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눈을 떴을 땐, 난 아까 잠시 쉬었던 벤치에 앉아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관람차 안에서 창문이 깨지고, 기구가 추락하는 일까지 벌어졌었다. 하지만 눈을 떠보니 다른 장소에 앉아있다. 난 지금의 상황과 똑같은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약 일주일 전, 나는 트럭에 부딪힐 뻔 했었다. 하지만 눈을 떠보니 집이었다. 이번에도 상황은 같았다. 나는 놀이기구와 함께 떨어졌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번과 마찬가지로 눈을 떠보니 지금의 벤치에 앉아있다. 도대체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이곳으로 옮겨졌다는 건 금발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또 나타났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저번과 똑같이 금발을 가진 사람은 아주 조그마한 단서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었다. 이미 떠난 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금방 포기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자국이 있다. 그것은 새빨간 핏자국이었다. 그제야 나는 관람차 안에서의 일들이 선명하게 기억이 났고, 이수호가 나를 보호해주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이수호를 찾아서 한 방울씩 떨어져 있는 핏자국을 쫓아갔다. 핏자국은 남자화장실로 이어졌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역시 걱정이 되어서 주위를 살핀 뒤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건 상의를 벗고 등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이수호였다.
“야! 너 왜 그래?”
“어, 어? 아니야.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여기서 딱 기다려.”
나는 바로 달려 나와서 의료센터를 찾아갔다.
“헉... 저기요! 헉... 친구가 피를 많이 흘려요... 도와주세요!”
화목했던 센터의 분위기는 내 말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거기가 어디죠? 의료반! 준비해!”
“바이킹하고 헉... 가까운 남자 화장실이에요.”
“네. 저희가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건장한 남자 세 명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도 따라서 힘든 몸을 이끌고 뛰쳐나가려고 하니, 직원 한 명이 나를 잡았다.
“학생도 상처가 있는데 치료 받으면서 기다리세요.”
“하지만...”
“직설적으로 말해서 지금 학생이 간다고 해도 도와줄 수 있는 거 없어요. 아까 나간 사람들은 전부 다 자격증이 있는 전문 의료진들이니 믿고 기다리세요.”
“... 네.”
나는 직원의 말대로 의료센터에서 치료를 받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몰랐었지만, 목과 귀, 그리고 팔에도 약간의 베인 자국이 있었다. 분명 이수호가 막아주었지만 틈새로 날아온 파편에 베인 거 같다.
“조금 따끔해요.”
“아! 아...”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상처부위에 소독용 솜이 닿으니 이제야 통증이 느껴졌다. 소독을 시킨 이후에는 연고를 발랐다.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치료를 받고 난 후에, 직원의 안내에 따라서 자리에 앉아있었다. 시선은 의료센터의 출입문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하하. 걱정 말아요. 거리가 멀지도 않으니 금방 옵니다.”
직원의 말에 안심한 것도 그때 뿐, 5분에서 10분, 10분에서 15분으로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내 걱정은 점점 커져갔다. 왜냐면 이곳까지 달려오는 데에 약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치직-
이때 직원이 들고 있던 무전기에서 신호가 왔고, 직원은 귀에 가져다 댔다.
“... 뭐? 무슨 소리야! 다시 말해봐!”
뜬금없는 직원의 호통에 나는 불안한 마음이 앞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게... 핏자국은 확실히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애가 말했던 남자애가 없습니다!”
“네? 뭐라고요?”
나는 무전기에서 들려온 말에 크게 당황하였다. 그리고 바로 의료센터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는 직원이 소리치며 뭐라고 했지만 귀 담아 들을 여유는 없다. 아까의 화장실까지 달려갔다. 숨이 계속 차올랐지만 개의치 않고 달렸다. 내가 도착을 했을 땐, 아까 치료해주러 나갔었던 직원 한 명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허억... 진짜... 없어요?!”
“어? 아, 네. 그래서 지금 동료 직원들이 수색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자리를 지키라고 했었는데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서 이수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었지만... 번호를 모른다. 아니, 그 이전에 생각해보면 이수호가 휴대폰을 들고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연지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뚜두뚜두- 달칵-
“은지야!!! 너 어디에 있었어!!!”
“나 아까 쉬었던 벤치에 있어. 아니 그보다도 이수호 못 봤어?”
