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야! 괜찮아?!”
공간을 벗어나자마자 눈에 보인 건 수호였다.
“... 아니. 안 괜찮아.”
나는 나를 잡고 있던 수호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
“피곤해. 자고 싶어. 내일 이야기하자.”
내 할 말만을 일방적으로 남기고 수호를 그 자리에 놔둔 체,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조금 늦었네? 밥은?”
“먹고 왔어. 오늘은 좀 피곤하니 일찍 잘게.”
달칵-
나는 방에 오자마자 전등을 켜고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보았다. 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하니 내 왼쪽 눈에 보라색으로 7이라는 숫자가 새겨져있었다. 보라색 관리자의 말대로라면 자정이 되는 순간 눈에 새겨진 숫자는 7에서 6으로 바뀔 것이다.
“하...”
정말 나는 이 숫자가 0이 되는 날에 죽게 되는 걸까? 드라마에서나 보던 시한부라는 것을 설마 내가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분명 보라색 관리자의 말대로 나는 원래라면 이미 죽었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변은 생각할 수도 없다.
“정말... 죽는구나...”
그나마 다행인 건 보라색 관리자가 아프지 않게 죽여준다고 했었다. 이것은 전혀 좋은 말은 아니지만 이미 체념을 해서 그런지 저런 배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에 일어났던 트럭이나 관람차 때처럼 죽는다고 생각하면 느껴질 고통이 상상되어 지금처럼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수호다.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지켜주느라 고생하고, 다치고,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이젠 지켜줄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수호는 어떻게 반응을 할까? 아마도 당황하고, 나를 설득하고, 끝내 울어버릴 거라 예상한다. 겉은 나랑 같은 또래지만 속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와 다름없으니...
연지와 희건이도 떠오른다. 분명 내가 없어진다면 둘은 내 장례식에 찾아와주겠지? 연지는 물론, 희건이도 펑펑 울 거 같다. 정말 정이 많은 애들이니까... 나 없다고 계속 티격태격 싸우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 아빠... 그냥 죄송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안 그래도 외동딸인데 그런 내가 먼저 저승으로 떠나게 되다니... 정말 불효자가 따로 없다. 깊게 생각을 해보면 부모님은 나, 하나를 위해서 정말 많은 걸 희생하시고, 감정을 숨기시고, 안 보이는 곳에서 수많은 노력을 하셨다. 엄마에게는 투정을 계속 부리고, 정말 내 성격이 오고가는대로 행동했었지만 그런 나를 계속 따뜻하게 받아주셨다. 가부장적인 아빠는 가끔 용기를 내셔서 나와 소통을 하려고 노력하셨지만 나는 그 노력을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나는 정말 저승에서도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침대로 들어가서 누웠다.
“... 그래도 마지막은 좋은 기억을 남기고 헤어져야겠지?”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내렸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심란했다.
***
“미안해.”
“뭐가 미안해?”
“나, 이제 너랑 못 놀아.”
“왜?”
“아주 먼 곳으로 이사 간대.”
“... 얼마나 멀어?”
“모르겠어. 엄청 멀대.”
“다시 만날 수 있어?”
“모르겠어... 아마 못 만날 거야...”
“만약에 내가 너를 찾아가면?”
“그러면 만날 수 있어!”
“알았어. 그럼 내가 너를 찾아갈게!”
“정말이야? 우와! 고마워! 정말 좋아해!”
“어, 어? 응... 나도 정말 좋아해.”
***
따사로운 햇살이 커튼 사이로 들어와 나를 깨웠다.
“으으음...”
많은 생각에 뒤척이다가 늦게 잠들었었다. 정신이 아직도 몽롱하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가, 바로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왼쪽 눈에는 보라색으로 6이 새겨져있었다. 아주 잠깐은 어제의 일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행복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거울을 본 순간, 다시 나의 처지를 알게 되었다. 어제의 일은 꿈이 아니다. 나는 앞으로 6일 뒤에 무조건 죽는다. 오늘은 내 죽음의 카운트가 시작되는 날이다.
“하...”
거울을 보며 웃으려고 애를 썼지만 도저히 내 표정은 밝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죽을 때는 죽더라도 웃으며 떠나야 하는데... 하...’
나는 양손을 들어서 양쪽 뺨을 동시에 때렸다.
짝-
“정신 차리자, 정신!”
