리 어제......"
"응. 너, 갑자기 쓰러졌어."
서진이 서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진의 어젯밤, 그리고 꿈의 기억이 서린에게 들어왔다. 서린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니깐, 넌 그림자가 악몽의 원인이고, 어제의 사건의 원인이기도 하다 생각하는거지?"
"응."
서린은 서진의 손을 잡은 채로 서진의 그림자를 붙잡았다. 그렇지만 그림자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정보도 보내주지 않았다. 그림자가 어제의 충격적인 괴수 대신에 모든 인간이 다 가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변해버린 것을 확인한 서린이 자신의 머리를 짜증스럽게 헝클었다.
"갔네."
"응. 갔네."
서진도 서린의 생각을 읽고 그림자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그림자가 뻔히 보이는데 그림자가 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서진과 서린은 중요한 비밀을 밝혀낼 수 있는 다시 없을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학교에 갈 시간이다.
*****
아파트를 나온 서진과 서린은 경찰들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하지만 경찰들은 쌍둥이와 놀이터에서 벌어진 폭력사건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없었고, 쌍둥이가 놀이터에 고개를 뻗어도 다가가지 못하게만 할 뿐 크게 제지하지는 않았다. 서진이 겁에 질려 비틀거리는 척 땅에 손을 짚었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지훈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서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서진에게는 없는 사람을 소환하는 능력까지는 없었다.
"일단 학교나 가자. 엄마라도 만나러 갔나 보지."
서린이 긍정적인 소망을 제시해 보았다. 서진은 전망과 소망의 차이를 잘 알고는 있었다. 지훈은 지금까지 다양한 이유를 대며 엄마의 이야기를 피해 왔고, 서진은 기억을 읽어 지훈 역시 아는 것이 없고, 연락조차 없음을 알고 있었다. 지훈이 선의로 자신들을 돕는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지훈은 수영이 아닌 쌍둥이의 신고로 경찰에 쫓겼으리라. 그렇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서린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학교에 도착했다.
서진은 왼쪽의 남학생 반이 있는 복도로, 서린은 반대 방향으로 들어갔다. 교실에 앉은 서진은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땅에 붙은 그림자는 당연하게도 서진을 따라 서진을 바라보았다. 서진은 그 그림자의 모습이 소름끼친다고 생각했다.
이상하다.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평범한 수업, 평범한 학생들. 학생들은 여느 때처럼 서진을 신경쓰지 않고, 수업조차 거의 무시하며 자기들끼리 모여 시시덕대고 있었다. 별로 특이할 건 없었다.
이상하다.
서진은 수영이 있어야 할 자리를 바라보았다. 수영은 피로한 듯 고개를 숙이고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서진이 수영의 이름을 부르며 손가락으로 찔렀다. 별 생각 없는 부름이었기에 서진은 수영이 화들짝 놀라 서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야....... 수영아, 뭐 하냐."
서진이 숨 막히는 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당황한 수영이 서진의 옷깃을 놓고 자신의 뺨을 세게 때렸다. 마치 서진 대신 복수라도 하려는 듯 강렬한 소리에 서진은 질려버렸다.
"아, 미안....... 오늘 신경이 좀 예민한가봐. 왜 그랬지?"
수영의 양 볼에 커다란 손자국이 생겨났다. 당황하기는 했지만 크게 화를 낼 생각은 없었기에 서진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그래 보이네. 쉬어라 좀."
"야, 너네! 거기 왜 그리 떠드냐!"
교탁에서 들리는 고함에 수영이 재빨리 고개를 숙여 자는 척 했다. 안 그래도 말 안 들어먹는 학생들의 모습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수학 선생은 수영과 서진을 회초리로 가리키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어린이날에 푹 쉬었으면 됐지, 기운이 남아돌아서 이거면 다음 체육 때 운동장 열 바퀴씩 돌리고 시작할까?"
수학 선생의 말에 짜증 섞인 탄식이 서진과 수영을 저격했다. 수영과 서진은 성의없이 죄송하다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상하다.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수영은 어제 서진, 서린과 함께 그룹 스터디를 했다. 그리고 병헌과 그 패거리 때문에 수영은 영문도 모른 채 중간에 혼자 남겨져야 했다. 상식적으로 다음 날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거나, 최소한 궁금해 해야 했음에도 수영은 오히려 서진을 피하려는 듯 민감한 반응만을 보였다.
즉 수영은 어제 서진이 겪은 일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진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어디까지 본 거지? 운이 좋다면 그저 집단 따돌림 현장만 봤을수도 있었지만 최악의 경우 모두 다 봤을 수도 있었다. 아니, 서진은 수영이 어젯 밤에 있었던 일을 모두 보았으리라 확신했다. 수영은 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수영이라면 단순히 집단 폭행이라면 끼어들어 구해주지는 않더라도 소리라도 질러 줬을 텐데 서진과 서린이 수영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것은 아마도 누구라도 겁에 질려 도망쳤을 그 참사를 보았기 때문이리라.