“안 그래도 우리 지금 너하고 수호 찾고 있었어! 너희가 탔던 칸이 사고가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고 해서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안에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이렇게 찾고 있었잖아! 살아있으면 살아있다고 말해줘야지, 어?”
연지는 울먹이며 말을 했다.
“그건 정말 미안해... 이유가 있어서 그래. 이수호를 빨리 찾아야 해! 걔 지금 피 흘리는 상태로 어디론가 사라졌어!”
“뭐? 알았어! 나랑 희건이도 찾을 거니까 만약 찾으면 연락해줘!”
“어, 부탁할게!”
나는 연지와의 통화를 끊자마자 바로 이수호를 찾아서 돌아다녔다.
“이수호! 이수호!!! 어디 간 거야!!!”
“나? 여기 있는데?”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정말 이수호가 있었다. 나는 이수호에게 달려가서 그를 안았다.
“어디 갔었던 거야... 내가 기다리라고 했었잖아!!!”
“갑자기 모르는 사람들이 달려와서 숨었었어. 미안해...”
“그게 뭐야...”
나는 안심을 한 나머지 눈물이 흘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눈물샘이 약한 건지 모르겠다. 매번 울 때마다 내 눈물샘은 이제 바닥까지 말랐다고 생각을 했는데, 왜 계속 눈물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진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어? 아냐고!”
“... 미안해.”
이 때 내 머리 위로 이수호의 손이 얹어졌다.
“고마워. 고생했어...”
“하, 진짜... 이번만 봐주는 거야.”
나는 수호의 손이 저번과는 달리 매우 따뜻하게 느껴졌다. 답답하고 힘들었던 아까의 고난들이 조금씩 씻겨서 내려갔다. 나는 수호를 더욱 꽉 안았다.
그 상태로 잠시 몇 초가 지났다. 그제야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까 수호를 보았을 땐, 등이 피투성이였고, 입고 있던 교복도 피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지금 교복은 물론 등에 닿고 있는 내 손에는 어떠한 축축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나는 수호의 등을 좀 더 섬세하게 더듬어 보았지만 분명 어떠한 이질감도 없이 뽀송뽀송한 느낌만이 느껴졌다. 나는 수호에게서 떨어졌다.
“너 아까 본 상처는?”
“어?”
“너 아까 등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잖아. 교복도 피에 젖어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뭐야?”
“잘못... 본 거 아닐까?”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분명 수호의 등을 덮고 있는 피를 보았고, 피에 젖은 교복을 들고 있는 것도 보았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너, 뭐야? 너 사람은 맞아? 도대체 정체가 뭐야?!”
“나... 는... 그게...”
수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절대로 넘어가려고 하지 마.”
도대체 이수호 라는 사람이 누군지, 아니 그전에 정말 사람은 맞는 건지. 수호를 믿기 위해선 수호에 대해서 내가 알아야 한다. 새치기를 한 남자의 알 수 없는 말,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 사라진 피의 흔적, 그리고... 어렸을 적에 놀이터에서 엄마가 보았던 그 상황. 궁금증을 해소하기도 전에 오히려 하나 둘씩 생겨나니 점점 나는 혼란이 생기며, 불안했었다. 이젠 알아야만 한다.
나는 수호의 눈을 흔들림 없이 쳐다보았다. 수호는 계속해서 어쩔 줄 몰라 시선을 피하다가, 이윽고 포기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수호의 눈빛은 한순간에 바뀌었다.
“정말 가르쳐 줘?”
“응.”
“믿을 수 있어?”
“그건 들어보고 결정할게.”
“하... 알았어. 밤에 말해줄게.”
“밤에 말고, 지금 당장!!!”
지금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수호는 계속해서 나를 피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번에 전학 온 것처럼 다시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갈 수도 있다. 지금 당장 들어야만 한다.
“이야기는 그렇다고 쳐도, 우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
수호의 말대로 연지와 희건이는 우리를 찾고 있다. 어쩌면 아까의 의료센터 사람들도 아직까지 찾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걱정 마. 이번엔 도망안가.”
수호는 내 생각을 알아차린 건지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미리 답해줬다.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야.”
“진짜야?”
“어.”
항상 해맑은 미소와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여주었던 수호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 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수호의 말에 의심을 품고 있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표정을 봐서 그럴까? 조금은 믿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럼, 알았어...”
“고마워. 애들 걱정하겠다. 가자!”
나는 가자고 독려하는 수호를 잡았다.
“어?”