나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어? 일어났어? 저번의 잘생긴 친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얼른 챙겨~”
“오늘은 집 안으로 안 데려왔어?”
“어. 오늘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더라.”
나는 엄마의 말을 듣고 바로 현관으로 달려가 빠르게 현관문을 열었다.
쾅!
문을 열자 무언가에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작게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어서 밖을 쳐다보았다. 수호가 머리를 싸매고 쪼그려 앉아있었다.
“너... 괜찮아?”
수호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으... 응. 괜찮아...”
아픈 걸 애써서 참고 말하는 듯, 수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이런 장면을 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려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수호에게 손을 뻗었다.
“일어나.”
수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 손을 잡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들어가 있으면 싫어하는 거 같아서...”
이 정도면 얘는 선천적으로 보호 욕구를 일으키게 태어난 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항상 내가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걸까? 마음속으로 큰 한숨을 쉬었다.
“싫어하지 않으니까, 바보같이 그러고 있지 말고 어서 집으로 들어와.”
“응... 고마워.”
나는 현관문을 다시 열었고, 수호와 같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 잘생긴 친구, 결국 데려왔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나 준비하고 올 거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응.”
수호를 거실 소파에 앉히고 난 바로 씻기 위해 화장실로 갔다. 이를 닦고, 얼굴을 세안하는 내내 눈앞에는 거울이 있었다. 때문에 내 시선은 내 왼쪽 눈에 새겨진 숫자 6에 고정되어 있었다. 왠지 이 숫자 때문에 거울을 보기 싫어질 거 같았다. 머리는 귀찮으니 감지 않고 바로 나왔다. 방으로 돌아오며 거실을 보니 수호는 또 엄마가 주는 빵을 어김없이 흡입하고 있었다. 수호는 나를 보자 빵을 하나 집어서 나에게 내밀었지만 나는 사양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하...”
간단한 화장을 하면서도 6이라는 숫자를 볼 수밖에 없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보라색 관리자는 이러한 점을 노리고 거울을 자주 보냐고 물어본 것이 분명하다. 이런 나의 처지에 비해, 수호를 봤을 땐 정말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무사태평해 보이는 모습이 그저 부러웠다.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니 수호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수호는 즉시 탁자 위에 있던 빵들을 챙겨서 나에게 달려왔다.
“그즈!”
“안 뺏어먹을 거니까 입안에 있는 거나 다 먹고 이야기해.”
“으!”
수호랑 같이 있으면 아이를 돌보는 엄마가 된 기분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줘야 하니 전혀 허언이 아니다.
달칵-
집 밖으로 나와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걸어가는 내내 고민을 수없이 했다.
‘내가 말없이 사라진다면 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미리 말을 해줘야할까...? 아니야! 미리 말하면 어떤 짓을 할지 몰라. 그냥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사라지자...’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역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수호는 갑자기 멈춰서 나를 진지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응? 아!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
수호는 필요하지 않을 때만 눈치가 너무 빠르다.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얼버무려야 한다.
“내가 무슨 일이 생기겠어? 네가 이렇게 옆에서 나를 지켜주는데~”
나는 수호의 팔을 당겨서 팔짱을 꼈다. 그러자 수호는 당황하더니 팔을 위쪽으로 슬며시 뺐다.
“아! 알았어! 하여간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니까.”
“그런가? 그때가 기억이 안 나서 모르겠네? 빨리 가자!”
나는 수호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수호도 이번만 넘어간다는 듯 저항 없이 순순히 따라왔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
버스는 학교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에 타고 있던 모든 학생들은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한순간에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수호와 나도 버스에서 내렸다. 우린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동의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뀔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내 눈에 포착된 한 사람 있었다.
우리 학교의 교복을 입고, 머리까지 까맣게 물들였지만 눈 밑의 점, 저런 재수 없는 표정, 능글맞은 눈빛을 보면 딱 한명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저게 여기에 왜...”
“응? 뭐가?”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수호가 물어왔다.
“어어어? 아무것도 아니야!”
수호는 저 관리자에 대해서 모를 것이다. 수호의 앞에서 나는 저 사람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면 안 된다.
이때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신호가 바뀜과 동시에 횡단보도를 건넜지만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안 건너?”
“어? 응. 건너야지...”
‘제발 아는 척 하지 않았으면... 제발 모른 척 해줘. 제발...’
