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막힐 정도의 압박감이 옆에서 보고 있던 나를 조여 왔다. 대놓고 무섭게 쳐다보는 수호와 능글맞게 쳐다보는 조영, 이 두 명의 관리자들이 공간을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이런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수호가 세상의 시간을 멈춘 탓에 시간이 흐르는 건 수호, 조영 그리고 나뿐이었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말려야 한다.
“저기...”
“후~ 알았어. 알았어. 화내지마~ 가르쳐줄게~”
조영은 한순간에 눈빛을 바꾸었다. 그 눈빛은 어제 보았던 무서운 눈빛 중 하나였다.
“난 네가 지키는 저 애를 감시하러 왔어. 그게 끝.”
“감시? 무슨 말이야? 네가 뭔데 은지를 감시해?!”
조영은 깊은 한숨을 쉬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순간 움찔하여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너 정말 하나도 말해준 게 없구나? 에휴...”
“나중에 말하려고 했어요...”
조영은 다시 수호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말 나온 김에 말해주도록 할게. 너, 이 꼬맹이 지키고 있지?”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왜 모를 거라고 생각할까? 그렇게 대놓고 도와주는데. 이미 나 말고도 아는 관리자들은 많을 걸? 어쩌면... 윗분들도 알고 계실 수도 있고?”
“그럴 리는... 없어. 알고 있다면 진작 개입했을 거야.”
조영은 수호가 짜증이 나는지 혀를 찼다.
“쯧. 너, 정말 멍청하구나?”
“뭐라고?!”
“네 위치를 몰라? 시간의 관리자라면 4대 법칙의 관리자 중에 한명 아니야? 잡 법칙을 관리하는 관리자들도 너의 소문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윗분들이 모를 수가 있을까?”
수호는 어떤 말로든 반박을 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끝내 생각이 안 난 듯 혼자 끙끙 앓다가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말았다.
“...”
“지금까지 상황파악이 안 되다가 드디어 파악을 한 거 같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
“우와앗!”
조영은 나를 갑자기 잡아당기더니 수호와 마주보게 세우고 내 양쪽 어깨를 잡았다.
“너, 얘랑 그만 만나.”
“뭐?”
“너도 잘 알잖아. 관리자와 인간 사이에 관계가 생긴다면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 하지만.”
조영의 눈빛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저 눈빛 또한 나는 어제 보았었다.
“하지만 뭐! 네가 어떤 핑계를 말하더라도 윗분들이 용서를 해줄 것 같아? 이해를 해줄 것 같아? 웃기지마. 너는 4대 법칙의 관리자라고는 하지만 윗분들 앞에선 수많은 관리자 중 한명에 불과해. 그런 한낱 관리자가 윗분들의 생각에 토를 달아?”
“꺄악!”
조영은 나를 옆으로 재끼고 수호의 멱살을 잡았다.
“너, 기어오르지 마. 너는 무사할 거 같아? 네가 하는 짓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하는 거야? 반역이라고 반역!!! 신이 만든 살생부의 운명을 네가 지금 거스르고 있는 거라고!!! 윗분들이 가만히 있을 거 같아? 웃기지 마. 너와 저 여자애는 진시황 때랑 다를 게 전혀 없어. 결국 너는 저 여자애를 지키지도 못하고 그냥 개죽음을 당할 운명이라고!!!”
수호는 조영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아래로 떨군 체,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런 수호를 보며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염원했다. 수호가 평소처럼 자신이 지켜주면 된다고, 아무 문제도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수호는 내 염원과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 생각보다 겉만 번지르르하구나? 네가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인 줄 알았어? 너희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해피엔딩일 줄 알았어? 그게 바로 허황된 꿈이라는 거야. 지금도 봐봐. 현실과 여과 없이 그대로 부딪히게 해주니 아무 말도 못하잖아? 넌 그냥 네가 사랑에 빠진 이 상황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상상만 하고 있을 뿐이야. 하는 건 아무 것도 없이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지.”