확신이 생기자 오히려 서진은 약간 차분해진것을 느꼈다. 서진은 손깍지를 끼우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수영이 서진이 증인임을 알게 되었다면, 그리고 어젯 밤 현장에 있었다면 그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무엇일까?
어쩌면 수영이 돈을 위해 적안(赤眼)같이 증인들을 납치하는 증인 사냥꾼 조직에 서진을 팔아먹을지도 모른다. 서진은 곧바로 가장 어처구니없는 가능성을 제거했다. 입이 싼 녀석이라면 소문을 함부로 퍼뜨리다가 일이 터질지도 모르지만 수영의 반응을 보면 이 일이 재밌게 풀 이야기와는 거리가 굉장히 멀다는 것을 아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면...... 해봐야 서먹해지는 정도가 끝인가?'
결론을 내린 서진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해결책이 없는 문제인 대신 큰 문제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신경도, 언급도 않는 것이 가장 정답에 가까우리라. 서진은 찜찜한 결론을 내리고 자리에 엎드렸다.
*****
서린은 의문이 너무 많아 사물함 속에 교과서가 찢어진 것도 모르고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가지고 있는 단서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은 그림자와 꿈을 조종하는 증인이 6년간 자신들의 주위를 맴돌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결론조치 무가치한 개소리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깨달은 서린은 곧 고민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생각해봐야 소용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생각해봐야 소용없는 일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미련 없이 매달린 손을 놓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서린이 다시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야."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서린이 고개를 돌렸다. 진한 화장과 향수로 담배를 숨긴 여학생 하나가 서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린이 여학생의 무언가를 집어넣어 위화감이 느껴지는 가슴에 붙은 명찰을 읽었다.
"어, 그래. 승희야. 왜?"
승희는 서린의 책상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서린은 허물없이 친하기는커녕 10초 전만 해도 이름도 몰랐던 상대방의 놀라운 친화력에 감탄하며 듣게 될 말을 기다렸다. 승희는 무언가를 말했다. 그 것은 "어뭐어." 정도의 웅얼거림으로 서린으로서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뭐라고?"
승희는 서린의 귀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다시 까칠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뭐어. 귀머냐?"
서린은 잠시 자신이 꿈을 꾸는 중인 것과, 바벨탑이 또다시 건설되려 한 것 중 어떤 것이 이 기이한 현상의 원인일지 생각해 보았다. 고민에 빠진 서린을 위해 승희는 친절하게 답을 알려주었다. 서린은 눈썹에 달라붙은 껌에 손을 가져다대며 승희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제 뭐 했냐고. 귀 먹었냐?"
"아."
서린이 건조하게 대답하고 껌을 떼어냈다.
"어제 쉬었지. 공부도 좀 하고."
"하!"
서린은 승희의 비웃음을 뒤로 한 채 눈썹에 붙은 껌들을 모아 휴지에 싸서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야, 너 거짓말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똑바로 말하라고."
승희가 서린에게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진짠데. 서진이랑, 수영이랑 카페서 공부하다가 집 들어갔는데. 아니면 내가 아침에 언제 일어나 뭘 먹었는지부터 언제 잠들었는지까지 죄대 읊어줬으면 좋겠어?"
승희는 잠시 읊는다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멈칫했다. 하지만 곧 상대방의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안전하게 무지를 숨기는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읊어봐."
"기억 안나."
서린의 대답에 화가 난 승희가 혀를 차고 서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야, 장난해? 장난해? 말 걸어주니깐 친구같아? 기억나게 해줄까?"
서린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놀이터의 일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 일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서린은 또 다시 도발성 발언을 선택했다.
"그래, 좀 도와줄래? 네가 듣고 싶은 말이 뭔지 힌트를 주면 내가 거기 맞춰서 답을 찾아볼게."
서린의 말에 승희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즐겁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반 전체에 서린이 바보같은 소리로 자신을 도발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기에 제대로 웃을 필요는 없었다.
"야, 그래. 이거 봐라."
승희가 휴대폰을 꺼내 서린에게 내밀었다. 바탕화면에 승희를 껴안고 있는 남자가 서린의 눈에 익숙했다. 어제의 병헌 패거리 중 하나였다.
"우리 오빠가 어제 널 봤다고 하고 연락이 안 되거든? 너 무슨 짓 했냐?"
서린은 눈을 비벼 남은 껌조각들을 전부 긁어냈다. 답답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동작에 승희는 마음 속의 폭력적인 본성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정리를 끝마친 서린이 대답했다.
"아마 병원 아니면 경찰서에 있을 걸? 패싸움을 거하게 하는 걸 봤거든."
당황한 승희의 표정을 본 서린은 승희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확신했다.
"그,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왠 패싸움?"
"계속 대답해주니 내가 친구로 보이니? 셜렁 친해지고 싶다 해도 난 천천히 우정을 쌓아 나가는 게 더 좋아. 그러니 오늘 대화는 이쯤 할래?"
서린이 대화를 끊고 자리에 엎드렸다. 잠시 멍하니 서린의 말을 곱씹던 승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서린의 고개가 빠르게 올라갔다. 승희가 서린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야, 야!"