“휴대폰 번호 내놔...”
수호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본인의 머리를 긁적거렸다.
“저기... 실은 나 휴대폰 없어.”
“그럼 어떻게 말해준다는 거야?”
“그건 걱정 마. 다 방법이 있으니까. 날 믿어줘.”
수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더 이상 수호가 내게 거짓말을 할 거 같지는 않다. 속는 셈 치고 믿어보기로 했다.
“... 알았어.”
“그럼 가자!”
수호는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잡으려다가 그 손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짝-
수호는 나를 당황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뭐해? 가자며?”
“어? 어.”
우리는 연지와 희건이에게 전화를 하며 매표소로 걸어갔고, 도착하고 5분 정도 지나니 전원이 다 모였다.
“은지야!!!”
나를 보자마자 연지는 내게 안겨들었다. 나는 그런 연지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무사했구나! 흐윽...”
연지에게서 조금씩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무사했어. 빨리 연락 못 해줘서 미안해.”
“아니야! 살아있으니 괜찮아...”
나는 계속해서 연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때 뒤에 있던 희건이가 눈에 들어왔다. 희건이의 얼굴은 퉁퉁 부은 상태였다. 특히나 눈가가 빨갛고 부은 걸 보면 쟤도 어지간히 걱정을 많이 한 거 같았다.
“뭐... 뭘 봐? 쟤는 눈물 질질 흘리지만 나는 아니거든?”
“아, 예...”
“웃기고 있네! 아까 전화오기 전까지 계속 울던 사람이 누군데!”
한참을 울던 연지가 고개를 들어서 희건이를 째려보았다.
“야! 시끄러워!”
“너나 입 다물어!”
“알았으니까, 그만! 이제 가자! 차 놓치겠어.”
나는 휴대폰으로 차 시간을 알아보았다.
“어? 그러고 보니 수호, 피 흘린다고 안 했어?”
아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으응... 흘렸었지...”
“그런데 피 흘린 사람치고는... 되게 멀쩡한 거 같지 않아?”
나는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고민했으나 떠오른 묘안이 없어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수호가 입을 열었다.
“코피 났었어.”
“코피?”
“코피?!”
연지는 나를 쳐다보았다.
“너도 처음 듣는 것처럼 보인다?”
“어어 어? 아! 아니야. 맞아! 코피 났었어.”
연지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난 그걸 애써 피했다.
“마지막으로 집 가는 차가 저녁 8시에 딱 하나있어! 빨리 가야 돼.”
우린 급히 매표소 밖으로 나가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줄에 따라서 섰다. 줄을 서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택시가 별로 없어서 꽤나 시간이 걸릴 느낌이었다.
“우리 빨리 가야하지?”
“어.”
내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저 멀리서 약 10대로 보이는 택시가 우르르 몰려왔다. 나는 수호를 급히 쳐다보았다.
‘설마...?’
수호는 짧은 미소만 짓고 빨리 택시에 탑승하자는 몸짓을 보였다. 한꺼번에 몰려온 택시 덕분에 줄은 빠르게 줄었고, 우린 터미널까지 빠르게 움직였다. 도착했을 때는 시간이 30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사먹고 싶은 것들은 다 사먹으니 정확히 시간이 맞아 떨어졌다. 여유롭게 시간을 남겨서 버스에 탑승을 했다.
“후... 드디어 집이다!”
“오늘 너무 힘들었어...”
“그러니까! 은지하고 수호는 진짜 고생 많이 했어.”
연지가 나와 수호의 어깨를 잡고 토닥였다.
“저기 나는?”
“어휴... 진짜 쟤들이 아니라 네가 사고를 당했어야 했는데...”
“뭐라고? 이게 진짜!”
희건이는 노발대발하고 있고 연지는 혀를 내밀고 놀리고 있다.
“연지야? 희건이가 사고를 당하면 너도 같이 당하는 거야...”
“헐... 맞네? 어우, 싫어! 쟤랑 같이 죽을 바에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죽을 거야!!!”
“내가 뭐 어때서!”
분명 저 두 명은 언젠가 한 번쯤은 연애를 할 거 같다. 매번 저렇게 서로를 물어뜯지만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연인끼리의 다툼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너희 언제 사귈 거야?”
“미쳤어?”
“나도 눈 있어!”
“히히히.”
우리는 그렇게 수다를 떨다가 버스가 출발하고는 바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