수호의 팔과 다리를 시작으로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본인은 그 떨림을 멈추게 하려고 주먹을 꽉 쥔 거 같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조영도 반응이 없는 수호를 보고 열이 식었는지 무서운 표정이 점차 풀렸다.
“하... 나도 이젠 모르겠다. 겨우 이런 놈이 시간을 관리한다니, 앞일이 훤히 보이네.”
조영은 본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던 수호의 머리카락을 꽉 잡아, 머리를 본인의 눈높이에 맞게 들어올렸다.
“야. 잘 들어. 내가 어제 저 여자애한테 권한을 사용했어. 다음 주 월요일 유시에서 술시로 넘어갈 때, 저 여자애의 영혼은 곧바로 저승으로 이송될 거야. 그 사이에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마음을 정리하고 그만 보내줘. 그게 네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기억해.”
조영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조영이 자리를 떠난 후에도 수호는 말없이 그 자리에서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로 서있었다.
“저... 수호야...”
“... 미안.”
미안하다는 말만을 남기고 수호도 한순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단, 시간은 멈춰놓은 체. 나는 주인을 잃어버린 강아지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아... 이제 어떡하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나를 제외한 모든 시간은 멈춘 상태다. 한참을 고민하고 나서야 결국 포기를 하고 나중이면 원래의 시간으로 돌려주겠지 싶어서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 교실로 향하였다. 걸어가는 내내 주변을 훑어보았다. 지난번에도 겪었었지만 내가 매일 지내던 익숙한 공간이라서 그런지 더욱 신기했었다.
달려가는 사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사람, 복도에서 공을 차는 사람, 정말 다양한 장면들이 영화를 멈춘 것처럼 보여서 새로웠다. 물론 전부 멈춰있어서 무리지어 다니는 사람들이 길을 막고 있으면 매우 난항을 겪기도 했다. 수많은 인간 장애물들을 지나서 나는 교실로 돌아왔다. 시간이 멈춘 교실에서 나는 내 자리로 걸어가서 앉았다.
“후...”
정말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수호가 듣는 다면 어떤 식으로든 무모한 짓을 할 것 같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데, 왜 조영은 대놓고 자신의 존재를 수호에게 밝힌 것일까? 오히려 본인의 존재를 밝힌다면 수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하아아암...”
생각해보면 최근 들어서 푹 자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았다. 하루하루가 다사다난하게 지나가다보니 생활 패턴이 꼬여버렸다. 시간이 멈춘 지금이라도 잠시 잠을 청해야겠다. 분명 시간이 다시 흘러간다면 주변이 시끄러워져서 알아서 깨겠지...
***
“아, 아! 안녕!”
“...”
“저기... 안녕!!!”
“... 나한테 인사하는 거야?”
“응! 널 만나러 찾아온다고 했었잖아!”
“날 만나러? 왜? 너 나 알아?”
“그게... 무슨... 말이야?”
“그거 내가 할 말 아니야? 너, 누구야?”
“나잖아... 놀이터에서 같이 놀던... 기억 안나?”
“그런 거 몰라.”
“모른다니... 장난이지? 그런 거지?!”
“이거 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응?”
“무서워... 너야말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 갈래!”
“안 돼! 가지 마!!!”
***
“흐으으음...”
목이 아프다. 어지럽다. 온몸이 무겁다. 내가 얼마나 잔걸까? 눈만 슬며시 떠서 앞을 보았다. 잠들기 전과 똑같은 장면이다. 이렇게까지 몸이 무거운 걸 생각한다면 분명 몇 시간이나 잠을 잤다는 말인데, 아직까지도 시간은 흐르지 않고 있다. 이쯤 되니 불안한 생각이 나를 엄습했다.
“이수호! 이수호!!!”
허공에 소리를 쳐봤지만 이수호는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생각이 더욱 커져서 나를 조여 왔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운동장까지 뛰쳐나갔다.
“이수호! 어디 있어!!!”
“글쎄~ 아마 불러도 안 나올 걸?”
눈앞에 조영이 나타났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참, 애가 머리 하나는 좋단 말이야~ 지금 네 친구가 왜 시간을 안 흐르게 하는지 알아?”