횡단보도의 흰 부분과 검은 부분을 지날 때마다 내 숨통이 조여졌다. 학교의 정문으로 다가 갈수록 내 심장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두근- 두근-
이윽고 보라색 관리자는 내 눈앞까지 가까워졌다.
두근두근-
보라색 관리자의 옆을 10cm도 안 되는 거리만을 남겨두고 스쳐지나갔다.
쿵쾅- 쿵쾅-
“얘~ 모른 척 할 거야?”
‘하...’
나는 보라색 관리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긴 왜 왔어요?”
“왜긴 너 감시하러 왔지~?”
“그게 무슨...”
수호가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누구야?”
“어? 글쎄... 누굴까...?”
나는 팔꿈치로 보라색 관리자를 툭툭 쳤다.
“응? 아~ 안녕! 난 너랑 같은 관리자야! 잘 부탁해~”
‘아... 망했다.’
보라색 관리자는 말을 끝마치며 수호에게 악수를 청했다. 고개를 돌려 수호를 쳐다보니 적잖이 당황해보였다.
“이, 이게 지금 무슨 말이야?”
“어? 그게 사실은...”
“뭐야 얘기 안 했어?”
“아! 좀 조용히 해요!!!”
“무슨 이야기?”
이런... 어제부터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얼버무리며 숨겨왔었는데 여장남자 한명 때문에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잘 모르겠는데...? 무슨 이야기를 말하는 걸까?”
“그렇게 기억하라고 숫자까지 새겨줬는데 그걸 기억 못... 읍!”
나는 자유분방하게 날뛰는 저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보라색 관리자의 귀에 대고 이를 악문 체 말했다.
“정말 눈치가 없는 거예요?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네?”
“우읍! 읍! 읍!”
보라색 관리자는 입을 막고 있는 내 손등을 치다가 손목을 잡고 억지로 때내었다.
“더러운 손으로 내 입을 막으면 어떡해!!! 퉤- 퉤-”
“댁보다는 자주 씻거든요?”
“우웩... 씻었는데 이렇게 짠맛이 나? 좀 더 깔끔하게 씻진 못 해?”
“아, 진짜 짜증나!”
보라색 관리자와 내가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수호는 둘 사이에 들어오고 무서운 눈으로 보라색 관리자를 쳐다보았다.
“너, 뭐야?”
“어머, 얘가~ 방금 말했잖니? 관. 리. 자. 라고?”
“내가 묻고 있는 게 그게 아니잖아!!!”
수호가 언성을 높이자, 주변의 시간의 한순간에 멈췄다.
“워후~ 이게 네 권한이구나? 설마 했었는데 시간의 관리자일 줄이야. 꽤나 높으신 양반이었네~?”
“말장난할 기분 아니야. 다시 한 번 물을게. 너 누구야?”
“나? 어쩔까나? 궁금해?”
수호의 저 눈빛, 마치 놀이공원 때가 떠오를 정도로 무서운 눈빛이었다.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질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라색 관리자는 여유 만만한 모습으로 본인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흡사 사람의 손을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미꾸라지를 보는 듯 했다. 수호는 보라색 관리자의 짜증나는 태도에 계속해서 사납게 째려보았다.
“휴~ 알았어. 얘는 참 농담도 못 받아들이고 있어, 증말!”
그러더니 보라색 관리자는 잠시 서있더니 본인의 머리 위로 동그란 링을 만들었다. 그 링은 보라색 관리자의 몸으로 내려오더니 머리부터 발끝 순서대로 저번에 보았던 보라색의 긴 머리카락, 요상한 차림으로 바뀌었다.
“너도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래?”
“하...”
수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곧이어 수호의 머리카락은 검은 색에서 아름다운 금색으로 변하였고, 수호의 짧은 머리도 종아리에 닿을 정도까지 길어졌다. 입고 있던 교복도 조금씩 변하더니 금색으로 무늬가 그려져 있는 새하얀 소복으로 바뀌었다. 나는 수호의 본래 모습을 보고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내가 수호를 처음 보았을 때, 천사라고 느낀 건 전혀 과하지 않았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흐~ 음? 너 정말 아름답다? 제법이야.”
보라색 관리자는 수호의 변한 모습을 감상하다가 다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반가워~ 내 이름은 조영이고, 너와 같은 관리자야. 잘 부탁해~”
수호는 조영이 건넨 손을 쌔게 뿌리쳤다.
“마지막이야. 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