승희가 고함을 지르며 서린의 머리를 흔들자 서린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서린의 시점이 위아래로 빠르게 바뀌었다. 승희, 바닥, 승희, 바닥, 승희, 놀란 아이들, 승희. 서린은 힘으로 이 정신없는 바이킹을 빠져나올 수는 없다고 확신했다. 서린은 승희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승희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자마자 턱에, 그리고 가슴에 동시에 서린의 주먹이 들어갔다. 승희가 두 걸음 더 비켜났다. 서린은 승희에게 달려들어 배를 무릎으로 찍었다. 승희가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서린은 손을 터는 시늉을 하고 다시 자리에 엎어졌다. 서린의 화려한 폭행에 교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서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기억을 읽는 방식으로만 배운 싸움 기술이었지만 동작만이 조금 어설플 뿐, 확실하게 통했다. 하지만 서린의 얼굴에 단풍이 물든 것은 기쁨 때문이 아니었다. 서린은 처음으로 저질러 본 폭력에 자신의 마음 속 어딘가가 얼굴의 단풍과 함께 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서린은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일어난 승희가 복수전을 한다고 무방비상태의 서린을 공격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었지만 승희는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린을 올려다볼 뿐 아무런 2차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서린이 승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승희는 처음엔 서린이 또다시 주먹질을 한다고 생각해 움찔했다가 멍하니 서린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서린의 손을 밀고 혼자서 일어났다. 서린이 가볍게 입을 삐죽대고 말했다.
"미안한데 나도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나도 그것 때문에 당황해서 신경이 예민하거든. 나중에 무슨 일인지 알게 되면 먼저 알려줄게. 알겠지?"
서린이 정중하게 선을 그었다. 승희가 멍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이자 서린이 형식적인 미소를 짓고 다시 자리에 앉아 엎드렸다. 서린의 눈이 가려지자 뒤늦게 승희의 친구들이 승희에게 다가갔다.
"승희야 괜찮아?"
"헐, 여기 멍 든 것 좀 봐."
"와, 얜 정말 생각 없는 거 아냐? 기분이 좀 상했다고 주먹질을 해?"
"그러니깐. 우리 승희도 남자친구가 연락이 안 돼서 얼마나 짜증나는데."
마지막 두 문장은 서린 뿐 아니라 승희까지도 저격하는 것이라 생각할 여지가 있었지만 키가 작으면 피할 수 있는 함정이 있듯, 생각이 작아서 피할 수 있는 저격도 있었다. 친구들의 위로를 받은 승희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교실을 나갔다. 서린은 다시 찾아온 침묵에 만족하며 잠들었다.
*****
지훈은 완전히 다른 동네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 있었다. 경찰을 따돌린 지훈은 이제 새로운 적수를 맞이해야 했다. 그 적수의 이름은 아파트 단지였다.
"여기가 어디냐......."
지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사방을 둘러봤지만 익숙한 풍경이라고는 자신의 옷차림에 눈을 찌푸리는 사람들의 모습 뿐이었다. 고민 끝에 지훈은 결론을 내렸다. 서둘러 서진과 서린을 찾으러 가는 것은 어차피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훈이 경찰이라면 분명 처음 지훈을 만난 곳에서 기다릴 것이라 생각했고, 수영이 지훈을 신고한 것이 맞다면 서진과 서린의 주위에서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역시, 창문을 타고 올라가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멍청하고 미친 짓, 혹은 어제 하루 종일의 추격전을 통해 지훈의 엄청난 잠재력을 본 경찰들에게는 멍청하고가 빠진 그냥 미친 짓을 구상하고 있던 지훈과 쌍둥이에게는 다행히도 지훈에게 새로운 경우의 수가 생겨났다.
"지훈 씨. 그동안 잘 지냈어요?"
두 번째로 듣는 목소리에 지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쌍둥이의 엄마, 수정이 지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수정 씨. 오랜만입니다.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해 놓고 어떻게 연락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질 않았더라고요. 일단은 아이들과 같이 지내면서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지훈의 말에 수정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제가 돈도 보내드렸는데 아직 옷도 안 사신 건가요?"
"아, 예. 부탁받은 일이 끝나기 전에 받은 돈을 써버렸다가 부족한 일이 생기면 곤란하니까요."
"그것까지 감안해서 드린 건데....... 아무튼 이젠 다 끝났으니 괜찮은 옷 사서 입으세요."
"끝났다니요?"
수정의 말에 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지훈은 수정의 가늘지만 거친 손가락이 심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괜찮으세요?"
지훈의 물음에 수정은 자신이 손을 떠는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 듯 손을 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해야겠죠."
수정은 잠시 말을 멈췄다. 지훈은 재촉할까 하다가 점잖게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심호흡을 하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수정이 입을 열었다. 침착하려 했지만 도저히 새어나오는 웃음을 지울 수 없는 듯 행복한 얼굴이었다.
"이제, 이제 아이들을 데려갈 수 있게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