“... 아니요.”
“이 시간을 멈춘 게 언제지?”
시간을 멈춘 때라면...
“댁하고 우리가 만났을 때요.”
“댁이라니... 섭섭하다! 얘~ 뭐 일단은 정답! 그럼 두 번째로 시간을 멈출 때 멈추지 않은 사람은 누구지?”
본인도 알고 있으면서 왜 계속 확인하는지 모르겠다.
“댁, 수호 그리고 저요.”
“그것도 정답! 네 말대로 총 3명을 제외하고는 시간이 멈춰버렸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모르겠어요.”
“땡! 정답은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말 그대로야. 나는 너에게 권한을 사용해서 일주일의 기한을 주었지? 나는 그걸 시간의 관리자에게 말했고?”
“네.”
“결국 시간의 관리자는 어리석은 결단을 내린 거 같아.”
어리석은 결단? 저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어떤 결단인데요?”
조영은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죽는 날까지 시간을 멈추는 거야.”
“그게 무슨...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글쎄~ 그건 내가 시간의 관리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
조영은 양손을 얼굴 옆에 눕히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만약 그렇다면... 저는 안 죽는 게 아닌가요? 저에겐 좋은 거죠!?”
조영은 내 말에 긍정의 표현도 부정의 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조영의 저런 모습을 보니 도리어 불안해졌다.
“아닌... 가요?”
“글쎄~ 내 생각은 오히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
왜 위험하다는 걸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또 있는 것일까?
“자, 생각을 해보자. 아까 확인한 대로 이 세상에는 우리 둘과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네 친구의 시간만 흐르고 있어. 그런 면에서 죽음의 관리자의 시간도 멈춰있고, 내가 걸어놓은 제한의 시간 또한 멈춰 있기 때문에 너는 죽을 일이 없어. 이건 아주 좋다고 생각해!”
설마 관리자들까지 시간이 멈출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운명에 따라 죽을 일도 없고, 눈에 적힌 숫자가 0이 되어 죽을 일도 없다. 수호가 머리를 아주 잘 썼다고 생각했다.
“하. 지. 만!”
“하지만...?”
“첫 번째로 네가 남은 세월들을 멈춘 시간 속에서 보낼 수 있을까? 시간이 멈췄지만 너의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기 때문에 배가 고플 것이고, 생리현상도 찾아올 거야. 하지만 그것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지금의 세상에서 움직이는 보통의 사람은 사실상 너 밖에 없어. 즉, 이곳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생존을 위해서 먹고 자는 것 밖에 없을 거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던데... 이 상황이 유지되는 동안 너는 아무도 만날 수 없고,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 이래도 평생을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까? 오히려 나중에는 네가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을 하게 될 걸?”
조영의 냉혹한 말투가 나에게 현실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조영의 말은 듣고 보니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비록 내가 많은 사람과의 소통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아예 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견딜 수 있을까? 버텨낼 자신은 없다.
“혹시...”
“미리 말해두겠지만 나는 너의 심심함을 해소해줄 생각이 전혀 없어~ 관리자들은 처음부터 혼자였으니까 고독이라는 게 없거든. 호호~”
이미 눈치를 챈 건지 조영은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미리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아! 그리고 네 시간의 관리자에게도 바라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왜요...?”
“걔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눴지만 대충 파악을 했어. 분명히 널 살릴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너를 만나러 오지 않을 거야. 같이 있으면 너에게 설득 당해서 멈춘 시간을 원래대로 돌릴지도 모르니까. 난 사람 보는 눈은 꽤나 정확하니 신용해도 좋아.”
내 생각도 조영과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칠칠맞지 못하게 행동하고 내가 챙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최근의 일들을 생각한다면 현재 분명히 나를 살리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너는 시간이 멈춰진 공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는 거야.”
“왜요? 죽음의 관리자도 멈추고, 시간제한도 멈췄는데 내가 자살하지 않는 이상에야 죽을 가능성은 없지 않나요?”
“... 아니. 딱 한 가지의 가능성이 더 남아있어.”
조영은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바로 신이야.”